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로 회귀한 21세기 한국의 월드컵
  • 서호정 축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7.06 10:59
  • 호수 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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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실 무너지는데 외치와 3선에만 골몰하는 정몽규 축구협회장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ende gut, alles gut).’ ‘카잔의 기적’에 이 유명한 독일 속담을 대입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독일을 2대0으로 꺾으며 2018 FIFA(국제축구연맹) 러시아월드컵을 마감했다.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3전 전패를 당할 것이라는 조롱 섞인 예상과 달리 8년 만에 월드컵 본선 승리를 챙겼다. 상대가 FIFA 랭킹 1위이자 디펜딩 챔피언 독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큰 승리였다. 

 

세계 각국이 독일에 80년 만의 조별리그 탈락을 안긴 한국의 승리와 선전(善戰)을 집중 조명했다. 한국이 독일을 꺾은 덕에 16강에 진출한 멕시코에서는 친한 열풍이 불었다. 일각에서는 16강 진출보다 더 어려운 결과물을 냈다고 평가했다. 손흥민·김영권 등 주요 선수들이 승리 후에도 눈물을 보일 정도로 팀이 독일전에 바친 정성과 투혼은 대단했다. 

 

하지만 독일전 이면에는 한국 축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번에도 선수들의 피땀 어린 분전에 기대며 망신을 피했다. 한국은 독일을 상대로 이번 대회 조별리그 전체 경기 중 최다 거리(138km)를 뛰었다. 치밀한 시스템과 전략보다는 ‘이대로 끝날 수 없다’는 결연한 각오와 몸을 던지는 투지가 만든 기적이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의 벨기에전이 오버랩될 수밖에 없었다. 

 

8년 만의 월드컵 승리, 세계적 관심과 찬사의 전리품까지. 끝이 좋았기에 모든 게 좋다고 믿고 싶었던 쪽은 대한축구협회, 특히 정몽규 회장일 것이다. 4년 전 브라질월드컵이 끝났을 때는 일말의 자비가 없을 정도로 호된 비판 여론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선수들의 마지막 투혼에 대한 격려가 더 많다. 문제 인식과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비교적 온건한 분위기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2014년 7월10일 서울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참석해 브라질월드컵 결과에 대해 대국민 사죄의 뜻을 밝히고 있다. © 시사저널 최준필


 

독일전 승리로 과정과 결과 모두 실패였던 이번 러시아월드컵에 대한 냉정한 평가는 뒤가 됐다. 축구협회는 빠르게 다음 단계에 돌입한다. 차기 대표팀 감독 선임 이슈를 들고나온 것이다. 러시아월드컵 본선을 책임진 신태용 감독의 준비 과정에 대한 평가를 감독선임위원회(위원장 김판곤)에서 마무리하고 유임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미 내부 분위기는 외국인 감독 선임으로 가닥이 잡히는 모양새다. 독일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그 전의 스웨덴전과 멕시코전, 그리고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 신태용 감독의 단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선수들에 대한 호의적 평가와 달리 신태용 감독에 대해선 여론의 시선이 불만족스럽다는 것도 유임 불가의 근거다.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 이상의 명성 있는 외국인 감독을 선임하겠다는 것이 축구협회의 러시아월드컵 실패에 대한 대책이다. 

 

 

독일전 승리가 가린 축구협회의 무능

 

4년 전과 다르지 않다. 브라질월드컵 실패 후 정몽규 회장은 뼈를 깎는 노력과 변화를 약속했다. 그 결과는 선수 시절 명성이 높았던 독일 출신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 선임이 끝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거두며 한껏 기대를 높였지만 월드컵 최종예선을 전후해 한계를 드러냈다. 결국 본선 탈락 위기에 몰리자 사실상 경질됐다. 또다시 축구협회는 월드컵을 1년도 채 남겨두지 않고 새 감독을 선임했고, 불안감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두 젊은 감독(홍명보·신태용)은 대중의 신뢰를 잃었다. 

문제는 축구협회 스스로가 품고 있는 가장 큰 오류는 손을 대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다수가 거론하는 시스템은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숙제다. 돈과 사람도 필요하지만, 시간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최고 결정권자의 판단이 시스템 안착과 운영의 키다. 현재 축구협회의 가장 큰 문제는 정몽규 회장의 폐쇄적이고 우유부단한 리더십에 있다는 게 핵심이다. 

 

월드컵 실패를 부른 가장 결정적인 판단 미스도 정몽규 회장의 몫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이 한국 축구와 동떨어진 점유율 축구를 실익도 없이 강조하며 최종예선에서 부진을 거듭할 때 과감히 칼을 뽑았어야 했다. 이란 원정에서 패했을 당시 슈틸리케 감독은 카타르의 귀화 공격수인 소리아 같은 선수가 없어 패했다는 인터뷰로 선수단 내부에서마저 비판을 받았다. 중국 원정에서 패했을 때는 어떤 전술적 해법도 보여주지 못했다. 두 차례 골든타임을 모두 놓친 축구협회는 카타르 원정에서 패하며 낭떠러지에 몰리고서야 슈틸리케 감독을 경질했다. 최종예선 2경기를 남겨 놓은 시점에서 23세 이하 대표팀과 20세 이하 대표팀에서 긴급 소방수로 투입했던 신태용 카드를 또 꺼내 들었다. 본선행은 가까스로 이뤄냈지만, 대표팀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치며 월드컵에 대한 기대 심리가 땅에 떨어졌다.

 

축구협회가 불신과 무능력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것은 대표팀 부진 때문만이 아니다. 바깥에서 주목하는 이슈에 대처하는 타이밍과 방식 모두 낙제점 수준이다. 월드컵 본선 진출 확정 후 터진 히딩크 감독의 대표팀 사령탑 제안을 둘러싼 논란 때도 그랬다. 축구협회는 당시에도 현실 인식 없이 “이메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며 변죽만 울리다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신속하지 못한 초기 대응, 현명하지 못한 후속 대처는 사안에 대한 축구협회의 느긋한 인식을 그대로 보여줬다. 언젠가 이 태풍은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티는 자세다.

 

스포츠 기관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도덕성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전임 집행부 주요 인사의 법인카드 유용 문제 때도 그랬다. 사법 조치를 핑계로 현재까지도 아무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사법 판결상 문제가 있을 경우 과감하게 제명하고, 축구인으로서의 활동을 막겠다는 식의 강경 의지라도 보여줘야 할 판에 침묵만 거듭했다.

 

6월27일(현지 시각) 러시아 카잔아레나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F조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 독일 경기에서 손흥민이 슛을 하기 위해 발을 뻗고 있다. ⓒ연합뉴스

 

 

보이지 않는 ‘정몽규 리더십’

 

사안에 대한 문제 인식 부족, 느린 반응과 의사 결정, 답답한 해결책. 부정적 이슈가 터질 때마다 축구협회가 보여준 패턴이다. 그 중심에는 정몽규 회장의 리더십 부재가 있다. 비전은 거창하지만 정작 그걸 시행할 역량은 부족하다. 결단이 필요한 시간엔 장고에 빠져 골든타임을 놓친다. 지난해 홍명보·박지성·김판곤 등 새로운 인물을 행정 시스템 중심에 놓는 개혁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중요한 의사 결정 때는 몇몇 측근에게 귀를 기울이는 폐쇄적 방식이다. 새로운 맨파워를 제대로 활용하는지 의문이다. 

 

2013년 취임과 2016년 재선 후 정몽규 회장의 행보는 외치에 집중된다. 지난해 FIFA U-20(20세 이하) 월드컵을 한국에서 개최했다. 현재도 아시안컵 유치와 차기 월드컵의 남북·중국·일본 공동개최 등 외교적 이슈를 계속 내놓고 있다. 2017년 FIFA 평의회 위원 당선 후 정몽준 명예회장 시절의 외교력을 회복했다는 평가는 받지만, 지나치게 보여주기식 성과에 골몰하고 있다는 지적도 동반된다. 특히 2030년 월드컵 공동개최 카드의 경우 중국·일본은 물론 북한 측과도 공감대 형성을 하지 못한 뜬구름 잡는 사안이다.

 

한국 축구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내실 강화가 우선이다. 각급 대표팀의 부진과 경쟁력 하락은 풀뿌리 축구의 위기에서 비롯되고 있다. 기존의 학원 축구와 K리그를 중심으로 한 클럽 축구의 반목은 심각한 상태다. 선수 육성을 위한 기술 축구 도입은 지지부진하다. 대표팀의 위기로 말미암은 근본적 개혁은 아래에서 시작돼야 하지만 정몽규 회장의 판단과 시선은 정작 다른 곳에 있다. 

 

더 이상 본선만 가면 된다는 인식은 위험하다. 팬들의 시선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유럽을 비롯한 해외에서 활약하는 국가대표 선수들도 대표팀 경쟁력이 제자리걸음인 것에 안타까워한다. 한국 축구의 에이스인 손흥민은 “이제는 월드컵이 두렵다. 패배가 아니라 승리하고 싶지만 그 벽을 넘는 게 힘들다”며 한숨을 쉬었다. 정몽규 회장과 축구협회 행정부는 본선 진출이라는 최소한의 성과로 후원 기업들을 잡아둘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실은 정몽규 집행부 아래서 후원기업은 점점 줄고 있다. 

 

 

‘월드컵 성공’보다 ‘3선’ 챙겨

 

임기가 2020년까지인 정몽규 회장은 이미 3선 도전을 준비 중이다. 선거 제도도 유리하게 정비했다. 선거인단 제적 인원 과반수에서 출석 인원 과반수로 당선 규정이 바뀌었다. 축구인들 사이에서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월드컵 성공보다 자신의 3선이 중요하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다. 축구협회가 축구 발전이 아닌 정몽규 회장의 장기 집권에만 골몰하고 있다는 지적은 소위 말하는 ‘축구 야당’만의 비난이 아닌 축구계 전체의 합리적 의심이다. 지난해 시도한 인적 개혁이 큰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2024년까지 정몽규 회장의 현 리더십 수준으로 축구협회가 운영된다면 4년 뒤 카타르월드컵의 결과도 기대할 부분은 크지 않다. 4년의 준비 기간 동안 대표팀은 헤맬 것이다. 손흥민·권창훈·이재성·김민재·이승우·백승호·이강인 등 다음 세대의 재능 있는 선수는 여전히 많지만 그들은 또 월드컵의 벽 앞에서 눈물 흘릴 것이다. 시스템의 정착도, 대표팀의 제대로 된 운영도 이제는 단호하고 원칙 있는 리더십과 함께 가야 한다. 축구협회를 둘러싸고 우선 논의되어야할 사안이 신태용 유임불가가 아닌 정몽규 3선불가인 이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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