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성지 ‘다이린지(大林寺)’
  • 이인자 일본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1.23 14:31
  • 호수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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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38년간 이어온 안중근 의사와 지바 도시치 추모제

한·일 관계가 어느 때보다 역사적 문제로 순탄하지 않은 요즈음입니다. 올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돌을 맞아 양국은 정부 차원의 심포지엄을 주최하고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 분위기는 20년 전과는 많이 달랐음을 미디어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10월30일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11월21일 화해치유재단 해산 결정까지 겹쳐 불편한 관계가 여과 없이 도드라지고 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 동북지역에서 한·일 관계에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추모행사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같은 날 말입니다. 두 행사 중 하나는 지난 1510호에 소개한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를 도운 후세 다쓰지 변호사 추모제’입니다. 그리고 이번 호에 소개할 행사와 사람은 미야기(宮城)현 구리하라(栗原)시 와카야나기(若柳)에 있는 다이린지(大林寺)에서 거행된 안중근 의사와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의 추모제와 그 제사를 집도한 사이토 다이켄(齋藤泰彦·84) 주지스님입니다. 안중근 의사와 간수였던 지바 도시치의 인간적인 관계에 관해서는 비교적 알려졌다고 생각하기에 여기에서는 생략하려고 합니다.

매년 안중근 의사 탄신일(9월2일) 즈음 주말에 다이린지에서 추모법요(法要)가 거행됩니다. 올해로 38회를 맞이했습니다.

“초기에는 일본인들이 더 많이 참석했었어요. 모두 학자, 기자, 방송인에 예술인 등 기념비를 함께 만든 친구들이었어요.”(사이토 주지)

현재는 한국에서 오거나 미야기현에 살고 있는 한국인 참배가 더 많은데, 올해는 3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지바 도시치씨가 받았다는 유묵 반환을 계기로 다이린지에 기념비가 세워지고, 그때부터 시작한 추모법요가 38년이나 이어지고 있지요. 앞서 말했듯이 정치적으로 한·일 관계가 좋지 않은 이때 소중한 민간 차원의 교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어떻게 이런 기념비가 만들어지고, 시대의 풍파도 있었을 텐데 그걸 40여 년이나 유지해 온 것은 어떤 힘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 모든 일을 관여하고 지속해 온 분이 바로 사이토 주지입니다. 그래서 그를 만나 아주 긴 시간(무려 5시간) 인터뷰를 했습니다.  

 

지바 도시치씨가 안중근 의사로부터 받은 유묵의 글로 만든 기념비 ⓒ 이인자 제공


“문화재 반환하는 게 당연”

사이토 주지는 한적하고 자그마한 농촌의 사찰에서 태어났습니다.

“중학교까지는 여기서 생활했지만 센다이(仙臺)제1고등학교를 나와, 도호쿠(東北)대학 문학부에서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 후, 절 관련 문제로 인해 고마자와(駒澤)대학 대학원에 들어간 뒤, 아사히(朝日)신문사에 입사했습니다.”

부모님의 교육열이 높고 그 역시 시골 마을에서 수재로 정평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시골 마을에서 주지스님의 지위는 각별합니다. 많은 사람이 신뢰하고 의지하는 존재입니다. 그의 우수함이 엿보이는 경력을 단카(檀家·장례나 제사 등을 관리해 주는 제도나 절의 신자)들이 자랑스럽게 여겼을 것 같습니다. 그런 그가 안중근 의사 유묵을 반환하는 일에 인연이 된 것은 한 단카의 가족이 도움을 청했기 때문입니다.

“유묵은 지바 도시치의 조카가 가지고 있던 것으로 원래 아버지에게 먼저 상담하셨습니다만 아버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셨기 때문에 그 일이 저에게로 온 것이었죠. 그래서 저는 아사히신문의 동료에게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 후 ‘안중근 선생은 한국에서 현대의 영웅이라 여겨지는 분이다. 그분의 글이라면 문화재일 텐데 반환하는 것이 당연하다’라는 이야기를 듣게 됐습니다.”

‘현대의 영웅’이라는 말을 듣고 그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고 유묵을 돌려주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탄신 100년을 맞이하는 즈음에 반환하고 싶었는데 그해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하는 일이 일어나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사이토 주지는 당시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했는데, 그날이 마침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서 암살된 10월26일이었기 때문에 ‘인연이 있구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후로도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히 그해 12월에 반환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반환 후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갖고 있던 유묵을 내놓은 유가족들이 너무 낙담하고 혼란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지바 가문이나 아사히신문의 관계자 전원이 이야기를 나눠 반환 배경 일화를 기념으로 남기기로 했습니다. 반환 작업을 함께 도왔던 일본 국내의 문학자, 지식인, 정치가 100명을 대상으로 앙케트를 실시해 기념비를 건립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176만 엔 정도 든다고 하여 모인 사람 모두 3000엔 정도 내면 될 거라고 간단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람의 기념비를 세울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고향인 이 지역에서는 120% 반대였다고 합니다. “이 좋은 경내에 왜 그런 것을 세우느냐”며 단카들이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2년에 걸쳐 안중근 의사에 관해 스스로 설명할 수 있도록 공부를 하게 됩니다. 또한 주변의 이해를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1981년 사찰 경내의 가장 좋은 장소에 기념비를 세웁니다. 그때부터 추모행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10여 년간은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합니다. 우익단체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 정도였지만 경찰이 보호해 주고 지역 주민의 비호로 변을 당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38년간 한·일 관계의 곡절에 따라 이런저런 여파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도로변 멀리서 봐도 알 수 있는 큰 안내 이정표를 공공 세금으로 설치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아오고 한류붐으로 한국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는 일본인이 많아진 것이 뒷받침돼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양국의 사이가 나빠지고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워졌다는 뉴스가 나가자 시민의 세금으로 왜 그런 간판을 내걸었느냐는 의제가 국회 질의를 통해 나올 정도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왜 일본에 초대 총리를 저격한 ‘테러리스트’를 기념하는 비석이 있는지 의문이라는 비판은 항상 받고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가 아닌 나라의 독립을 위해 항일투쟁한 청년입니다. 그 점을 마음에 새기고 여러 공격을 받아도 다이린지는 다이린지답게 의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라도 휘청거릴 수 있지요.”

 

다이린지(大林寺)의 사이토 다이켄(藤泰彦) 주지스님 ⓒ 이인자 제공


“안중근 의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다”

그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 근현대사를 공부합니다. 역사만이 아닌 1910년 이전의 국제법까지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는 유묵을 반환하고 2~3년 정도 지난 1980년대 초에 처음으로 한국의 남산에 위치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추도식에 참석합니다. 기념비를 세우고 추도식에 참석하자 진심으로 이 일이 마음에 와 닿게 돼 눈물을 흘리게 됐다고 합니다.

“제가 울었던 것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나도 고생했구나. 힘든 처지를 겪어냈구나’라는 마음. 또 다른 하나는 ‘안중근 선생도 독립투쟁 속에서 정말 고생하셨겠구나’라는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책을 쓸 것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10여 년의 공부를 거듭해 1994년 《내 마음 안의 안중근》이라는 책을 출판합니다. 책의 출판과 동시에 우파도 좌파도 책을 읽고 토론회를 신청해 와 모두 응했다고 합니다. 특히 반기를 들고 싶어 하는 우파들이 너무도 열심히 읽어줘 감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는 토론에서 안중근 의사와 지바 도시치가 가지고 있던 것이 애국심이었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양측 모두 납득하는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40여 년 전, 그가 아니었으면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한국으로 반환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곧은 신념은 물론 주변의 많은 지인과 마을에서의 위상이 도왔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 반환으로 인해 지바 도시치가 품고 있던 감동적인 이야기가 세상에 나왔고 한·일 관계의 굴곡이 있어도 꿋꿋하게 추모식을 이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의 아주 작은 마을 사찰을 지키는 사이토 주지의 40여 년의 활동을 들여다보면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 20돌,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 치유재단 해산 결정 등의 문제들로 폭죽이 터지듯 떠들고 있는 미디어의 뉴스가 훅 하고 불면 날아갈 것같이 가볍게 보입니다. 한·일 관계의 정치적 기복을 가볍게 들이마시면서 그 기류와 관계없이 민간 차원의 교류를 통해 과거에 대한 성의 있는 반성과 삶에 대한 성찰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보면, 그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지바 도시치라는 간수의 존재도 크게 느껴지지만, 그의 의미를 찾아 40여 년을 달려온 사이토 주지가 더없이 크게 느껴집니다. 이런 점들이 일본 민중의 저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사저널 1517호 ‘베 짜기 장인과 나카마’ 기사에서 요네야마 도시나오(米山利直)의 한자는 ‘米山俊直’의 오기이므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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