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지뢰 안 되게 KAL기 폭파 사건 진상 밝혀야”
  • 조유빈 기자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8.07.13 12:44
  • 호수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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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최초로 KAL기 사건 의혹 제기한 현준희 前 감사원 직원

 

30년이 지났지만 의혹이 아직 잠들지 않는 사건이 있다. 일명 KAL기 폭파 사건. 1987년 11월29일 오후 2시, 이라크 바그다드를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858기가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승객은 대부분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한국으로 돌아오던 건설노동자들이었다. 승무원을 포함한 탑승객 115명이 모두 실종됐다. 국정원 전신인 국가안전기획부는 당시 이 사건을 북한이 비행기를 공중 폭파한 테러로 규정했다. 폭파범으로 지목된 김현희가 생포됐고, 공범인 김승일은 독약 앰플을 깨물어 자살했다. 

 

그해 12월은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달이었다. 1987년의 민주화 열망이 전두환 정권의 종식을 예고하면서 16년 만의 직접선거에 대한 기대감을 불러일으켰고, 다음 해 열릴 88서울올림픽으로 분위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KAL기 사건으로 온 나라는 안보 불안감에 다시 꽁꽁 얼어붙었다. 김현희는 제13대 대선 전날인 12월15일 서울로 압송됐다. 다음 날 치러진 대선에서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가 당선됐다. 

 

© 시사저널 이종현


 

안기부는 “북한의 김정일이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북한 공작원 김현희에게 친필 지령을 내려 KAL 858기를 폭파했다”고 발표했다. 김현희는 1990년 3월 사형이 확정됐으나, 사형 선고 한 달 만에 특별 사면됐다. ‘사건이 날조됐다는 사실을 반박할 유일한 생존자니만큼 살려두는 것이 국익을 위해 유익하다’는 게 이유였다.

 

비행기가 폭파됐지만 유품과 유해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던 사건. 이 사건은 정부 조사와 안기부 수사 발표부터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됐다. 김현희의 신분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안기부 발표의 신빙성을 뒤흔드는 증거가 나오기 시작했고, 침묵하거나 오보를 쏟아냈던 국내 언론과 달리 일본 언론들은 KAL기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했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외면됐다.

 

김대중 정부에서도 국정원의 내부 반발로 재조사가 흐지부지됐다. 피해자 가족들은 대책위를 구성해 본격적인 진상규명에 나섰다. 2001년 국정원은 일부 수사 발표가 잘못됐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참여정부는 2005년 2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7대 우선조사 대상 사건의 하나로 KAL기 사건을 채택해 조사했지만, 안기부 수사 결과가 맞다는 결론을 확인하는 차원에 그쳤다. 김현희가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반쪽짜리 수사라는 비판도 받았다. 다만 당시 안기부가 대선정국에서 KAL기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는 사실은 확인됐다. 

 

이제 사건은 31년이 돼 간다. 6월28일 전두환 자택 앞에서 또 한 번 진상규명을 요구한 피해자 가족들은 “김현희가 방송에 얼굴을 내밀며 피해자 가족의 가슴을 후벼 파는 동안에도 가족들의 호소는 외면당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사람이라도, 유품이라도 찾아주면 인정하겠다고 수없이 외쳤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특히 전씨가 자신의 정권 유지를 위해 KAL기 사건을 이용했으며, 회고록을 통해 사건에 관한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7월 중에 전두환과 김현희를 고소할 것이라 예고했다. 

 

정권이 몇 차례 바뀌는 동안에도 진실을 밝혀 달라는 가족들의 요구는 아직도 표류 중이다. KAL기 사건에 대해 최초로 의혹을 제기했던 전 감사원 직원 현준희씨는 다시 한번 현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현씨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전두환은 회고록을 통해 또 한 번 KAL기 사건을 왜곡하고 있다”며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역사적 진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KAL기 사건의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7년 11월29일 일어난 KAL기 사건 관련 기사. 사건 이후 북한의 지령에 따라 이뤄진 테러 사건이라는 내용의 기사들이 연이어 보도됐다.


KAL기 사건에 관심을 갖고 진상규명을 요구해 온 배경은.

 

“당시 감사원 공무원 신분으로 일본에서 연수 중이었다. 1987년 11월28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점보기가 인도양에서 추락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다음 날인 11월29일 KAL 858기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특히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가 마유미라는 이름의 일본 여권을 소지하고 있어 일본 내에서는 사건을 크게 다뤘다. 국내 언론에서는 검열이 심해 의혹보도가 차단됐다. 일본에서 나오는 보도를 보고 의문을 품었고, 안기부가 발표한 수사 내용을 체크하게 됐다. 1991년부터 다시 일본에 2년간 유학하면서 자료를 수집했다. 이 사건에 대한 12가지 의혹을 제기했고, 이후 가족회 및 KAL기 사건 대책위원회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 했다.”

 

사건 당시 범인으로 지목된 김현희의 신분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했는데.

 

“당시 안기부는 1972년 11월2일 남북조절위원회 남쪽 대표로 평양을 방문한 장기영 부대표의 사진에 등장하는 ‘화동’을 지목하며 ‘김현희는 북한 사람이 맞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울로 압송된 김현희와 다른 사람이었다. 김현희의 귀는 역삼각형 칼귀였는데 화동 사진은 귓불이 도톰한 일반 귀였다. 귀는 지문과 같이 신원 확인에 결정적 단서가 되는데, 두 사람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또 북한은 주민등록번호처럼 ‘공민증번호’를 사용하는데, 안기부는 김현희의 공민증번호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사건 당시 종결이 빨리 된 점, 합의를 강압적으로 타결한 점도 문제로 제기됐다.

 

“비행기 잔해도 확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열흘 만에 수색작업을 철수했다. 항공사고 사상 KAL기 사건만큼 단기간에 종결된 사건은 없다. 수년 만에 절차가 진행된 경우도 있었다. 보험 처리를 하더라도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이 사실이다. 가족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일괄적으로 사망 처리를 하고 보상금 합의를 종용해 합의를 타결했다.”

 

최근 KAL기 사건 진상규명을 다시 요구하는 이유는 뭔가.

 

“정부가 바뀌었고, 이제 남북관계가 바뀌었다. KAL기 사건으로 인해 북한은 테러지원국으로 낙인찍혔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것도 당시 테러국으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KAL기 사건의 진상에 대해 규명하지 않으면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통일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사건 자체만 두고 보더라도, 중동에서 돈을 벌어 귀국하던 양민들이 희생됐지만 진상이 규명되지 않은 비극적인 사건이다. 더 늦기 전에 진상을 규명해야 하지 않겠나.”

 

참여정부 때도 KAL기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뤄졌는데.

 

“사건 발생 3년이 지난 1990년 3월에야 잔해가 나왔지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 결과 폭발 흔적이 나오지 않았다. 이 잔해를 1995년 폐기한 것도 의심을 샀다. 과거사 진실규명을 중시했던 참여정부 때 재조사가 이뤄졌지만 결정적 증인인 김현희는 조사에 단 한 번도 응하지 않는 등 한계가 있었다. 무지개공작과 관련된 소소한 것들은 몇 가지 밝혀졌지만 결국 진일보한 결과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북한은 KAL기 사건에 대해 인정했나.

 

북한은 과거 일본인들을 납치한 사건은 인정했지만, KAL기 폭파 테러는 인정하지 않았다. 김현희는 과거 납북된 일본인 다구치 야에코가 북한에서 자신의 일본어 선생님이었다고 말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 없다. 다구치 야에코가 이은혜라는 한국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당시 안기부가 내놓은 발표 내용은 김현희의 진술에만 기반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북한은 테러지원국으로 지정됐고 경제적으로 제재를 받으면서 큰 대가를 치렀다. 북한에서는 자기들과 무관하다는 노동당 성명을 많이 발표하면서 과학적인 논거를 댔다. 그러나 그 사실이 우리나라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일 뿐이다. 당시 일본문화원을 통해 원문 신문을 확인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더 많은 의혹들이 제기됐다.”

 

최근 피해자 가족들은 사건 주범이 전두환이라며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가족들은 6월27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전두환 자택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건을 테러로 규정한 전두환과 안기부는 테러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수사 발표를 뒷받침할 물증도 없었고, 폭발물의 존재에 대한 물증, 확실한 사고 지점, 비행기 잔해 어느 하나도 입증되지 않았다. 기획된 공작이었다는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진상이 아무것도 규명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두환은 회고록을 통해 허위 사실을 또 얘기하고 있다.”


전두환 회고록에서 KAL기 사건에 대해 왜곡하고 있는 내용은.

 

“사건을 추적하면서 전두환의 입장이 궁금했지만 접근이 불가능했다. 지난해 전두환이 회고록을 펴냈는데, 18쪽 분량을 통해 KAL기 사건을 또 왜곡했다. 왜곡된 부분도 여러 부분이 있다. ‘북한이 88올림픽 공동개최를 주장하면서 테러까지 불사하겠다며 공공연히 협박을 해 왔다’고 주장한 게 대표적이다. 올림픽 공동개최는 1985년 2월 사마란치 IOC 위원장의 제의였지 협박한다고 이뤄질 일이 아니었다. 또 ‘대한항공에 확인한 결과 아부다비공항에서 내린 승객은 일본인 3명밖에 없었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일본 주간잡지 ‘주간신조’에 의하면 당시 내린 승객은 15명이었다. 다수의 한국 외무부 직원도 포함된 것으로 보도됐으나 이에 대한 조사는 없었다.”

 

특히 전두환은 김현희에 대한 의혹이 부풀려진 것이라 주장했다.

 

“전두환은 ‘사건 이후 일본인들이 김현희의 실체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의혹도 제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일본 언론은 그렇지 않았다. 2004년에도 아사히TV가 ‘김현희 17년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특집 방송을 내보내기도 했다. 김현희가 북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혹도 많았다. 1988년 일본 기자들이 찾아간 김현희의 평양 집에는 다른 가족들이 1980년부터 살고 있었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취재한 결과 김현희의 아버지로 알려진 사람과 직책은 없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전두환이 정권 유지 수단으로 KAL기 사건을 이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두환은 회고록을 통해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해 김현희의 압송 날짜(13대 대선 하루 전날)를 조정했다는 주장이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압송 책임자였던 박수길 외무부 제1차관보는 2011년 8월29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청와대에서 12월13일까지 압송하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말했고, 국정원도 시인했다.”

 

진상규명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나.

 

“사건이 일어난 지 30년이 넘었다. 지금은 피해자 가족들도 나이가 많이 들었다. 초반에는 가족들도 받아들였지만 그것은 정부의 발표를 믿었던 것이다. 더 늦기 전에, 피해자 가족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워야 한다. 북한 지시인지, 정부의 정권유지 수단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재조사해야 한다. 아직 전두환과 김현희를 비롯해 당시 수사 책임자들이 모두 살아 있다. 더 이상 반쪽짜리 조사가 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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