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덕 봤다"던 정재찬 전 위원장…이유 있는 공정위 위기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8.08.21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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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상식과 괴리된 '경제 검찰', 고강도 쇄신책·직원 개개인의 각성 모두 필요

 

'재계 저승사자'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가 쑥대밭이 됐다. 퇴직간부들의 재취업을 위해 재계의 민간기업을 압박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다. 

 

공정위의 '조직적 채용 비리'를 규명해 만천하에 알린 것은 검찰이다. 공교롭게도 공정위는 얼마 전까지 전속고발권 폐지 문제로 검찰과 기 싸움을 벌였다. 양측 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른 지난 6월 검찰의 공정위 채용 비리 수사가 시작됐다. 공정위는 검찰수사 결과 앞에 무릎을 꿇었고, 필사적으로 사수해온 전속고발 권한도 일부 내놨다.

 

8월20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공정거래위원회 간부들이 김상조 위원장(오른쪽)의 조직 쇄신안 발표에 앞선 대국민 사과를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공정위 역사상 최대 위기"…2년 전 정재찬 前 위원장 발언 주목  

 

검찰은 업무방해 혐의 등으로 정재찬 전 위원장과 김학현·신영선 전 부위원장을 구속기소 하고, 노대래·김동수 전 위원장 등 9명을 불구속기소 했다. 1996년 국장급 2명과 2003년 이남기 전 위원장이 기소된 적은 있었지만, 12명이 동시에 기소된 것은 공정위 역사상 초유의 일이다. 

 

공정위 직원들은 당혹감을 넘어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나름대로 조직 내부 단합이 잘 됐던 때가 최악의 적폐 사례 시기로 몰렸기 때문이다. 이번에 가장 중대한 혐의를 받아 구속된 3명이 함께 현직(정재찬 위원장, 김학현 부위원장, 신영선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던 2014년 12월부터 2017년 1월까지 공정위 분위기는 좋았다. 간만에 '으쌰으쌰' 했다. 여기엔 정재찬 전 위원장이 11년 만에 내부출신 수장으로 발탁됐다는 이유가 적지 않게 작용했다. 정 전 위원장은 임명 전 23년 가까이 공정위에 근무하면서 주요 보직을 두루 거쳤다. '경제 검찰' 공정위에서 최고 이론가·실무가였던 그는 말 그대로 터줏대감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장점이자 독(毒)이 됐다. 

 

정재찬 전 위원장은 조직의 업무·목표·​사기(士氣)는 그 누구보다 잘 챙겼으나, '외부에서 공정위를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선 놀랄 만큼 둔감했다. 그의 후배인 공정위 간부들도 비슷한 문제에 항상 노출돼 있다. 사실 일반 국민 다수는 공정위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정확히 모른다. '공정하고 자유로운 시장경제 질서의 구현과 소비자 권익 제고를 주 임무로 하는 합의제 행정기관', '경제 민주화 주무 부처'라고 설명해도 쉽게 와닿진 않는다. 공정위 직원들은 몰라도 위원장은 날카로운 현실 감각으로 조직 내부를 돌아보고 국민, 사회와 끊임없이 소통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정 전 위원장은 2014년 11월 내정된 때부터 '외부 이해'에 취약함을 드러냈다.

 

당시 그의 인사청문회에 즈음해 외부에서 집중적으로 쏟아진 질문은 '공정위가 박근혜 대통령 공약 사항인 경제 민주화를 계속 추진할지 여부'였다. 경제 민주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전임 노대래 위원장이 갑작스레 물러나면서 나오게 된 의문이다.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이었음에도 정 전 위원장은 "이상했다", "짜증났다"고만 당시를 회상했다. 취임한 후 2년여 만인 2016년 11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다. 한참이 지났는데도 정 전 위원장은 여전히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후보자가 아니라 해명자 비슷하게 돼 버려 이상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정 전 위원장은 "처음에 (공정위원장으로 내정됐을 때) 나름대로는 '(2014년 4월16일 발생한) 세월호 사건 덕을 좀 봤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사건이 나고 나니까 각 분야 전문가를 찾게 되고, 공정위에서 이십몇 년간 있었던 이 사람(본인)이 제일 전문가라고 판단해서 내정한 것으로 봤다"며 "'아, 세월호 덕을 보는 케이스도 있구나' 했는데 느닷없이 '경제 활성화의 꼭두각시냐'는 식으로 말하니까 정말 짜증 나더라"고 했다. 앞서 '그쪽(세월호 사건)을 언급해선 안 되겠지만'이라고 전제했으나, 장관급 공무원의 입에서 나온 말치곤 생경했다.

 

이 밖에 정 전 위원장 발언은 대부분 공정위 합의 시스템의 공정성, 이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자신의 노력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끊임없이 제기된 대기업 봐주기, 청와대 개입 의혹 등은 전혀 사실이 아니고 내부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라며 그는 일축했다. 자부심 가득했던 정 전 위원장은 2년여가 지난 현재 구치소에서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퇴직간부의 불법 재취업을 적극적으로 도왔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저 조직의 사기를 위해서 했던 일이 범죄 행위로 판단 받는 데 대해 그는 또다시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기분 나빠하고 있을는지 모르겠다.   

 

외부 시각을 충분히 수렴한 현(現) 공정위는 검찰수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김상조 공정위원장은 8월20일 "수사 결과를 겸허히 수용하고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허리를 굽혔다. 김 위원장은 "재취업 과정에서 부적절한 관행, 일부 퇴직자의 일탈 행위 등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 잘못된 관행과 비리가 있었음을 통감한다"면서 "공정위 창설 이래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최대 위기"라고 진단했다. '공정위 조직 쇄신 방안'과 '공정거래법 전속고발제 폐지 합의안'도 발표했다. 사실상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각오다.

 

 

'다시 외부 출신' 김상조 개혁안, 내부 변화 수반될 때 성공

 

'다시 외부 출신' 김상조 위원장의 개혁 추진에 공정위 모든 직원이 환영하진 않는 분위기다. 퇴직 후 10년간 취업 현황 공시, 외부 교육 참석 금지 등 쇄신안을 놓고 벌써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인사 적체, 전문성 약화 등이 심해질 거라는 관측이다. 일부 공정위 직원들은 극소수 '윗선'에서 부적절한 일을 저질렀는데 왜 전체가 매도되고 피해를 봐야 하느냐고 분통을 터뜨린다. 불법 재취업 알선(업무방해) 외 공직자윤리법 위반, 뇌물수수 등 혐의까지 받은 김학현 전 부위원장의 경우, 현직 시절부터 부하 직원들을 무시하는 태도나 강압적인 업무 방식·리더십으로 회자됐다. ​

 

 

정재찬 전 위원장 등 최상위 수뇌부를 비롯한 전·현직 간부 12명이 채용 비리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8월16일 오후 정부세종청사 공정위 운영지원과 사무실에 긴장감이 돌고 있다. ⓒ 연합뉴스

 

 

 

정 전 위원장 등에 대한 동정론 역시 존재한다. 한 공정위 5급 직원은 "공정위 간부가 퇴직 후 기업으로 간 걸 잘했다고 할 순 없지만, 그 과정에서 정 전 위원장이 이득을 본 건 없지 않느냐"며 "기관장으로서 조직에 활력을 제공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 직원은 "공정위가 지금 대기업들을 상대로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지금처럼 사기가 떨어져서 어찌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공정위의 한 국장급(2급) 간부는 "법적 절차가 진행 중이라 어떤 말도 못 하겠다"면서 "우리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얘기라 하더라도 듣는 쪽(법원·검찰)에선 안 좋게 들을 수 있으므로 일절 언급을 하지 말자는 것이 내부 방침"이라고 전했다.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만 '역사상 최악의 상황'인 지금 환골탈태 수준의 고강도 쇄신안은 불가피하다. 외부 시각에 둔감하고 불의에 무력한 내부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데에 공정위 전 직원이 관여돼 있음도 부인하긴 힘들다. 공정위는 1996년 국장 5명 중 2명이 잇따라 검찰에 구속되자 전 직원이 신뢰 회복을 외치며 사표를 위원장에게 맡긴 바 있다. 1급부터 7급까지 전 직원 288명이 사표를 내며 "금품이나 향응을 받는 등 공직자로서 본분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경우 즉시 사표 수리를 감수하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국민은 '그때와 지금은 경우가 다르다'는 볼멘소리보다 '신뢰 회복을 위해 다 같이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결의를 공정위에서 다시 한번 보고 싶어 한다.   
 
8월20일 방영된 JTBC 드라마 《라이프》 9화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예선우 심사위원은 상국대학교병원 쇄신안을 고민하는 구승효 사장과 마주했다. 구 사장은 부원장, 암센터장 등 병원에서 수십 년 근무하며 내부자 논리와 비리의 분별이 불가한 이들을 대적하고 있었다. 예 위원은 구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기관에서 환자 정보를 팔아넘겼다고 했을 때 직원인 저희도 엄청 충격이었습니다. 그때 절실히 느꼈어요. '아, 이래서 윗사람들의 의지가 정말로 중요하구나.' 사장님도 이제 겪어서 아시겠지만, 의사들 사고든 뭐든 절대 안 나서요. 부원장 정도면 충분히 밑에 사람들 협박도 하죠. 이걸 간과하면 앞으로도 그 무슨 일이든 입도 뻥긋 안 할 겁니다. 밀고가 아니라, 동료를 배신하는 게 아니라 잘못을 잘못이라고 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환경을 만들어 주세요. 그렇게 입증을 해 나가다 보면 사고도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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