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슬픔 이해 못 하는 인간의 한계 슬퍼”
  • 조철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1.23 14:14
  • 호수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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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펴낸 신형철 조선대 교수

“처음부터 슬픔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써놓고 보니 그런 주제의 글이 많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특별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지난 8~9년 동안 우리가 살아온 시절이 워낙에 그렇지 않았나 싶다. 나 또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았다. 예술과 문학에는 슬픔과 결여가 필수적인 요소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언젠가 은희경 작가가 쓴 ‘모든 감정의 끝은 결국 슬픔’이라는 요지의 문장을 인용한 적도 있지만, 그리스 비극을 말하지 않더라도 예술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결국 슬픔을 탐구하고 표현할 때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 왔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가 두 번째 산문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펴냈다. 각종 일간지와 문예지 등에 연재했던 글과 미완성 원고를 모아 엮은 책이다. 평론가로서 작품과 세상 사이에 가교를 놓고자 했던 신 교수는 시와 소설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노래·사진 등 다양한 작품을 정확히 읽고, 듣고, 보면서 온기를 잃지 않으려 했던 자신의 노력을 빼곡히 담았다. 그간의 글을 매만지며, 자신의 글 다수를 관통하는 주제가 슬픔이었음을 깨달은 그는, ‘타인의 슬픔’은 결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부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를 풀어놓는다.

“영화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는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지음·한겨레출판사 펴냄·428쪽·1만6000원 ⓒ 문학과지성사


“우리 울리는 집단·이념·행위 등에도 책임”

신 교수가 이 책에서 말하는 ‘슬픔’의 면모는 다양하다. 슬픔을 해석하는 방법을 고찰하기도 하고, 프로이트의 ‘꿈은 소원 성취’라는 명제를 소개하며, 그렇다면 물속에 잠긴 아이들의 꿈을 꾸는 유가족의 꿈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 되묻기도 한다. 문학이 독자를 위로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을 생각해 보는가 하면, 트라우마는 내가 잊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나를 놓아주는 ‘주체’가 아닐까 이야기하며 현재진행형의 역사적 사건을 꺼내기도 한다.

“한 인간이 어떤 과거에 대해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돼 버리는 고통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상상해야 하리라.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대상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걸 잊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말한다. 이제는 정신 차릴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당신의 고통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는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우리가 그렇게 잔인하다.”

슬픔은 책의 3부에 펼치는 참여적 글과도 맞닿아 있다. 신 교수는 문학작품과 사회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슬픔을 분노로 표출한다.

“공적 슬픔에 대해서 생각할 때 그 슬픔을 가져온 원인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불가피할 것이다. 이 원인을 생각하다 보면 정치와 종교라는 두 층위에 자주 가닿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치의 층위에서 슬픔의 사회적 요인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집단·이념·행위 등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럴 때 좀 강한 어조의 문장이 쓰이곤 하는 것 같다.”

“좋은 소설에서 인물들은 대개 비슷한 일을 겪는다. 문득 사건이 발생한다, 평범한 사람이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고뇌한다, 마침내 치명적인 진실을 손에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자신이 더 이상 옛날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식이다.”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가 되고파”

신 교수는 이 책에서 진진하게 작품 해설을 하면서 자신의 ‘문학관’도 충실히 밝힌다. 그는 ‘좋은 소설의 요건은 무엇인가’ ‘평론가는 왜 대중의 적이 됐는가’ ‘어떤 비평가가 되고 싶은가’ 등 그간 받아온 질문들에 성실히 응답한다. 또한 신춘문예 당선작을 읽고 실망감을 털어놓기도 하고, 노벨문학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등 평론가의 생각과 일상을 동시에 펼쳐 보인다.

“어떤 비평가가 되길 원하느냐는 질문을 몇 번 받은 이후 나는 간결하고 명료한 대답을 준비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최근 어느 대담에서 같은 질문을 받고는 이렇게 답했다. ‘정확하게 칭찬하는 비평가.’ 이 대답은 곧바로 두 개의 추가 질문을 유발할 것이다. 첫째, 왜 칭찬인가. 어떤 텍스트건 칭찬만 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칭찬할 수밖에 없는 텍스트에 대해서만 쓰고 싶다는 뜻이다. 둘째, 왜 정확한 칭찬인가. 칭찬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서 하는 일이 아니다. 칭찬은, 칭찬의 대상에게도 그렇지만 칭찬의 주체에게, 위험할 수 있는 일이다. 부정확한 비판이 분노를 낳는다면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 어설픈 예술가만이 정확하지 않은 칭찬에도 웃는다. 진지한 예술가들은 정확하지 않은 칭찬을 받는 순간 자신이 실패했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칭찬은 자신이 칭찬한 작품과 한 몸이 되어 함께 세월을 견디고 나아간다. 그런 칭찬은 작품의 육체에 가장 깊숙이 새겨지는 문신이 된다. 지워지지도 않고 지울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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