저우언라이와 키신저를 이어준 茶 한 잔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15 13:15
  • 호수 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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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Tea Road] 단절된 미·중 관계 복원 위해 물밑협상 후 루안과(六安瓜片) 선물

 

‘핑퐁외교’를 견인한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중국 총리가 사망한 1976년 1월8일 유엔 본부는 이례적으로 가맹국 국기를 하나도 게양하지 않고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유엔기만 조기로 게양했다.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발트하임이 조기 게양을 반대하는 국가들을 설득한 파격적 결과였다. 냉전시대 속에서 ‘죽의 장막’을 해제하고 미국과 중국을 화해 무드로 이끌어낸 저우언라이의 유연한 정치외교 능력을 높이 평가한 닉슨 미국 대통령은 “마오쩌둥이 혁명의 불씨를 살려냈지만 저우언라이가 없었다면 그 불길은 중국 대륙을 모두 태워버려 재만 남았을 것”이라고 회고하며 저우언라이의 죽음을 애도했다. 20세기 최고의 외교 전략가로 인정받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회고록에서 “공인으로서 지낸 60여 년 동안 만난 정치인 중에서 저우언라이보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인물은 없었다”고 표현했다.   

 

루안과 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저우언라이 전 중국 총리 ⓒ서영수 제공

 

미·중 관계 해빙에 앞장선 저우언라이

 

22년 동안 이어져온 적대의 세월을 뛰어넘어 1972년 닉슨이 중국을 처음 방문하기 전 저우언라이는 비밀외교를 통해 동지처럼 가까워진 키신저에게 방광암 투병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언제 죽게 될지 모르는 암환자인 내가 죽기 전에 미국과 수교를 끝내고 싶다. 온건파인 내가 죽으면 언제 또 해빙의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다”고 키신저를 설득해 닉슨이 양국 수교를 미루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현역으로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는 키신저가 닉슨의 밀사로 전 세계의 이목을 따돌리고 1971년 7월9일 베이징에 도착했다. 

 

단절된 양국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극비외교는 7월11일까지 진행됐다. 닉슨의 중국 방문일정을 중국과 미국이 동시에 발표하기로 힘겨운 물밑협상을 마무리한 키신저에게 저우언라이는 루안과(六安瓜片)을 선물하며 옛 혁명동지 예팅(葉挺) 장군을 떠올렸다. 저우언라이의 소울 푸드(Soul food) 루안과을 처음 소개한 예팅은 1927년 8월1일 난창(南昌) 봉기를 주도한 저우언라이와 함께 사선을 넘은 무장 세력의 총지휘관이었다. 1939년 봄 국민혁명군 육군 신편(新編) 제4군 지휘관으로 예팅이 부임하며 저우언라이에게 준 마음의 선물이 루안과이었다.  

 

1946년 1월30일 시안(西安)에서 이륙해 충칭(重慶)으로 향하는 군용기 안에는 ‘국공 정전협정’을 타결하기 위해 마지막 정치협상회에 참석하는 저우언라이가 타고 있었다. 탑승자 중에는 국민당 감옥에서 곧 풀려나는 예팅 장군의 11살 난 딸 예양메이도 있었다. 산시(山西)성 친링산맥 상공에서 강한 냉기류를 만난 군용기는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제공한 낡은 군용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기장은 모든 짐을 버릴 것을 명령했다. 모든 물건을 버려도 비행기가 산봉우리를 넘지 못하고 계속 하강하자 기장은 전원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릴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기장이 신호하면 눈 덮인 험준한 산골짜기로 뛰어내려야 하는 급박한 순간에 예양메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예양메이의 좌석에는 낙하산이 비치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일어나 자신의 낙하산을 벗어 예양메이의 등에 메어주었다. 다행히 군용기는 추락하지 않았다. 국민당 감옥에서 풀려난 예팅은 1946년 4월8일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예팅의 죽음을 비통하게 여긴 저우언라이는 추모사를 직접 썼다. 저우언라이에게 루안과은 단순한 차가 아니라 전우를 이어주는 소울 푸드였다.  

 

루안과은 안후이(安徽)성 루안시 일대에서 생산되는 녹차로 중국 10대 명차다. 루안차(六安茶)라는 이름으로 당나라 때 알려진 루안과은 명나라가 들어서며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됐다. 과이라 불린 이유는 완성된 찻잎이 수박과 해바라기 씨앗을 닮았기 때문이다. 루안과은 어린 새싹을 최상의 원료로 사용하는 다른 차들과 달리 완전한 형태를 갖춘 성숙한 찻잎을 사용한다. 전 세계 모든 녹차가 인정하고 선호하는 어리고 여린 잎을 사용하지 않고도 루안과이 명품 녹차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은 독특한 제조과정에 있다.

 

차농들이 1차 가공한 찻잎을 모아오면 숯불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제다 전문가들이 2인 1조로 약한 숯불로 찻잎의 수분을 서서히 조금씩 감소시키는 마오훠(毛火) 공정을 하면서 이물질과 기준 미달인 찻잎을 골라낸다. 루안과의 품질을 결정짓는 제일 중요한 공정은 라라오훠(拉老火)라는 마지막 건조작업이다. 3초 미만의 짧은 시간 동안 찻잎을 강한 숯불 위에 올렸다가 내려놓는 작업을 4~5시간 동안 반복하며 루안과의 형태와 맛을 완성시킨다. 어린 잎이 갖지 않은 성분을 맛으로 표출하기 위한 전통적인 라라오훠 기술 대신 기계식 열풍처리로 순식간에 건조하는 방법도 있지만 맛의 차이는 천양지차다. 

 

루안과은 초창기 공산혁명의 전초기지였던 안후이성 루안시 진자이(金寨)현에서 생산되는 내산(山)차와 위안(裕安)구 다볘산(大山) 북쪽에서 만드는 외산(外山)차로 구분한다. 내산차 중에서도 지토산(齊頭山) 과을 최고로 친다. 곡우 전에 채취해 만든 티(提片)이 1등급이다. 과이 가장 대중적인 2등급이고 장마가 오기 직전에 만든 3등급차를 메이(梅片)이라 한다. 1982년부터 중국 명차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루안과은 2001년 안후이성에서 열린 중국차박람회에서 ‘차왕’으로 등극한다. 

 

2007년 12월28일 지리표지보호생산품으로 인정받아 타 지역에서 만든 차는 ‘루안과’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루안과은 2007년 3월 러시아를 방문한 후진타오(胡錦濤)가 푸틴 대통령에게 공식 국가 예물로 증정하며 양국 우호증진에 기여하기도 했다. 2008년부터 국가비물질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제조공법 유출을 법으로 통제하고 있다. 2010년 상하이 엑스포에서 10대 명차로 다시 선정되며 명차로 각인됐다.

 

ⓒ서영수 제공


 

루안과 중국차박람회에서 ‘차왕’ 등극

 

어린 새싹 대신 하급원료로 치부되는 다 자란 잎을 사용해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찻잎 모양과 맛으로 명차 반열에 오른 루안과을 한 모금 마신 저우언라이는 미소로 세상에 고마움을 전하고 잠시 후 숨을 거뒀다. 27년 동안 중국을 이끌어온 중국 개국총리 저우언라이가 남긴 유산은 인민폐 5000위안이 전부였다. 톈안먼 광장에 세워져 있는 저우언라이의 추도비에는 ‘인민의 총리로 인민이 사랑하고, 인민의 총리로 인민을 사랑하고, 총리와 인민이 동고동락하니, 인민과 총리의 마음이 이어졌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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