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은 지금 부패와의 전쟁 중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2.17 11:17
  • 호수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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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인사이트] 北, 부패 수준 세계 최하위…金 “부정부패는 이적 행위” 엄단

대대적인 사정 한파가 연말 평양 권력 중심부에 밀어닥쳤다. 북한 당국이 부정부패를 ‘이적 행위’로까지 규정하면서 강력히 단속할 것임을 공표하고 나선 것이다. 비리 척결을 강조하면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라”고 공안기구들을 독려하고 있다. 여기에 12월10일자 당 기관지 노동신문 1면에 ‘일꾼(간부를 지칭)들은 인민을 위하여 멸사복무하자’는 제목의 사설을 싣는 등 공개적이고 지속적인 캠페인을 벌여나갈 기세다. 사설은 “우리 당은 이미 세도와 관료주의를 우리의 일심단결을 파괴하고 좀먹는 위험한 독소로, 적들을 도와주는 이적 행위로 보고 그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이번 부패척결 지시에서 노동당 간부들의 관료주의와 일하는 자세를 문제 삼고 있다. 또 권세를 부리면서 이권을 챙기는 등의 비리를 저지르는 이른바 ‘세도 행위’에 단속의 중점을 둘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노동신문 사설이 “당 조직들은 일꾼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개인 이기주의, 공명심, 안일해이된 사상관점에 예봉을 돌리고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부패 행위를 뿌리째 들어내기 위한 투쟁을 강도 높이 벌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대목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원산 구두공장을 현지지도하는 모습을 조선중앙통신이 12월3일 보도했다. ⓒ 조선중앙통신 연합

 

현장방문서 관리자 안이한 업무태도 질타

이 같은 움직임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최근 들어 북한의 주요 공장·기업소와 협동농장을 잇달아 현장 방문하는 상황에서 현지 관리와 지배인 등의 안이한 업무태도를 질타한 직후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현장 간부들뿐 아니라 노동당의 핵심부서인 조직지도부 등에 대해서도 일하는 자세를 고치고 반성할 것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엘리트 간부층의 기강을 다잡기 위한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공장·기업소의 부실한 관리 실태를 살펴본 뒤 “마구간 같은 곳에 현대식 기계를 설치해 말아먹고 있다”는 등의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했던 김정은이 노동당과 군부·내각 간부들의 ‘일뽄새’(복무태도를 지칭하는 북한식 표현)를 고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통치가 어렵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사실 당과 군부 간부들에 의한 부정부패와 비리는 이미 북한 사회에 깊이 뿌리내려 조직을 좀먹고 있다는 게 탈북인사들의 전언이다. 만성적인 식량 부족 사태는 군부대에까지 파장이 번져 10년 넘는 장기 군복무를 해야 하는 병사가 영양실조로 복무기간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귀가하는 사태까지 속출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강한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이란 의미의 ‘강영실 동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김정은이 방문한 군부대 세면장엔 ‘칫솔질은 하루 두 번 하되 아침에는 치약 없이, 저녁에는 0.5센티미터’라고 적힌 안내판이 드러나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군대를 면제받거나 편한 보직을 받기 위해 뇌물을 바치는 일이 성행하고 있다. 한 탈북 병사는 “지휘관에게 뇌물을 준 병사의 경우 ‘부탁자’라고 불리며 특별히 대우받는다”고 말했다.

환자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서도 뇌물은 필수적이다. 의사에게 달러나 위안화를 건네야 하는 데다 약품은 장마당에서 따로 사가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은 이중고를 겪고 있다고 한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의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탈북자들의 경우 북한에서 살 때 수입의 20% 정도를 뇌물로 바쳐야 했다고 한다. 장마당에서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는 경우엔 그 비중이 50%에 달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마디로 ‘뇌물공화국’이라 불릴 만한 상황이다. 국제투명성기구(TI)가 지난 7월 발표한 부패지수에서 북한이 조사 대상 180개국 가운데 171위를 한 것도 이런 실태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대북 부처와 전문가 그룹에서는 이런 ‘부정부패와의 전쟁’ 캠페인이 김정은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특히 한 해의 경제 성과를 결산하는 연말에 맞춰 공개적인 비리 간부 퇴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는 건 내년 북한 당국이 대대적인 사정정국에 접어들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김정은 신년사에도 이런 메시지를 담아 당·정·군 간부들에게 경고장을 날릴 것이란 얘기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김정은이 2016년 제시한 경제발전 5개년계획을 2020년 성과리에 마무리하려면 내년이 대단히 중요한데 부정부패가 그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우려가 북한이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된 배경”이라고 말했다. 

 

비리 척결을 공개적으로 강조한 12월1일자 노동신문

 

탈북자들 “북한에서 수입 20%는 뇌물 상납”

대북제재의 지속에 따른 내부 불만을 무마하려는 조치란 분석도 제기된다. 김정은이 올 신년사를 통해 대남·대외 관계 전환을 언급한 뒤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과 한 차례의 북·미 정상회담을 치렀지만 북한 간부층이나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성과는 없는 상황이다. 기대했던 대북제재의 해제도 해를 넘기게 될 전망이다. 대외교역이나 외화벌이 사업을 통해 뇌물을 챙기거나 짭짤한 비공식 수입원을 관리해 오던 당과 군부의 핵심층들도 최근 들어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상황인 김정은식 대남 접근과 대미 외교에 불만을 터트리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대로 상황을 방치하다간 자칫 주민들에게까지 반(反)김정은 정서가 번질 수 있다는 우려에 따라 부정부패 척결 쪽으로 가닥을 잡았을 것이란 얘기다.

김정은 위원장은 후계자 시절이던 2009년 11월말 전격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강화’란 목표가 내걸렸지만 사실은 당과 군부 간부 등 핵심층이 비리로 챙긴 장롱 속 달러와 속칭 ‘돈주’라고 불리는 신흥 부유층 상공인을 겨냥한 조치였다. 하지만 시장과 기득권층의 반발로 실패를 맛봤다. 집권 이듬해인 2013년 12월에는 고모부인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을 전격 처형했다. 반국가 혐의 등이 씌워졌지만 사형 판결문의 상당 부분은 거액의 유로화를 챙긴 혐의와 도박과 여자를 즐긴 대목이 차지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2016년 12월 노동당 초급당위원회에 참석해 “일부 당 일꾼들 속에서 나타나는 부족점들이 우리의 사업 발전을 저해하며 대중 속에서 우리 당의 역할을 약화시키고 있다”며 부정부패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좀처럼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북한 경제 전문가들은 뇌물이 이미 북한 경제를 돌리는 하나의 필수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비공식 유통망인 장마당이 붕괴된 노동당의 배급체계를 대신해 주민들의 민생을 챙기듯 뇌물이 계획경제로 무너진 북한을 먹여 살리고 있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비리와 부정부패는 만성화됐고 삶의 일부가 돼 버린 양상이란 지적도 나온다. 결국 북한 사회와 경제부문에서 ‘부패와의 전쟁’이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생산과 상품공급이 제대로 이뤄지고 유통과 소비가 선순환하는 구조가 가동돼야 한다는 것이다. 비핵화와 대북제재의 해제, 국제기구 등으로부터의 외부 수혈을 통한 경제회생 없이는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지시도 제대로 먹혀들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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