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돈④] “정치, 富者들 전유물 아니다”
  • 이민우·김종일 기자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8.07.27 13:41
  • 호수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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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인수위서 정치개혁 추진한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

 

노(老)학자는 단호했다. 현행 정치자금법과 공직선거법 등의 규제가 정치를 오히려 국민들과 멀어지게 만들고 정치 혐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 겸 광주과학기술원 석좌교수는 “한국 정치가 ‘고비용 저효율’ 구조라는 담론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당시 제기한 전형적인 신자유주의적 주장”이라면서 “이런 주장은 정치 혐오에 기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정치 축소를 불러와 정치 신인의 진입 등을 가로막는 불공정한 정치를 고착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을 계기로 불고 있는 정치자금법 개정 등의 움직임과 관련해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으로 ‘정치자금의 공급과 수요, 투명성, 정치 참여’ 등 4가지를 꼽았다. 그는 “정치에는 돈이 든다”고 전제하면서 우선 충분한 정치자금이 공급될 수 있는 제도적 통로를 국가가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소액 다수가 정치 후원을 자랑스럽게 할 수 있는 제도와 문화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정치자금의 수요 측면에서는 선거운동 방식의 혁신을 주문했다. 임 교수는 빅데이터와 마이크로 타기팅 등 온라인 선거운동을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만드는 식의 ‘선거운동의 4차 산업혁명’을 이뤄내야 유권자도 정치인도 더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정치자금의 사용처 등을 온라인으로 공개하는 식의 투명성이 전제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이런 전제조건들이 갖춰진 후 ‘정치 후원의 일상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일상에서 정당과 정치인을 쉽게 후원할 수 있는 수요자 중심의 후원 제도를 갖추고, 정치 후원을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이론’의 권위자로 미국의 정치 시스템 등에 조예가 깊은 임 교수는 김대중 정부에서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을, 노무현 정부에서 인수위원회 정치개혁연구실장을 지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노회찬 정의당 의원의 죽음을 계기로 정치자금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노 의원의 죽음은 정치자금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 투명성과 정치 문화라는 총체적 문제, 즉 한국 정치의 제도적 부실과 낙후한 정치문화가 만든 비극이다. 정치자금이 부족했던 탓에 고등학교 동창에게 돈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드루킹’이라는 사람이 돈을 모아서 전달했기 때문에 수사 대상이 됐다. ‘경공모(경제적 공진화 모임)’라는 조직에서 회원들이 각자 후원했으면 불법이 아닐 수 있었다.”

“정치자금 규제는 되레 공정 경쟁 저해”

 

그간 국민들은 정치자금을 부정적으로 봤다.

 

“‘3김 정치’는 정치 부패라는 부정적 유산을 남겼다. ‘보스 정치’는 정치에 대한 불신을 낳았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 정치자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정치자금에 대한 규제가 너무 심해졌다. 정치자금 규제가 심해지면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지 않는다. 자칫 부자들만의 정치가 될 수 있다. 선진국에선 정치자금을 모유에 빗댄다. 아기가 크는 데 모유만큼 중요한 게 없는 것처럼 정치인들이 원활한 정치활동을 펼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정치자금이다. 정치자금은 민주주의의 필수비용으로 여겨야 한다. 충분히 공급하고 투명하게 운영되도록 하는 게 관건이다.”

 

외국은 다른가.

 

“제도와 문화 모두 전혀 다르다. 미국에선 현역 정치인과 정치 신인 모두 1년 내내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 당연히 합법적으로 후원금도 모을 수 있다. 오히려 정치자금 후원을 통해 대중의 정치참여를 불러일으키는 구조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유력 대선주자로 떠오른 것도 소액 정치자금이 엄청나게 모이면서부터다. 유럽도 우리처럼 규제가 심하지 않다. 미국에서는 시민들의 소액 정치후원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다. 후원금을 많이 모은 정치인이 유력한 차기 주자로 떠오르는 문화도 있다. 정치 후원금은 검은돈이 아니라 그만큼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받고 있다는 방증으로 여겨진다.”


한국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정치 후원 문화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한국의 정당 문화와 관련이 깊다. 정치인이나 정당 후원을 하면 정부가 세액공제를 통해 다시 돌려주는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여전히 시민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다. 정치 후원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성취감 등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후원하면 ‘소속감’과 ‘일치감’ 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다양한 문화가 형성돼 있다. 이렇게 되면 더 많은 참여가 따르고, 그만큼 정치인들을 더 관심 있게 보게 된다. 투명성과 감시라는 민주주의의 원리가 자연스럽게 작동하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 정당 정치다. 소액 다수의 후원 문화가 필수적인 이유다. 소액 다수가 참여하는 정치 후원 문화를 갖추려면 당연히 투명성이 필수적이다. 미국에서는 정치자금 모금 내역과 사용 내역을 사실상 실시간으로 공개한다. 자연스럽게 유권자들로부터 신뢰를 받는다. 이렇게 쌓은 신뢰 속에 다시 후원이 이어진다.”



“자랑스러운 후원 통해 소속감·일치감 맛보게 해야”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나.

 

“정치자금 제도는 그동안 많이 변모해 왔다. 선관위에 신고된 단일 지정 계좌를 통해 입출금을 하도록 하고, 일정액 이상의 수입과 지출 내역을 반드시 보고하도록 했다. 문제는 그 공개 절차가 까다로워 시민들의 접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정치자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없애기 위해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 때 직계존비속의 고지 거부 조항을 폐지하고, ‘재산 형성 과정 소명제’를 도입해야 한다. 2003년 노무현 정부 인수위에서 이런 의견을 제시했지만 ‘대한민국 정치인 중에 이 과정을 무사히 통과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논리에 무산됐다. 이 제도가 도입됐다면 한국 정치는 이미 깨끗하게 됐을 것이라 본다. 자금 세탁 혐의가 있는 경우 선관위나 금융 당국에서 추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모든 정치인들이 정치자금 사용 내역을 실시간으로 공개하도록 의무화해야 한다.”

 

낙선 정치인이나 정치 신인이 합법적으로 정치자금을 모금할 방법도 없다. 

 

“한국처럼 정치자금이나 선거에 대한 규제가 심한 나라는 없다. 국회의원들은 지역구에서 의정보고회 등을 통해 주민들과 접촉하는데, 정치 신인들은 선거운동이 아예 불가능한 구조다. 국회의원들은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지만 원외 인사나 정치 신인들은 그조차도 못 하게 한다. 굉장히 불공정한 구조다. 반대로 정치인이 자신의 돈을 정치자금으로 쓰는 것 또한 엄격히 규제할 필요가 있다. 대중에게 모은 정치자금 내역은 공개하도록 하면서, 자신의 돈을 쓰는 것에 대해선 전혀 규제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자연스럽게 돈 많은 정치인은 후원금을 거부하고 마음껏 자신의 돈으로 정치를 하게 된다. 정치가 부자들만의 전유물이 돼선 안 된다.”  

 

※‘정치인과 돈’ 커버스토리 관련기사

[정치인과 돈①] 돈과 정치 그리고 ‘바보 노회찬’

​[정치인과 돈②] 노회찬·정치 집어삼킨 괴물 ‘정치자금법’

☞[정치인과 돈③] ‘제2, 제3의 노회찬’ 신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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