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이기주의에 대하여
  • 신동기 인문경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7.06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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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기의 잉여 Talk] '욕심'과 '게으름'

 

인간은 신과 달리 육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육체를 먹이고 입히고 따뜻하게 해 주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정신만을 소유한 신은 먹을 것, 입을 것, 쉴 곳이 필요하지 않지만, 육체를 가진 인간은 물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기주의자가 된다. 

 

이기주의는 바로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동물도 육체를 가지고 있다. 동물 역시 자기 몸을 유지하기 위해 먹이를 탐한다. 그러나 인간처럼 탐욕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은 불완전하나마 신의 속성인 ‘이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데 반해, 동물은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동물에게는 감각만 있지 이성은 없다. 이성의 출발은 상상력과 기억력이다. 상상력·기억력이 없으면 ‘논리’와 ‘사실’에 바탕한 이성 작용이 불가하다. 

 

동물은 상상력이 없다. 그리고 기억력은 있긴 하지만 인간의 기억력에 비하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육체적 필요에 기억력과 상상력이 더해지면 인간의 욕심은 무한대로 확대된다. 기억력을 더듬어 저 유아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그 어느 때보다 현재가 더 풍요로워야 되고, 상상력을 무한대로 뻗쳐 자자손손 대대로 편하게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일반 동물은 배를 채우고 몸을 덥히면 거기서 욕구가 멈추지만, 기억과 상상력을 가진 인간은 아무리 배가 부르고 많은 것을 소유해도 여전히 욕망을 추구한다. 거의 무한대로. 따라서 이기주의 자체는 인간의 기본 속성이다. 칭송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난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칸트가 말했던 것처럼 이기주의는 인간의 자연스런 경향성이다.

 

인간의 이기주의는 사실 두 방향으로 작용한다. ‘기회의 평등’일 때는 최대한 많이 소유하려는 ‘욕심’(=Output/Input)으로, 그리고 ‘결과의 평등’일 때는 최대한으로 적게 수고하려는 ‘게으름’(=Output/Input)으로다. 

 

자기 사업을 하는 이들은 더 큰 돈을 벌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바쁘게 움직이고 때로는 무리하기까지 한다. 노력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고 그 결과는 모두 자신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급여가 일정하고 정년까지 잘릴 일이 없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노력을 줄인다. 노력을 더 한다고 더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노력의 결과가 100% 모두 자신에게 귀속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를 겪는 것은 바로 앞의 ‘욕심’의 과도함 때문이고, 사회주의가 망한 것은 바로 뒤의 ‘게으름’의 지나침 때문이다. 그리고 ‘욕심’과 ‘게으름’은 이기주의의 각자 다른 두 얼굴이다. ‘욕심’과 ‘게으름’은 법 테두리만 벗어나지 않으면 악은 아니다. 혹시 법(또는 규정) 테두리 내인데도 ‘욕심’과 ‘게으름’이 사회적으로(또는 조직적으로) 문제를 일으킨다면 기본적으로 그것은 법(또는 규정)의 적정성 문제이지 ‘욕심’과 ‘게으름’의 문제가 아니다. ‘욕심’과 ‘게으름’은 그냥 인간의 자연스런 속성인 이기주의, 좀 더 객관적으로 표현하자면 합리주의일 뿐이다. 

 

사진 = 연합뉴스

 

그런데 사람들은 ‘결과의 평등’ 즉, 사회주의와 같은 환경에서만 노력을 줄이지 않는다. ‘기회의 평등’인 노력한 만큼 자기 것으로 돌아오는 자본주의 환경에서도 노력을 줄일 때가 있다. 아니 줄일 때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일반적이다. 사회주의적 환경에서 노력을 줄이는 것은 ‘이성적·합리적 게으름’이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비이성적·불합리한 게으름’으로, 이성에 반한다. 타인에게 이익을 양보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기 스스로 자기의 이익을 외면해 스스로에게 손해를 끼치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유 없는 게으름이다. 

 

학생 때 공부를 열심히 하면 자신이 원하는 기회를 좀 더 많이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은 소수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업무능력을 좀 더 탄탄히 갖추면 더 많은 능력 발휘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업무능력 향상에 힘쓰는 직장인 역시 소수다. 꾸준한 운동이 장수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일같이 운동하는 실버세대 역시 많지 않다. 공부나 일, 운동에 있어서만 이유 없는 ‘비이성적·불합리한 게으름’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돈 버는 일, 좀 더 지혜로울 수 있도록 자신의 이성을 갈고 닦는 일 등 인간의 다른 영역에 있어서도 그런 ‘게으름의, 게으름에 의한, 게으름을 위한’ 게으름은 존재한다.

 

성경에서는 ‘게으른 자는 수저가 있어도 뜨지를 않는다’(잠언19:9)고 말하고, 이슬람의 코란에서는 기부 행위인 자카트에 대해 ‘인색해서도 안 되지만 너무 퍼줘서도 안 된다’(밤 여행의 장-29)라고 경고한다. A. 스미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버나드 맨더빌은 ‘가난을 덜어주는 것은 속 깊은 일이지만 가난을 없애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맹자는 ‘스스로를 해치는 자와는 함께 대화할 수 없고, 스스로를 버리는 자는 함께 일할 수가 없다’(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라고 했다. ‘게으름을 위한 게으름’으로 자기 스스로를 안 좋은 상황으로 몰아가면 주위에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뒤집어 말하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이야기다. 

 

‘욕심’, 나아가 ‘탐욕’에 대해서는 만 가지 주장들이 다투어 소리를 높이지만, 같은 이기주의의 다른 측면일 뿐인 ‘합리적 게으름’, 더 나아가 ‘불합리한 게으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관심을 별로 두지 않기에 더해 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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