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에도 제 인생은 쉼 없이 달려야만 했어요”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7 10:54
  • 호수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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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86아시안게임 3관왕 ‘육상 영웅’ 임춘애…“다시 육상으로 돌아와, 내 운명이 달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

 

어느새 32년의 세월이 흘렀다. 굴곡진 인생의 여정이었지만 대중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기억되는 모양이다. 아시안게임이 열릴 때마다 그의 이름이 회자되는 걸 보면. 86서울아시안게임 육상 중장거리에서 3관왕(800m, 1500m, 3000m)을 차지하며 신데렐라로 부상했던 임춘애(49). 라면만 먹고 운동했다는 왜곡된 기사로 ‘임춘애=라면’으로 인식된 시간들도 있었지만, 17세의 소녀는 어느새 세 아이를 둔 중년의 여성이 돼 기자 앞에 나타났다. 8월14일 경기도 용인시 죽전동의 한 카페에서 임춘애를 만났다. 

 

“그런데 무슨 기사 쓰실 거예요? 제가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데, 설마 라면 얘기를 또 쓰실 건 아니시죠?”

 

임춘애는 자리에 앉자마자 궁금증을 쏟아냈다. 인터뷰 섭외를 위해 전화통화를 하면서 충분히 설명했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라면 사건’으로 상처받은 일이 많다 보니 어렵게 인터뷰를 약속해 놓고도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이영미 제공


 

“라면 얘기 안 물어볼 테니까 걱정 마세요(웃음).”

 

비로소 임춘애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육상선수 시절의 임춘애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그가 결혼 후 큰딸에 이어 쌍둥이 아들을 출산했을 때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결혼 후 육아에 매달리며 육상과 거리를 두고 있는 그의 근황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쌍둥이들이 지금 고2예요.”

 

임춘애가 기자와의 만남을 회상하며 당시 갓 태어났던 쌍둥이들이 어느새 고교 2학년이 됐다고 설명했다. 어른들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아이들은 정말 훌쩍 크는 듯하다. 

 

대학을 졸업한 딸과 고2 쌍둥이 아들을 둔 임춘애한테 궁금한 건 최근 생활이었다. 그와 관련된 기사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면 얘기 안 물어본다는 말에 마음의 문을 연 그는 편하게 대답했다.

 

“송파구청에서 운영하는 ‘임춘애 박우상 달리기 교실’을 5년째 하고 있어요. 중간중간 달리기 행사에도 참석하고요. 요즘 무릎에 통증이 심해서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녔는데 조금 나아진 상태예요. 어렸을 때 심하게 운동했던 선수들이 나이 들면 근육량이 줄어들어 통증이 유발된다고 하더라고요. 은퇴 후에 아예 운동은 쳐다보지도 않았거든요.”

 

무릎에 물이 찼다고 한다. 처음에는 동네 병원에 다니다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통증클리닉을 거쳐 종합병원까지 향했는데 병원 진단 결과는 퇴행성관절염이었다. 물리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 은퇴 후 처음으로 헬스클럽에 등록, 열심히 운동한 끝에 통증은 거의 사라진 상태라고. 

 

임춘애는 90베이징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선수생활에서 은퇴했다. 일부에서는 88서울올림픽 이후에 은퇴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준비하다 부상으로 은퇴 수순을 밟은 게 맞다. 은퇴 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온 임춘애는 의외로 다양한 직업군에 도전했다. 

 

3000m에서 역주하는 임춘애 선수 ⓒAP연합

 

“처음에는 보험설계사로 일했어요. 그러다 수입자동차 딜러로 직업을 바꿨는데 적응하지 못하고 6개월 만에 그만뒀어요. 이후 재활병원의 재활 트레이너로 입사했다가 병원에서 영업을 시키는 바람에 접을 수밖에 없었죠. 도시락 사업을 진행했지만 역시 실패만 맛봤고, 이후 남편과 함께 칼국수 집을 운영했어요. 후배가 운영하는 스크린골프장에서도 일하다 초등학교 육상부 코치로 다시 육상과 손을 잡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성공한 일이 없네요? 이제부터는 Q&A로 인터뷰를 진행할게요.

 

“그런 셈이죠. 아시잖아요. 운동선수 출신들이 사회생활에 소질 없다는 걸. 나름 야무지게 일한다고 생각했는데 번번이 손에 쥐는 거 없이 끝났어요. 지금은 뭘 하고 싶어도 무릎 때문에 할 수도 없고 자신감도 떨어졌습니다. 그나마 생활체육으로 달리기 교실을 계속하고 있는 게 다행인 거죠.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봐요. 사회에 나가 해 볼 만한 일들은 다 해 봤는데 다시 육상으로 돌아오는 걸 보면 내 운명이 달리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같다고요.”

 

선수 때의 얘기를 해 봐요. 육상을 처음 시작한 게 언제였나요.

 

“초등학교 3학년 2학기 때부터요. 지금도 마른 편이지만 그때는 깡마른 아이였어요. 60m를 뛰다가 5학년부터 600m를 뛰게 됐는데, 6학년 때 소년체전에 출전했다가 3등을 차지한 거예요. 그때부터 제 인생은 달리기와 떼려야 뗄 수 없었어요. 중학교 진학도 육상 특기자로 뽑혀 갔으니까요. 제가 뭔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이 지시하는 대로 따랐고 그게 고교 진학 후에도 달리기를 했던 이유였죠.”

 

운동을 굉장히 심하게 한 걸로 알고 있어요.

 

“그 얘기를 하려면 3박4일 걸릴 거예요(웃음). 고등학교 때는 매일 아침 6시에 남한산성에서 모여 뛰었어요. 집에서 남한산성 입구까지 뛰어갔다가 거기서 다시 훈련을 시작했던 거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앞둔 터라 훈련 강도와 시간이 꽤 길었었죠.”

 

임춘애는 중3 때 김번일 코치를 만나게 된다. 학교의 체육선생이 육상선수들을 모두 관리하는 게 어려워지자 순회코치를 구했는데 그때 실업팀에 있던 김 코치가 학교로 오게 된 것이다. 임춘애는 김 코치의 개인지도를 받으며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고교 진학 후에도 김 코치는 임춘애와 스승과 제자의 연을 이어갔다. 

 

김번일 코치로부터 스파르타식 훈련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힘든 일도 많았다고 하던데요.

 

“‘사랑의 매’를 많이 맞았죠(웃음). 연습 중에 3000m에서 비공인 한국신기록을 세운 적이 있었어요. 선생님으로선 기대가 클 수밖에 없었죠. 그런 제가 춘천 전국마라톤대회에 출전했다가 중간에 넘어진 거예요. 정강이에 염증이 생기는 바람에 통증으로 뛰지 못했어요. 다음 날 링거를 맞고 1500m에 출전해 우승으로 만회했지만, 그새 선생님한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났어요. 그러다 팀을 이탈해 도망친 적도 있었죠. 물론 다시 돌아와야 했지만요. 덕분에 아시안게임 대표팀 선발전에 출전하지 못했어요.”

 

그러면 어떤 방법으로 아시안게임에 출전하게 된 건가요.

 

“이후 전국체전 3000m와 1500m 계주에서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3관왕에 올랐고, 7월 비호기대회에서 1500m 한국신기록, 800m 대회신기록 등 2개의 신기록을 작성했더니 육상계가 발칵 뒤집어진 거예요. 규정에 어긋나도 임춘애를 아시안게임에 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결국 뒤늦게 태릉선수촌에 합류했는데 선발전을 거치지 않고 들어온 제게 동료 선수들은 질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고, 훈련도 밥도 따로 먹었을 만큼 철저히 ‘왕따’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전 그 시간들이 나쁘지 않았어요. 선생님이 저랑 함께 대표팀에 합류했지만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학교에서 개인훈련을 할 때처럼 혼내지 않으셨거든요. 그게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원래는 1500m와 3000m 대표팀 선수로 뽑힌 거였죠? 그런데 어떻게 해서 800m에 출전했던 거죠.

 

“연습 중에 또 800m 신기록이 나온 거예요. 사실 1500m와 3000m는 중국, 일본 선수들과 기록 차이가 큰 편이었어요. 800m가 그나마 메달 가능성이 있다 보니 육상연맹에서 절 800m 출전 선수로 지목한 거예요. 결국 세 종목에 모두 출전했는데, 장거리를 뛴 터라 800m처럼 단거리는 큰 부담이 없었어요. 그래서 기록이 나왔던 것 같아요.”

 

임춘애는 아시안게임에서 신기할 정도로 운이 따랐다. 중국 선수에게 10초 이상 뒤졌던 3000m에서 중국 선수의 저조한 기록으로 베스트 기록을 낸 임춘애한테 금메달이 돌아갔고, 800m는 2위로 결승선을 통과했지만 2초 앞서 1위로 골인한 인도 선수가 레인을 너무 빨리 벗어나는 바람에 실격당하자 임춘애가 그 금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1500m에서는 자력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실력과 운이 조화를 이루며 아시안게임 3관왕이란 쾌거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86서울아시안게임 육상 여자 800m에서 금매달을 딴 임춘애 선수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AP연합


 

그런데 800m 결승전을 앞두고 임춘애가 중성이란 소문이 났다면서요.

 

“네. 전 그런 소문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런데 한 선수가 나만 모르고 있는 것 같다며 얘기해 주더라고요. 내용이 재미있었어요. 제가 중성인데 한국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이라 그 사실을 일부러 숨기고 있는 것이라고요. 그 선수한테 중성이 뭐냐고 물으니까 남자와 여자의 피가 섞여 있다고 말하더라고요. 처음 그 얘기를 전해 듣고는 제가 쌍둥이라 가능성이 있겠다 싶었어요. 운동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살았으니까요. 사실 여탕에 가면 남탕으로 가라고 타박을 받은 적도 많았거든요. 그때까지 가슴도 안 나오고 생리도 안 했어요. 실제로 대회 앞두고 성별 검사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여성으로 판정받았기 때문에 800m 결승전에 나갈 수 있었고요.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뭐, 내가 남자라는데 여자 선수들과 달리기에서 질 수 없지 않나 싶은…. 이후 한국체육과학연구원에서 다시 성별 검사를 받았어요. 최종적으로 여자로 인정받았죠. 사실 아시안게임 마치면 운동을 그만두려고 마음먹은 터라 제가 여자든 남자든 무슨 상관인가 싶기도 했습니다.”

 

86아시안게임 3관왕은 임춘애에게 이화여대 체육학과에 진학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줬다. 대학 1학년 때 88서울올림픽 예선전에 출전했지만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한 채 예선 탈락의 쓰라림을 맛봤다. 임춘애는 은퇴하려 했지만 육상계에서는 임춘애를 능가할 만한 선수를 발굴해 내지 못했고, 임춘애에게 베이징아시안게임 때까지만 뛰어달라고 부탁하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부상 때문에 뛰고 싶어도 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 부위에 부상을 당한 건가요.

 

“골반이 너무 아팠어요. 아시안게임 이후 몸이 완전히 망가진 거였죠. 사람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훈련량을 소화하면서 몸에 이상을 느꼈고, 88올림픽을 앞두고 병원을 찾았더니 골반이 채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동한 탓에 실금이 갔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상황에서 전 엄청난 비난을 들어야 했습니다. 라면만 먹고 운동하던 임춘애가 아시안게임 포상금으로 배에 기름이 껴 운동을 소홀히 했다는 내용이었죠. 정말 억울하고 섭섭했지만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어요. 은퇴하는 것만이 제가 살길이었습니다.”

 

은퇴하기 전에 대한육상연맹 회장한테 편지를 썼다면서요.

 

“아무도 제 몸 상태를 믿지 못하는 거예요. 선수가 아프다고 하는데 코치들은 정신 상태에 문제가 있다고 진단하니까 미칠 것 같더라고요. 당시 육상연맹은 박정기 회장님이 맡고 계셨는데 제가 손편지로 회장님한테 부상 정도를 자세히 설명하면서 배가 불러 운동을 접으려 하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던 거죠.”

 

박 회장은 편지의 진심을 이해하던가요.

 

“네. 회장님은 제 말을 믿어주셨어요. 모두가 정신 상태 운운했지만 회장님만 제 몸 상태를 이해하시더라고요. 제 은퇴식도 마련해 주셨어요. 잊을 수 없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에요.”

 

은퇴 후 대학생활을 제대로 했나요? 공부하는 학생의 삶이 낯설게 다가왔을 텐데요.

 

“어려웠죠. 안 하던 공부를 하려니까. 열등감도 느꼈어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다는 이화여대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체육교육과를 다녔더라면 졸업 후 학교 교사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이화여대에는 체육학과만 있었거든요. 뒤늦게 캠퍼스 생활을 만끽해 보려 했지만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학교생활이 재미있지는 않았습니다.”

 

임춘애는 아시안게임 3관왕을 차지한 후 포상금으로 1억5000만원을 받았다. 당시 대한육상연맹은 임춘애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일시불로 지급하지 않고 은퇴하기 전까지 매달 70만원씩을 나눠 지급하다가 임춘애가 은퇴하자 7000만원을 일시에 지급했고 나머지 포상금은 은퇴 이후 돌려줬다고 한다. 포상금 사용 용도를 물었더니 임춘애는 “7000만원은 엄마 집 사는 데 보탰고, 나머지 8000만원은 결혼자금으로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임춘애는 대학 졸업 후 축구선수 출신 이상용씨와 결혼해 세 아이를 낳았다.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풍족한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다양한 직업군을 소화했던 그가 무릎 통증을 극복하고 달리기 교실에 매진하게 됐다는 내용은 임춘애의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임춘애한테 86아시안게임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제 이름을 알린 계기가 됐죠. 그 후론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했지만요. 늘 조심스러웠어요. 아이들이 태어난 후에는 혹시나 싶어 더 조심하면서 살았고요. 아이들이 엄마 임춘애보다 육상선수 출신의 임춘애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어요. 선수 때도 쉼 없이 달렸는데 은퇴 후에도 제 인생은 쉼 없이 달려야만 하더라고요. 그래도 이렇게 인터뷰할 수 있을 정도라면 괜찮게 산 거 아닌가요? 정말 열심히 살았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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