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서 암 진단받으면 죽고 난 뒤 치료받는다?
  • 방승민 영국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0 15:23
  • 호수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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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난으로 국가보건서비스까지 민영화 요구 거세

 

2017년 이맘때쯤, 필자는 근무하던 중 갑작스러운 뇌졸중 증상으로 급히 택시를 타고 회사 인근에 위치한 세인트 토머스 종합병원(St. Thomas Hospital) 응급실로 향했다. 도착한 것은 오후 4시경. 접수를 하고 간호사를 만나 혈압을 재고, 증상을 확인하기 위한 간단한 테스트를 했다. 2시간 정도 지나서야 2명의 응급 전문의를 만나 진료를 받을 수 있었고 1시간가량 결과를 기다린 끝에 바로 CT(컴퓨터단층)촬영을 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불만도 잠시. CT촬영 비용과 만일의 수술비가 걱정돼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모든 것이 무료라는 대답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응급 진료를 받기 위해 들어온 환자가 당일 CT촬영을 하는 경우는 2년간 이 병원에 근무하면서 처음 봤다”는 방사선과 의사의 말이었다. 결국 입원을 하고 3일을 더 기다려 MRI촬영을 한 후, 이상이 없다는 결과를 받았다. 그렇게 영국의 의료정책에 대한 감사함과 의문점을 품은 채 퇴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영국의 공공 국가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care Service·NHS)는 올해로 70주년을 맞이했다. NHS는 “포괄적이고(Comprehensive), 무료이며(Free), 지불 능력이 아닌 임상적 필요(Based on clinical need, not ability to pay)”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으며, 세금을 기반으로 운영된다. 2018년 기준, 영국 NHS 예산은 1250억 파운드(약 183조원)로 6600만 명의 국민 및 이민자들을 위해 사용된다. 한편 한국의 경우 2018년 국민건강보험 예산은 전년 대비 12.2% 증가한 70조6162억원이다. 이 중 60조9420억원, 전체 예산의 96.2%가 보험급여비로 사용된다. 

 

지난 2월3일 국가보건서비스(NHS)의 예산 규모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국 시민들이 거리 집회를 열고 있다. ⓒEPA 연합


 

세금 걷어 한 해 180조원 쓰는 NHS

 

영국에는 공공 병원뿐만 아니라 민간(Private) 병원도 존재한다. 민간 의료 서비스에는 국가보건서비스(NHS)의 혜택이 적용되지 않아 환자들이 모든 금액을 부담해야 한다. 비용은 런던의 한 민간 치과를 기준으로 크라운이 700파운드(약 100만원), 임플란트가 2150파운드(약 313만원)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그러나 NHS 병원에 비해 빠른 시일 내에, 보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의를 통해 진료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영국 가디언지 발표에 따르면, 2008년 이후 지속된 NHS의 위기로 인해 보험료세금(Insurance Premium Tax)의 급등에도 불구하고 민간 의료보험 가입자는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추세다.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돼 있을 경우, 한국과 동일한 형태로 보험 약관에 따라 보장받게 된다.

 

영국인들은 소득에 따라 국가 건강보험료(National Insurance·NI)를 차등 지불한다. NI는 소득 정도에 따라 비율이 적용되며, 세전 월 702파운드(약 102만원) 미만을 받을 경우 건강보험료는 내지 않아도 된다. 월 소득으로 702파운드 이상 혹은 3863파운드 미만을 받을 경우, 월급에서 최저임금 기준인 702파운드를 제외한 금액의 12%를 건강보험료로 지불하게 된다. 월 3863파운드 이상을 받으면 총 월급에서 3863파운드를 제외한 금액의 2%를 기본보험료((3863파운드-702파운드)×12%=379.32파운드)에 추가해 지불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동일한 조건이 적용된다. 한국의 경우 2018년 기준 외국인 노동자를 포함한 한국 직장인의 건강보험료율은 월 소득 대비 6.24%로, 사업주와 근로자가 각각 3.12%씩 나눠 부담한다. 영국에 비해 다소 높아 보이는 수치이나, 한국은 환자 개인의 부담금이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다만 유럽연합 이외 국가에서 온 이민자들은 추가적으로 비자 신청 단계에서 이민자 건강보험료(Immigrant Health Surcharge)를 지불해야 한다. 이는 학업, 일 또는 가족 합류 등의 사유로 영국에 와 6개월 이상 체류할 경우 적용된다. 학생 및 워킹홀리데이 비자 소지자는 연 150파운드(약 21만9200원), 기타 비자 소지자는 연 200파운드(약 29만2200원)를 지불해야 하며, 이는 올해 말부터 2배로 인상될 예정이다. 

 

 

막대한 예산으로 제약사·의료진만 돈 버는 꼴

 

재정 부족으로 인한 전문 인력 및 시설 부족은 이미 NHS의 오래된 문제로 자리 잡았으며, NHS를 향한 불만의 목소리 또한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 최근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국은 타 유럽 국가들에 비해 GDP(국내총생산) 대비 공공 및 민간 의료 규모가 유럽연합 전체 평균보다도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매년 NHS 예산이 부족하다는 소식과 함께 민영화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영국에서 암 진단을 받으면 암이 악화돼, 죽고 난 뒤에 치료받을 순서가 온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긴 대기 시간은 이미 악명이 높다. 실제로 지난겨울 BBC 보도에 따르면, 겨울 독감 등으로 응급환자가 급증하면서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천 건의 긴급하지 않은 수술들이 지연됐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적절한 때에 치료를 받지 못해 치명적인 상태에까지 이른 응급환자의 수가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또한 영국의 인구 고령화는 NHS에 가장 큰 도전 과제이기도 하다. 너필드 재단의 조사 발표에 따르면, 2018년 현재 NHS 총예산의 5분의 2는 65세 이상 고령 인구를 위해 사용된다. 게다가 65세 이상 노인 1명에게 드는 평균 의료비는 30대 환자 1명에게 드는 비용보다 최소 2.5배에서 최대 5배 이상에 달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일부 전문가들은 NHS 기금을 위한 특별 세금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재정이 문제가 아닌 시스템 자체를 비판했다. 가디언 칼럼니스트 시몬 저킨스는 “전 총리인 토니 블레어 집권 당시 NHS의 예산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많은 수혜를 받은 이들은 의료진, 제약회사 그리고 민간 계약 기업이었다”고 꼬집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2010년 이후로도 지역사회가 받는 의료 혜택이 최대 3분의 1 감소했으며, NHS에 막대한 규모의 자본이 투입됐음에도 자택 치료 서비스, 고령자 및 환자의 주간 보호 시설 등 부수적인 서비스가 급감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재정 규모가 아닌 시스템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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