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더 인터뷰①] “‘역사적 시간의 창’ 닫으려는 사람, 역사가 벌할 것”
  • 독일 베를린 = 송창섭·구민주 기자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8.07.13 15:37
  • 호수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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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뢰더 前 독일 총리 4시간 현지 인터뷰…“독일, 통일에 많이 투자해 훨씬 더 강해졌다”

 

독일에서 사회민주당(SPD·사민당)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879년 만들어진 바이마르 사회민주당에 1945년 사회주의 노동당 등 좌파 군소정당들이 합쳐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우파인 기독민주당(기민당)이 주도하던 독일 정국에 사민당 열풍이 불어닥친 것은 1969년이다. 당시 치러진 출구조사에서 과반수는 기민·기사당 연합이 차지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오후 9시30분부터 결과가 뒤집히더니 사민·자민당 연합은 오후 10시가 넘어 기민·기사당 연합을 밀어내고 과반보다 6석을 더 확보했다. 이때 등장한 이가 ‘비전의 정치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다. 빌리 브란트가 이끈 사민·자민당 연합정부는 모스크바·바르샤바조약, 동·서독 정상회담 등을 통해 1972년 11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만들었다. 이후 정권은 같은 사민당인 헬무트 슈미트 정부로 넘어갔지만 몇 년 후 헬무트 콜의 기민·기사당 연합과 바통 터치했다. 그리고 정작 1990년 독일 통일은 기민당 정부 아래서 맞이했다. 콜 정부 다음에 사민당이 다시 정권을 되찾았을 때 등장한 이가 바로 게르하르트 슈뢰더다. 그는 1998년 10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만 7년 동안 총리로 재직했다. 슈뢰더는 통일 이후 불어 닥친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재임 기간 동안 독일 통일의 긍정적인 효과를 맛보진 않았지만 훗날 독일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유럽 정치사에 분명한 획을 그었다. 

 

본지와의 인터뷰는 독일 현지 시간 7월4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4시간 동안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연방하원(Bundestag) 내 슈뢰더 집무실과 브란덴부르크 문(門) 인근 아들론 켐핀스키호텔 내 이탈리안 레스토랑 등에서 진행됐다.

 

© 시사저널 구민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어떻게 봤나.

 

“한반도 변화의 서막은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시작됐다. 올림픽이라는 무대는 지금 한반도 상황을 만드는 좋은 출발점이 됐다. 당시 나도 아내(김소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경제개발공사 한국대표부 대표)도 토마스 바흐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 

 

이제부턴 정치인들이 할 일이다. 남북한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첫걸음이지만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시도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상황을 잘 파악했고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남북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이번 북·미 정상회담을 가능케 했다. 이번 회담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구체적인 대책들이 나올 거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다. 이를 위해선 첫째 시간이, 둘째 많은 대화와 협상 과정이 필요하다.” 

 

북·미 정상회담 성과를 놓고 이견이 많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나.

 

“나는 이미 독일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 빌리 브란트의 긴장완화 정책이 초석이 됐고 여러 작은 발걸음이 통일을 가능케 했다. ‘베를린 통행증 협정’이라는 게 대표적인 예다. 당시 이 통행증 협정을 통해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 사는 친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북·미 정상회담만으로 돌파구가 만들어졌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대화와 협상으로 가는 물꼬를 텄다는 것은 충분히 환영할 일이다.”

 

서독은 동독과의 신뢰를 어떻게 쌓았는지 궁금하다.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독일의 과정을 한국에 고스란히 적용하긴 어렵다. 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구축된 것이다. 더군다나 한 국가가 분단 과정에서 전쟁을 겪었다면 이 때문에라도 신뢰를 쌓기가 어렵다. 독일은 전쟁이 없었고 한국은 있었다. 때문에 신뢰를 갖기에 한국이 훨씬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앞서 말했듯 독일은 작지만 많은 발걸음들이 모여 큰 신뢰를 만들어냈다. 비핵화라는 세계적 이슈와 동시에 협력과 상생을 추구하다 보면 남북이 차츰 신뢰를 쌓아갈 것이다.”

 

※ 계속해서  [슈뢰더 인터뷰②] “통일은 목표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 편과  [슈뢰더 인터뷰③] “北, 인권 개선하려면 개혁·개방 유도해야” ​편이 이어집니다. 



슈뢰더 前 독일 총리는?…퇴임 후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이사회 의장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1944년 4월7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 Westfalen)주 벡스텐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프리츠 슈뢰더는 게르하르트가 태어나고 6개월 만에 루마니아 전장(戰場)에서 사망했다. 슈뢰더가 태어나자마자 곧장 전장으로 나간 탓에 그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슈뢰더는 어릴 적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야간 고교를 다니며 공장에서 일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엔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청년사민당 활동으로 정치를 시작한 슈뢰더는 1980년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됐다. 1990년부터 1998년까진 니더작센(Niedersachsen)주 총리를 지냈다. 

 

본지 송창섭 기자(오른쪽)가 베를린 파리저 광장에서 슈뢰더 전 총리와 통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사저널 구민주


 

슈뢰더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민당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1983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기민당에 패해 정권을 내준 사민당은 이후 중도에서 좌파로 변신하면서 정권 획득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결과적으로 1990년 통일 후 치러진 첫 총선에서 실패한 것도 좌파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민당의 헬무트 콜과 경쟁한 오스카 라퐁텐은 훗날 슈뢰더 집권 때 사민당에서 떨어져 나가 좌파당을 별도로 만들었다. 슈뢰더는 니더작센주에서 녹색당과의 연정(聯政)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서도 적녹연정(사민·녹색당 연합)에 나서 정권탈환에 성공했으나 ‘아젠다 2010’으로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층의 반발을 사 8년 만에 정권을 앙겔라 메르켈이 이끈 기민·기사당 연합에 내줬다. 

 

슈뢰더는 퇴임 이후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Rosneft)’ 이사회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민당 핵심 지지층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회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고르 세친이 최고경영자(CEO)로 있다. 아울러 러시아 정부가 50% 지분을 가진 최대 국영 석유회사다. 이 밖에도 슈뢰더는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노르트 스트림(Nord Stream)’ 가스관 운영사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이 회사는 러시아의 거대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이 최대 주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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