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갑질’ 건설사들 편에 선 ‘하도급 공화국’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18 10:37
  • 호수 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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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 미발급 업체 현황’ 자료 입수…10년간 보증서 미발급 1400건 중 과징금은 2번뿐

 

“맷돌 손잡이가 뭔지 알아요? ‘어이’라고 해요. 맷돌을 돌리다가 손잡이가 빠져. 그럼 일을 못 하죠? 그걸 어이가 없어 해야 할 일을 못 한다는 뜻으로 ‘어이가 없다’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그래, 어이가 없네.”

 

영화 《베테랑》에서 재벌 3세 조태오(극중 유아인)는 말했다. ‘어이가 없다’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재벌 3세가 어이가 없을 일이 뭐였을까. 바로 체불임금 때문이었다. 420만원. 재벌 3세는 부당 해고로 1인 시위를 벌이는 화물트럭 기사 배철웅(정웅인)이 받으려는 체불임금이 불과 420만원 때문이라는 사실에 바로 이 대사를 날렸다. 420만원은 누구에게는 어이가 없을 정도의 금액에 불과했다.

 

배 기사는 화물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임금이 밀린 채 국동화물에서 해고를 당한다. 고용주인 국동화물 소장에게 항의하니 “해고는 본사가 결정한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서 배 기사는 본사인 신진물산 앞으로 가 1인 시위를 벌인다. 1인 시위를 본 조태오는 국동화물 소장을 호출한다. 부리나케 달려온 소장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말한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조태오의 대꾸는 차갑다. “큰일 날 소리 하시네. 내가 왜 대표예요, 이 양반아.”

 

건설노조 가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불법 하도급 근절에 대한 대책 을 촉구 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

 

하도급. 대한민국의 많은 갈등과 비극이 여기서부터 나온다. 뜻부터 정확히 하자. 하도급이란 수급인이 다시 제3자에게 도급을 주는 걸 말한다. 쉽게 ‘하청(下請)’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하도급은 건설업자의 건설 계약에 빈번히 이용된다. 제조업과 운송업 등에서도 많이 행해진다. 하청이라는 말에서 직관적으로 알 수 있듯 수급인과 도급인의 관계는 일방의 지배나 복종관계, 즉 갑을(甲乙) 관계가 성립되기 쉬워 노동력 착취 등 ‘갑질’과 같은 문제를 초래하기도 한다. 영화 《베테랑》 속 신진물산은 하청업체를 실질적 지배하에 두고 군림한다.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을 억압하고 해고하는 등 궂은일은 전부 하청업체에 맡기면서도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롭다.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다. 하도급의 나쁘면서도 흔한 사례다.

 

한국 사회에서 하도급 문제가 가장 빈번하게 불거지는 장소가 바로 건설 공사 현장이다. 대형 건설사가 사업을 수주해도 실제 공사 현장에서 건물을 올리는 일은 대부분 하청업체들이 진행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체불임금 등으로 수많은 분쟁이 발생했다. 정부는 이를 방지하고자 몇몇 법과 제도를 정비했다. 그 대표적 제도가 바로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다.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는 원도급업체의 파산 등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하도급업체가 일정 비율 이상 대금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한다. 원도급업체가 대금을 지불하지 못할 경우, 건설공제조합 등 보증기관이 대신 지불해 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최후의 보루, 보험 같은 제도다. 건설산업기본법과 하도급법에 따르면, 원도급업체는 하도급업체와 계약을 체결할 때,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를 의무적으로 발급해 줘야 한다. 다만 하도급 공사 금액 1000만원 이하의 소규모 공사이거나 하도급업체가 발주자에게 대금을 직접 받는 경우엔 적용되지 않는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은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은 하도급대금에 대한 보장 기능 외에도 하도급업체가 조달하는 자재와 장비 제공자, 현장 인력에 대한 대가 지급과 연계돼 있기 때문에 건설 공사의 연속성과 건설 공사 참여자들의 안정적 대금 수취를 위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했다.

 

2017년 서울 마포구 한 건설현장에서 하청업체 직원 한 명이 밀린 임금을 달라며 고공 시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청 부도나면 200개 하청에 1200억 피해 

 

현실은 영화와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건설업계에서 2013년 겨울은 여느 때보다 아찔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대형 건설사 중 하나였던 쌍용건설이 법정관리 절차를 밟게 되면서 쌍용건설과 계약을 맺은 160여 곳의 하도급업체들이 ‘줄도산’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쌍용건설과 맺은 계약은 355건, 총 7115억원어치였다. 대한전문건설협회 관계자는 “이럴 경우를 대비해 쌍용건설은 하도급업체들에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를 발급해 줘야 했지만, 쌍용건설이 2013년 초부터 워크아웃을 신청해 두는 바람에 신용도가 하락해 발급이 어려웠다”며 “하도급업체들은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매일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궁금했다.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신창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도움을 받아 국토교통부로부터 ‘2007년 이후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 미발급 업체 현황’ 자료 일체를 제출받았다. 통계는 현실의 한 단면을 분명히 보여줬다. 숫자는 하청 노동자들이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현실은 개선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뒤따른다. 국토부의 해명은 뭘까. 국토부는 “다각적인 노력으로 미발급 업체 수와 행정처분 건수가 계속 감소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얼마나 사실에 부합할까. 

 

먼저 기본적인 통계부터 보면, 2007년부터 2017년까지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를 발급하지 않은 업체 수는 총 946곳이다. 연도별 통계를 살펴보면,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 미발급 업체는 실태 파악을 하려는 국토부의 의지와 밀접한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7~11년 사이 적발된 업체는 총 7곳에 그치는데, 2012년부터는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국토부가 2012년부터 칼을 본격적으로 빼들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12년 182곳, 2013년 229곳으로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 미발급 업체는 급증하다 2014년 193곳, 2015년 87곳 등으로 감소세를 보였다. 하지만 2016년 다시 165곳으로 증가했고 작년에는 83곳으로 다시 줄어들었다. 어떻게 보면 국토부의 해명처럼 다각적인 노력으로 미발급 업체 수는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보면 매년 최소한 80곳 이상의 건설사는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를 발급하지 않고 있다. 컵에 반쯤 담긴 물을 어떻게 보느냐는 관점의 차이다. 하지만 물과 달리 숫자 뒤에는 사람이, ‘만에 하나’를 걱정하며 불안에 떨어야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대한전문건설협회에 따르면, 한 원도급업체가 부도나면 평균적으로 약 200개 하도급업체가 직접적인 타격을 받고 약 1200억원에 이르는 피해를 보게 된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떤 처분을 해 왔을까. 국토부가 제출한 자료를 보면 2007년부터 2017년까지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를 발급하지 않아 시정명령, 영업정지, 과징금 등의 처분을 받은 업체는 총 1408곳이다. 복수로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를 발급하지 않은 업체들이 있어 적발된 업체 946곳보다 숫자가 많다. 

 


 

총 1408곳 가운데 가장 가벼운 처벌에 해당하는 시정명령을 받은 업체는 1362곳으로 전체의 96.73%를 차지했다. 상대적으로 무거운 처분인 영업정지와 과징금을 받은 업체는 10년간 44곳(3.13%), 2곳(0.14%)에 불과했다. ‘솜방망이 처벌’이 이어지기 때문에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한 번쯤 잘못해도 괜찮다’는 인식이 퍼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시사저널이 실제로 만난 하도급업체 관계자들도 “처벌 수위가 낮기 때문에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처분 주체인 각 지방자치단체는 적발된 업체 대부분에 시정명령을 내리는데, 이 시정명령을 이행하지 않거나 반복적으로 적발된 업체에만 6개월 이내 영업정지 또는 1억원 이하 과징금을 부과한다. 한 하청 건설사 대표는 “원청이 지급보증을 하지 않았지만, 대금 지급 자체는 정상적으로 이뤄졌다는 점 등을 고려해 대부분 시정명령이라는 처분을 내린다”며 “원청 입장에서는 리스크가 큰 건설 사업일수록 지급보증 의무를 이행하지 않다가 사업이 잘되면 대금을 지급하고, 잘 안되면 ‘나 몰라라’ 하는 게 합리적인 셈”이라고 주장했다.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 발급 비용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 발급 비용은 발주자가 계약 비용에 포함해 원도급업체에 지급하도록 돼 있고, 기업 신용도가 높을수록 저렴하다. 특히 공공기관이 발주한 공사라면 원도급업체가 부담해야 할 비용은 거의 없다. 50억원 미만일 경우 공사금액의 0.081%, 50억원 이상~100억원 미만일 경우 0.080%, 100억원 이상~300억원 미만일 경우 0.075% 등이다. 문제는 민간분야 발주다. 정부 관계자는 “공공분야의 경우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 발급 비용을 발주자가 부담해 주지만, 민간분야에선 발주자가 원도급업체에 비용 부담을 미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원도급업체도 발주자와의 관계에선 을일 뿐”이라고 했다. 

 

 

시공능력 순위 낮을수록 발급 비율 낮아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는 ‘안전장치’라는 속성상 원도급업체의 규모가 작을수록 더욱 필요하다. 현실은 어떨까. 통계가 있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은 종합건설업체 2016년도 시공능력 평가액을 기준으로 순위별로 구간을 나눠 이들 업체가 원도급업체로서 다른 건설업체에 하도급을 준 하도급계약 현황과 그중에서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를 발급한 현황을 분석했다. 

 

결과는 아찔하다. 시공능력 순위가 낮을수록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 발급 비율이 낮았다. 시공능력평가 순위 1~50위의 경우 하도급대급 지급보증 비율은 건수 기준으로 42.8%였다. 51~100위 46.0%, 101~300위 30.1%, 301~1000위가 19.2%로 뒤를 이었다. 1000위  미만은 11.5%에 불과했다. 이종광 대한건설정책연구원은 “100위 미만에서는 시공능력평가 순위가 낮아질수록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서 비율이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며 “1000위 미만에서는 약 10%를 겨우 상회하는 수준으로 하도급대금 지급보증제도가 거의 작동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문제를 삼으면 문제가 된다고 그랬어요.”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오가 유행시킨 또 다른 명대사다. 이 말이 맞다. 잘못된 일을 문제가 되게 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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