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우가 품은 비범함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7 11:00
  • 호수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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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라이프》서 이수연 작가와 조우…출연 영화로 본 그의 퍼스낼리티

 

질문을 하나 던지면서 시작하고 싶다. 지난해 방영된 tvN 드라마 《비밀의 숲》의 황시목 역할을 조승우가 맡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마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조승우 말고는 달리 떠올릴 수 없다. 조승우가 《비밀의 숲》에서 증명해 낸 진가다. 조승우가 《비밀의 숲》 이수연 작가와 다시 호흡을 맞추고 있는 JTBC 드라마 《라이프》는 그렇다면 어떨까. 이 드라마는 이제야 겨우 반환점을 돌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많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듯하다. ‘병원 총괄사장 구승효를 조승우가 안 했으면 어쩔 뻔!’

 

《라이프》 1회에서 조승우에게 허락된 출연 분량은 5분 정도였다. 구승효가 지방 의료원 파견에 반발하기 위해 강당에 모인 100여 명의 의사와 1대 다로 대립하는 장면. 흐름상 구승효의 논리적 공세에 의사들이 ‘옴짝달싹’ 못해야 하는 신이었을 텐데, 등장과 동시에 극의 흐름을 전복시켜버리는 조승우의 ‘액션’만큼이나 흥미로웠던 건 이를 지켜보는 100여 명 배우들의 ‘리액션’이었다. 그 반응들이 너무나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워서 문득 든 생각. ‘저 배우들의 놀라는 몸짓과 표정은 연기가 아니라 조승우에 대한 실제 반응이 아니었을까.’ 

 

조승우의 얼굴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유인책이다. 2시간 가까이 지정석에서 스크린에 집중해야 하는 극장과 달리 TV는 ‘딴짓하기’에 좋은 매체다. 선택 가능한 채널도 많다. 지루하게 하는 순간 채널은 돌아간다. 그러나 조승우가 화면에 나오면 화장실을 가려다가도 ‘스톱’하고 TV에 시선을 고정하게 된다. 최근 조승우가 보여주는 연기엔 묘한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가 서늘하다는 게 또 매력이다. 표정을 지운 그의 눈빛은 심장을 관통한다.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인데 상대를 위협한다. 신통하다.

 

JTBC 드라마 《라이프》에서 병원 총괄사장 구승효 역을 맡은 조승우

 

조승우의 비범한 퍼스낼리티

 

극을 환기시키는 조승우의 재능은 스크린에서도 목격돼 왔다. 《와니와 준하》(2001)에서 그는 와니도 준하도 아닌 (회상 신에 짧게 등장하고 사라지는) 영민이었지만, 조승우가 남긴 첫사랑의 애틋함은 극 전반에 깊게 침투해 영화의 결을 아련하게 만들었다. 《암살》(2015)에선 독립투사 김원봉으로 짧게 등장해 긴 파장을 남겼다. 《타짜》(2006)의 경우 만화도 있고, 탑이 이어받은 《타짜2》(2014)도 있고, 장혁이 연기한 드라마판 《타짜》(2008)도 있지만, 대중의 기억 속에서 ‘타짜’ 하면 떠오르는 건 조승우 얼굴이 압도적이다.  

 

이상한 일이다. 조승우는 한눈에 띄는 개성적인 외모의 소유자도 꽃미남 유형의 배우도 아니다. 체격도 크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작은 편이다. 그런데 그가 등장하면 쇼트에 전등 하나가 ‘탁’ 켜지는 느낌이 난다. 조승우의 이 비범한 퍼스낼리티는 어디에서 불어오는 것일까. 뮤지컬 관객과 실시간으로 만나며 익힌 무대 장악력? (아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이래야 할진대 영상 안에서 오히려 뻣뻣해지는 뮤지컬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부모의 후광을 입지 않고 홀로 성공한 스타 2세라는 점과 그 뒤에 얽힌 사연들? (아니다. 세상에 사연 없는 가족사가 어디 있겠는가.) 

 

아, 이런 사례라면 조금 힌트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말아톤》(2005) 촬영 당시 ‘자폐아처럼 포즈를 취해 보라’는 한 기자의 무례한 주문에 화를 냈다거나, CF가 들어와도 자신이 직접 써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중을 속이는 것 같아 고사한다는 일화들 말이다. 이런 사연들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조승우란 배우가 솔직하다는 것, 자기 주관이 분명하다는 것, 배우에 대한 정의가 확고하고 거기에서 오는 자의식이 높다는 것이다. 

 

조승우는 대중의 사랑을 못 받을까 안달하는 쪽보다, 매스미디어의 집중포화가 따르는 스타라는 위치가 부담스러워 도망가고 싶다는 인상이 강한 배우다. 작품 선택에 있어 이러한 면모가 더 짙은데, 실제로 그는 대중이 자신에게 바라는 욕망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고 여러 번 공언해 왔다. 이때 그를 움직이는 욕망이란 ‘내가 즐겁게 하고 싶은 작품인가’다. 제대 후 첫 작품으로 모두의 예상을 깨고 구혜선이 메가폰을 잡은 저예산 영화 《복숭아나무》(2012)를 선택한 것도, 그 연장선에서 바라보면 그다운 행보였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뚜벅뚜벅 걷는 남자, 그것이 조승우다. 

 

그에게도 어색한 시절은 있었다. 조승우에 대한 첫 기억은 《춘향뎐》(2000) 속 이몽룡이 아니라, 이몽룡 복장으로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는 모습이었다. 세계무대에 선 조승우는 한복을 입고 꽃신을 신고 있었다. 조승우의 선택이 아니었을 것으로 강하게 추측되는 이날의 의상은 그를 고지식하게 보이게끔 만들어버린 면이 있었다. 임권택의 작품으로 데뷔해 국제무대까지 밟은 건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몽룡이라는 타이틀이 조승우에게 남긴 꼬리는 길었다. 심지어 《춘향뎐》 이후 그를 따라다닌 꼬리표는 ‘애늙은이’였다. 당시 그의 나이 스물하나. 

 

그러나 조승우는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미지 안에서 허우적대다가 사라질 유약한 배우가 아니었다. 뮤지컬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데뷔작의 흔적과 싸웠다. 2004년은 뮤지컬 배우로서 자리를 확고히 한 해로 “지금 이 순간~”을 열창한 조승우의 역할에 힘입어 《지킬 앤 하이드》가 그야말로 초대박이 났다. ‘클릭 전쟁’과 ‘매진’을 부르는 조승우 신화의 서막. 이듬해엔 《말아톤》이 스크린에서 500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을 기록했다. 이러한 경험치들이 쌓이며 그의 여유와 자신감도 두둑해졌을 것이다.  

 

조승우의 출연작들. 왼쪽부터 영화 《말아톤》 《타짜》 《암살》

 

시간과 낭만을 품은 얼굴

 

흥미롭게도 조승우의 얼굴엔 시대의 공기가 배어 있다. 《하류인생》(2004)에선 한국 현대사의 격랑에 떠밀린 남자였고, 《클래식》(2003)에선 70년대 낭만의 화신이었으며, 《고고70》(2008)에선 70년대 밤무대의 제왕이었고, 《퍼펙트 게임》(2011)에서는 80년대 세기의 야구 대결을 소환하기도 했다. 뮤지컬 배우로서는 하물며 현대적인 작품에 출연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조승우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배우, 잊혀져가는 시간과 낭만을 재생해 내는 배우다. 이쯤이면 애늙은이 같다는 세간의 시선을 ‘낭만’으로 틀어버린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든다.  

 

조승우는 세월이 흘러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작품을 선호한다고 여러 인터뷰를 통해 밝혀왔다. 유행을 타는 작품도 기피해 온 편이다. 조승우가 이수연 작가의 작품을 연달아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라이프》는 비록 과거 시대를 품은 작품은 아니지만, 시간을 버텨 소구될 만한 인간의 욕망과 권력을 향한 원초적 본능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녹아 있다. 그 중심에 조승우가 있다. 자본주의 가면을 쓰고 있는 구승효가 돈이 아닌 사람의 진심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는 날, 많은 이들이 아마 크게 감동할 것이다. 조승우의 연기에 설득당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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