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 강경파 답답” 핑계 대온 김정은, 김영철을 ‘출구전략’으로 활용?
  • 오종탁 기자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8.08.3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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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수 김영철 부위원장, 정권 명운 걸고 對美 강경 대응

 

북한이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앞세워 북·미 대화판을 뒤흔들고 있다. 지난 8월24일(현지시간)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 취소 후에도 북한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반면 미국은 가만있는 북한에 대해 메시지를 쏟아내며 다급한 마음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왼쪽)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 ⓒ 연합뉴스


 

'비밀 편지' 받고 우왕좌왕하는 미국…북한은 상황 관망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8월30일(현지시간) 블룸버그 인터뷰에 응하면서 북한 비핵화 문제와 관련해 "나는 세계 누구보다도 더 큰 인내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지난 6월12일 북·미 정상회담 이후 뚜렷한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았음에도, 협상을 포기할 생각은 없다고 밝힌 것이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고, 그것(좋은 관계)이 변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면서 "그건 바뀔 수 있다. 전체 상황이 바뀔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앞서 폼페이오 장관의 4차 방북은 목전에서 취소됐다. 게다가 방북 계획을 발표한 지 단 하루 만이다. 북한 비핵화가 지지부진하고, 미·중 무역 갈등 속 중국도 북한의 변화를 독려하지 않고 있어 시기상 적절하지 않다고 트럼프 대통령은 판단했다. 북한은 별다른 대응을 내놓지 않았다. 이후 미국만 일방적으로 대(對)북 메시지를 밝히고 있다.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은 8월28일 한미 연합 군사훈련 재개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트럼프 대통령이 "현 시점에 한미 연합 훈련에 큰돈을 쓸 이유가 없다"며 매티스 장관 발언을 뒤집었다. 이런 오락가락 행보에, 트럼프 대통령의 블룸버그 인터뷰도 사실상 '아무 말 대잔치'에 가깝다. 미국 내 정치 일정, 비판 여론 등에 쫓기는 현실을 방증한다.   

   

미국과 달리 북한은 급할 게 없다. 특히 북한은 최근 '김영철 부위원장 비밀 편지' 카드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을 전격 취소시킨 그 편지를 말한다. 외신들은 연일 앞다퉈 편지 내용과 의미를 취재해 보도하고 있다. 로이터는 8월30일 미 정부의 고위 관리를 인용해 김 부위원장 비밀 편지의 어투가 '기꺼이 무언가를 줄 생각이 없다면 오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보도했다. 

 

8월28일 CNN에 따르면, 이 편지에는 "평화협정에 서명하기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미국은 아직도 (북한의) 기대에 부응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면서 비핵화 협상이 다시 위기에 처했으며 결딴날 수 있다고 경고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 편지는 폼페이오 장관과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번 방북은 성공하지 못할 것 같다'는 확신을 줬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전했다.

 

김영철 부위원장의 강경한 태도는 이전에도 미국을 진땀나게 한 바 있다. 김 부위원장은 7월7일 폼페이오 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취재진이 회담장에서 나가려는 순간 "명백히 할 문제가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밝은 미래는 결코 미국이 가져다주지 않을 것"이라고 마치 전 세계에 알리듯 말했다. 미국이 요구하는 비핵화 조치들을 받아들이기 전에 북한으로서도 대북 제재 해제 등을 약속받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당시 대화 분위기는 급격히 싸늘해졌다.

 

일각에선 거친 언사로 북·미 정상회담을 무산시킬 뻔했던 북한이 바뀌지 않는 데 대해 우려를 제기한다. 지난 5월 북한은 거침없이 정상회담 무산 가능성을 거론한 끝에 미국의 '선제 보이콧'을 초래했다. 막다른 상황에 놓이자 곧바로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며 대미 접촉의 불씨를 살렸다.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양측 간 비핵화 협상이 면밀히 이뤄지나 싶던 와중에 북한은 또 다시 강경 대응으로 미국을 자극했다. 군부 출신 김 부위원장은 폼페이오 장관과 더없이 긴밀한 카운터파트로 비쳐졌을 때가 무색하게 지금 미국을 정면으로 공격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정권의 명운을 걸고 협상 전략을 펼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영태 북한연구소장은 "북한은 핵실험장 폐기 등 자신들 나름대로 선(先)조치를 취했는데, 미국이 이에 상응하는 보상 없이 대북 제재만 앞세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며 "핵무기 포기 등 추가 비핵화 조치의 경우 정권의 존폐가 걸린 일이다. 북한 입장에서 쉽사리 미국이 하자는 대로 할 수 없을 문제"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도 '핵(核) 보유국'임을 강조하면서 미국에 고자세로 나갈 수밖에 없을 듯하다"고 말했다. 

 

한반도 문제에 관한 세계적 석학인 브루스 커밍스 미 시카고대 석좌교수는 KBS와 영국 BBC, 독일 ZDF가 공동제작한 《누가 북한을 움직이는가》 인터뷰에서 "북한과 관련한 내 모든 경험을 통해 봤을 때 북한이 원하는 것은 단계마다 북한이 양보를 하면 미국도 양보를 해준다는 보장이다. 북한은 항상 그 부분에 철저하게 집착해왔다"며 "만약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얻은 것만큼 돌려줄 의사가 있다면 (비핵화 협상은) 잘 될 것이다. 나는 비핵화 과정이 매우 어렵고 길고 철저하게 진행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공격수 혹은 출구전략’ 김영철 앞세워 판 뒤흔드는 北 

     
한편 살얼음판 국면에서 북·미 모두 협상력과 출구전략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모습이다. 미국은 북한 비핵화 협상 교착 상태를 중국 탓으로도 돌리고 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만약에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가 끝나고도 북한이 계속 저렇게 나온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급격히 (북한 비핵화 문제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릴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만약 이 판을 깨고자 할 경우, 깨는 데 따른 책임을 미국이 지게 되면 미국의 전 세계적인 제재 시스템이나 북한 압박이 흔들려버리기 때문에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렵다"면서 "그래서 자기 탓이 아니어야 한다. (이러한 목적으로) 북한과 중국 탓을 하는 것들을 예비적으로 던지는 거라면 좀 우려스러운데, 아직까지 그런 측면은 아닌 것 같다"고 설명했다.

 

관련해 북한의 대미 지렛대 혹은 출구전략은 역시 김영철 부위원장으로 꼽힌다. 지난 4월27일 김정은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비핵화와 경제 개혁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며 군부 강경파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이 남북 정상회담 당시 김 부위원장을 앞에 두고 "저 사람 때문에 안 되는 일이 많았다"고 발언했다는 얘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남 강경파이자 군부 출신인 김 부위원장이 한반도 대화 국면에서 배제되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나왔지만, 보기 좋게 빗나갔다. 김 부위원장은 북한의 비핵화 관련 강·온 전략 모두에서 최선봉에 서 있다. 

 

한 북한 전문가는 "김정은 위원장이 이끄는 북한 핵심그룹이 김영철 부위원장을 앞세우는 건 지금 북한에 그런 강경한 움직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며 "협상력을 끌어올리는 데 김 부위원장을 요긴하게 써먹다가, 혹시 부작용이나 긴급상황이 발생하면 강경파 핑계를 댈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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