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용 같은 베테랑들이 선수들 이끌었더라면…”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7.06 11:02
  • 호수 1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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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생생토크] 백태클 악몽 털어낸 ‘왼발의 달인’ 하석주 아주대 감독

 

2018 러시아월드컵 전후로 가장 바쁜 축구인 중 한 명이 하석주 아주대학교 감독이다.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이고 그때마다 국가대표 출신 축구인들은 미디어로부터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기 마련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하 감독은 각 방송사 섭외 1순위였다. 이유는 한 가지.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속했던 F조에 멕시코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 감독의 축구 인생에서 멕시코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악몽과 같은 팀이다. 20년 전인 1998년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에서 전반 28분 짜릿한 프리킥 선제골을 터트리고 3분 뒤 백태클을 가하는 바람에 퇴장을 당했기 때문이다. 1대3으로 패한 대표팀은 하석주가 빠진 상태에서 치른 네덜란드전(당시 히딩크 감독)에서 0대5 패배란 오명을 뒤집어썼다. 차범근 감독은 월드컵 대회 도중 경질당하는 충격을 껴안았다. 이후 하 감독은 차 감독을 피해 다녔다고 한다. 처음에는 너무 죄송해서, 면목 없어서가 이유였다면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민망하고 쑥스러워서 차 감독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하 감독은 최근 한 방송사의 주선(?)으로 20년 만에 차 감독을 만날 수 있었다. 차 감독과의 만남을 앞둔 당시 심정을 그는 “지금까지 가장 긴장하고 떨렸던 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 이영미 제공


 

차범근과 하석주의 악연, 이젠 인연으로

 

“프랑스월드컵에서의 멕시코전은 오랫동안 트라우마로 남았다. 무엇보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한국 축구의 보물 같은 분에게 결코 씻을 수 없는 악몽을 안겼다는 자책감이 컸다. 나 때문에 감독님이 경질된 것 같다는 생각을 털어낼 수가 없었다. 어떤 사람은 내가 20년 동안 감독님을 못 만났다는 걸 믿지 않더라. 못 만나기도 했지만 일부러 피해 다니기도 했었다. 행사장이나 경기장에서 스치듯이 만날 상황이면 멀리 도망 다녔다. 그러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내가 왜 이러고 사나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다 이번 러시아월드컵에서 멕시코와 우리 대표팀이 맞붙는 상황이 펼쳐졌고 덕분에 20년 전 멕시코전의 악몽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차 감독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말이다.”

 

하 감독은 다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도 차 감독에 대한 죄송한 심경을 고백했다. 그는 “언제까지 이럴지 모르겠지만 (감독님을) 정말 좋은 자리에서 뵙고 감독님이 힘들게 살아온 부분에 대해 진심으로 사죄드리고 싶다”는 마음을 전하며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의 월드컵 여정이 독일전 승리로 막을 내리면서 SBS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서 20년 전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극적으로 이뤄졌다. 

 

“감독님은 그날 방송에 내가 출연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었다. 대기실도 따로 사용하고 방송 시작하기 전까지 철저히 내 존재를 숨겼다. 방송 녹화 중에 내가 깜짝 출현하는 시나리오였다. 정말 심장이 떨리더라. 감독님이 날 보고선 어떤 표정을 지으실지 궁금했다. 드디어 내가 등장하는 순간이 됐고 감독님이 앉아 있는 자리를 향해 걸어가는데 감독님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펑펑 울었던 것 같다. 감독님 입장에선 굉장히 괘씸한 제자였을 텐데 그래도 날 따뜻하게 받아주셨다. 방송 진행자한테 자신이 월드컵에서 경질됐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선수들과 코칭스태프들 모두가 전화해서 걱정을 나타냈는데 딱 두 명한테선 연락이 없었다고 말씀하시더라. 그 두 명이 (홍)명보랑 나였다.”

 

 

하 감독은 프랑스월드컵을 앞둔 1997년 한국 축구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 월드컵 열기가 대단했었다. 1997년 1월 한국 축구의 최고 스타플레이어 출신인 차 감독님을 월드컵 사령탑으로 선임한 뒤 차기 대회 개최국 입장에서 도전한 터라 프랑스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매우 뜨거웠다. 또한 국가대표팀의 공식 서포터스인 ‘붉은악마’가 세상에 나온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최종 예선에서 맞붙었던 일본전, 일명 ‘도쿄대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5만여 명의 관중이 운집한 도쿄국립경기장에서 명승부가 펼쳐졌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은 조 1위에게 주어지는 본선 직행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 그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했다. 경기는 팽팽하게 진행됐다. 후반전 중반에 일본의 야마구치가 선취골을 넣으면서 승부가 기우는 듯했다. ‘울트라 닛폰’의 함성 소리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후반 38분 서정원이 헤딩골을 터트리며 1대1 동점을 만들었고 3분 뒤 이민성이 믿기지 않는 역전골을 터트렸다. 일본 열도는 눈물에 잠겼고 한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대표팀을 이끈 차범근 감독이 영웅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그런 감독님을 영웅에서 역적으로 만든 게 나였다. 더 큰일을 하실 분인데 나 때문에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너무 일찍 내려오셨다. 한국 축구의 레전드에게 엄청난 누를 끼쳤다는 생각 때문에 20년 동안 연락할 수도, 찾아뵐 수도 없었는데 이번에 그 장막이 걷히게 된 것이다.”

 

 

러시아월드컵, 신태용 감독에 대한 아쉬움

 

축구선수가 아닌 축구인으로 지켜본 2018 러시아월드컵은 하 감독에게 어떤 인상을 남겼을까. 16강 진출에 실패한 대표팀을 향해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하 감독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신태용 감독이 20세, 23세 이하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지만 월드컵은 선수로도, 지도자로서도 처음 경험하는 무대였다. 그래서인지 너무 많은 생각을 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스웨덴전은 곱씹을수록 아쉬운 경기였다. 상대의 체격과 신장이 좋다고 김신욱을 가운데 세우고 수비를 내렸는데 경기에서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내놓을 줄도 알아야 한다. 신 감독은 그걸 다 가지려 했다가 두 가지 다 놓치는 실수를 범했다. 물론 감독의 고뇌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는 경기였다. 지도자인 내 눈에는 신 감독의 고뇌가 고스란히 느껴지더라.”

 

두 번째로 맞붙은 멕시코는 충분히 상대할 만한 팀이었다고 말한다. 독일을 이긴 다음에 한국을 만났지만 우리와 체격 조건이 엇비슷한 선수들을 기술적으로 압박해서 들어갔다면 오히려 멕시코 선수들이 쉽게 흥분해서 덤벼들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멕시코전은 우리한테 약간의 운이 더했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였다. 난 누구보다 멕시코의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을 계속 밀어붙이면서 압박했다면 분명 우리에게 기회가 열렸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반에 나온 페널티킥이 매우 아쉽고 한국의 골이 좀 더 일찍 터졌더라면 오히려 멕시코가 쫓기는 입장이 돼 남은 시간 동안 힘든 승부를 펼치지 않았을까 싶다.” 

 

하 감독은 독일을 상대로 2대0 승리를 거두는 걸 보고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한다.

 

“월드컵이 열리는 6월은 유럽의 축구 시즌이 끝난 이후다.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은 체력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무더위 속에서 치르는 경기라면 아시아권 선수들한테 유리한 부분도 있다. 아시아권 선수들은 져도 본전이다. 상대팀은 모두 FIFA 랭킹에서 앞서 있는 팀들이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상황에서 상대와 맞붙었을 때 누가 유리할까. 한국이 독일전에서 보인 열정과 절박함이 존재한다면 우리도 월드컵에서 들러리 신세로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스웨덴과 멕시코전을 독일전처럼 뛰었다면 결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아쉽기만 하다.”

 

하 감독은 월드컵 직전에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신태용 감독의 고민이 컸겠지만 베스트 11을 너무 늦게 정하는 바람에 조직력을 다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지적했다. 

 

“일본과 이란의 경기를 보면 그들의 조직적인 플레이에 감탄할 수밖에 없게 된다. 특히 일본은 월드컵 개막 2개월을 앞두고 감독을 교체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건 일본 선수들의 조직력이 이미 완성돼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신 감독이 우리보다 강팀을 상대한다는 생각에 수비수들을 늘려 뽑았다. 공격에서 조커로 쓸 만한 선수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좋지만 이청용처럼 월드컵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이 선수들을 이끌었더라면 좀 더 단단한 팀워크를 발휘했을 것 같다. 멕시코전이 끝난 뒤 가장 많이 생각났던 선수가 이청용이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한국-멕시코전. 하석주가 첫 골을 성공시킨 후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호하고 있다. © 뉴스뱅크 이미지


 

우여곡절의 지도자 인생

 

하석주 감독은 2003년부터 포항 스틸러스에서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경남 FC와 전남 드래곤즈 수석코치를 거친 그는 7년 넘게 감독을 ‘모시는’ 일에 전념했다. 

 

“포항에선 최순호 감독님, 경남에선 조광래 감독님, 그리고 전남에선 박항서 감독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지금도 자신 있는 부분은 내가 감독님을 모시는 동안에는 정말 최선을 다해 코치 임무에 충실했다는 사실이다. 코치는 자신의 욕심을, 야망을 드러내는 순간 끝이다. 감독과 코치의 경계는 분명하다. 코치가 그 경계를 넘으려 하면 탈이 난다. 난 7년의 코치 생활 동안 그걸 신념처럼 품고 지냈다.”

 

2011년 하 감독은 모교인 아주대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했다. 1년 후 정해성 감독이 사임하자 하 감독은 전남 드래곤즈 감독에 선임돼 다시 전남 광양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당시 전남에는 흔한 스타플레이어도 없고 베테랑 선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구단 사정이 열악해지면서 선수단 지원이 대폭 줄어들었을 때 하 감독이 팀을 맡게 된 것이다. 

 

“당시 밖에서는 전남을 향해 ‘하석주 유치원’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눈에 띄는 선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승강제로 인해 늘 강등과 성적 부담에 대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좋아하던 골프도 끊고, 사람들과의 연락도 단절한 채 광양에서 선수들과 동고동락했다. 나랑 같이 대표팀이나 일본에서 함께 뛰었던 황선홍(당시 포항 감독), 최용수(당시 FC 서울 감독)는 우승을 놓고 고민했지만, 난 강등에서 탈출하려고 머리를 쥐어짰다. 자존심도 상했고, 열도 받고, 정말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하 감독은 불면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팀을 재정비하는 데 앞장섰다. 강등권에서 벗어나며 위기를 극복했고 2년5개월가량 팀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구단은 하 감독의 공로를 인정, 일찌감치 재계약을 요청했는데 하 감독은 자진 사퇴를 택해 축구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나라고 왜 그만두고 싶었겠나. 그러나 더 이상 광양에 머물 수가 없었다. 갑상선암이 발병한 아내 혼자 세 아들과 팔순이 넘은 노모를 돌보게 할 수 없었다. 구단의 재계약 조건이 좋았고 욕심도 났지만 가족을 외면할 수 없었다.”

 

성적 부진으로 감독들이 소리 소문 없이 자취를 감추는 축구계 현실에서 하 감독은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노상래 수석코치를 후임 감독에 앉힌 뒤 구단에서 마련해 준 이·취임식에 참석하며 전남과 아름다운 이별을 감행했다. 그리고 그는 모교 아주대로 다시 돌아온다. 아주대는 대학리그에서는 드물게 16명의 프런트(축구부 지원인력)가 존재한다. 아마추어 축구를 살리고 대학 축구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하고 싶다는 하 감독의 희망사항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차범근·홍명보·서정원(이상 고려대), 허정무·조광래·최용수(이상 연세대), 황선홍·이영표(이상 건국대), 하석주·안정환(이상 아주대), 박지성(명지대) 등은 모두 대학 출신이다. 과거에는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선수라 해도 대학 입학 후 프로에 진출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보다 먼저 프로 진출을 권유한다. 점차 대학 축구의 설 자리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아마추어 축구에 관심과 공들여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 총장들도 축구팀이 굳이 필요하냐는 의문점을 갖고 있다. 스포츠가 성적보다는 학생들 단합을 유도하고 스포츠 정신을 배우는 학습 효과도 있기 마련인데 대학 축구의 질적 수준 저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다. 시간이 갈수록 스포츠, 특히 비인기 종목은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전국을 돌아다녀봐도 선수가 없다. 몸 쓰면서 운동하려는 아이들이 없다. 운동선수도 공부해야 졸업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학습권만 보장하고 운동권은 보장해 주지 않는다. 축구 전용 훈련장이 없는 대학은 야간에 훈련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 이런 환경에서 누가 축구를 하려 하겠나. 선수 부족이 심각한 상태다. 시간이 갈수록 한국 축구가 뿌리째 흔들릴 것만 같아 마음이 조급해진다.” 

 

하 감독은 아주대를 대학 정상에 올려놓게 된다면 이후 연령별 대표팀 감독을 맡아 어린 선수들과 함께 팀을 만들고 성장해 갈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아마추어 축구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공을 들이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다.

 

멕시코전 백태클의 오랜 악몽을 차범근 감독과의 재회로 훌훌 털어낼 수 있었던 하석주 감독에게 러시아월드컵은 또 다른 의미로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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