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마약왕》은 왜 이두삼을 주목했나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2.21 09:00
  • 호수 152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화려하게 시작해 공허하게 끝맺은 영화

《마약왕》이 베일을 벗었다. 1970년대, 마약 제조 및 유통으로 부산 바닥을 평정하고 나아가 동아시아를 주름잡던 한 인물의 흥망성쇠를 담은 영화다. 송강호가 주인공 이두삼을 연기하고,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이라는 핸디캡을 안고도 700만 이상의 관객을 모은 흥행작 《내부자들》(2015) 우민호 감독의 차기작으로도 기대를 모았다. 139분의 상영시간 안에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이두삼이 밀수에 손을 대고, 이윽고 마약을 유통하며 승승장구하다 결국 자신의 탐욕으로 인해 몰락하는 서사가 담긴다. 한 인물을 프리즘 삼아 뭘 팔아도 ‘수출이 애국’이던 시대의 밑그림을 그려 나가기도 한다. 《마약왕》의 아이러니는 이러한 기획의 장점과 단점이 동전의 양면으로 붙은 영화라는 데서 발생한다. 장점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들은 곧 같은 이유로 아쉬움이 된다. ※ 본문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우선 떠오르는 작품이 여럿 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에 정착했던 쿠바 출신 남자가 거물 범죄자가 되고, 다시 파멸하는 이야기를 그린 《스카페이스》(1932)가 대표적이다. 1983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 연출, 알 파치노 주연작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마약왕’으로 악명 높은 실존 인물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삶을 다룬 넷플릭스 시리즈 《나르코스》와 영화 《에스코바르》(2018) 등이 연상되는 지점들이 있다. 모든 갱스터 무비의 고전인 《대부》 시리즈의 그림자 역시 아른거린다.

 

영화 《마약왕》의 이두삼 역을 맡은 송강호

 

《마약왕》은 왜 1970년대를 골랐나

《마약왕》은 이 모든 작품들과 닮은 듯 다르다. 애초에 폭력(약)으로 흥한 자가 같은 이유로 몰락하는 서사 구조 자체에 크게 차별점이 존재하긴 어렵다. 폭력과 손을 맞잡은 인물이 탄탄대로인 줄 알고 밟고 선 땅은, 사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위태위태한 지대라는 것만을 제대로 그려내도 성공이다. 다만 공간 배경이 다른 만큼 그 인물이 활약하던 때의 시대 공기를 생생하게 담아내려는 목표는 가질 수 있다. 《마약왕》의 경우 1970년대 유신 정권을 배경으로 그 시대 한국 사회 안에서 활개 치던 이두삼이라는 남자를 바라보려 한다.

반대로 그를 통해 1970년대가 조명되기도 한다. 시대극을 표방한 이상 인물과 시대를 떼어놓는 전개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1980년대 부산을 배경으로 ‘넘버원’이 되려는 인물들의 물고 물리는 생생한 정글을 그렸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2012)와 비교를 피하기 어려운 문제가 필연적으로 생기기도 한다.

영화는 밀수품이 물밀듯 들어오던 1970년대 부산항의 모습을 리듬감 있게 그려내며 시작한다. 소시민 이두삼이 밀수에 손을 대며 지역의 폭력배들과도 하나둘 결탁하는 모습을 통해서다. 부패한 정부 권력과의 느슨한 연줄 하나만 있으면 무슨 짓을 하든 서로 대충 넘기고 눈감아주던 시절의 그늘이다. 결국 《마약왕》이 이 시대를 택할 수밖에 없던 상황은 비교적 명확하다. 폭압적인 정치, 폭력과 결탁한 자본, 압축 성장이라는 삼박자 아래서 살아남아야 했던 개인의 일대기를 그려내기에 이보다 더 드라마틱한 시절은 없다. 영화는 자막을 통해 ‘실제 사건이 아님’을 강조하지만 모티브가 된 것으로 알려진 이황순 사건의 배경 역시 이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약왕》은 시대의 분위기와 인물의 서사가 아주 긴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인상은 남기지 못한다. 마약 유통이 활개를 치던 한편에서는 여공들이 밤을 새워가며 수출 역군으로 일했으며, 새마을운동으로 모두가 잘살아보자고 악을 썼던 시대라는 것을 훑듯이 보여줄 뿐이다. 후반부에는 유신 철폐와 궤를 나란히 하며 무너지는 이두삼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정권과 운명을 같이할 만큼의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개연성도 부족한 편이다.

즉 이 영화는 시대가 낳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기보다는, 상황 판단을 내리는 잔머리가 있고 임기응변에 능하다면 얼마든지 신분 세탁이 가능했던 사람의 성공 스토리가 나오기에 적합한 시대를 선택한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시대 묘사의 빈곤함을 메우는 것은 당시 유행하던 음악들이다. 영화는 김정미의 《바람》, 정훈희의 《안개》를 비롯해 당대를 수놓은 팝송을 다소 전시하듯 사용한다.

 

영화 《마약왕》의 로비스트 김정아(배두나·왼쪽 사진)와 검사 김인구(조정석) ⓒ (주)쇼박스

 

결국 송강호의 원톱 플레이

극 중 이두삼과 연결되는 인물들은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다. 힘 있는 연줄 하나가 없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평생 품고 살았던 그가 돈과 더 높은 곳을 향한 욕망을 불태우면서, 인물 구조는 한층 복잡해진다. 주변에는 정말 다양한 인물이 배치된다. 두삼에게서 뭔가 냄새를 맡고 그를 추적하는 검사 김인구(조정석), 두삼의 아내 숙경(김소진)과 사촌동생 두환(김대명), 처음으로 두삼의 연줄이 되는 최부장(이희준), 거물 폭력배 조성강(조우진), 두삼과 내연관계에 놓이게 되는 로비스트 김정아(배두나), 마약 제조법을 알려주는 백 선생(김홍파) 등이다. 각 인물의 면면을 보면 흥미롭긴 하다.

문제는 이렇게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함에도 《마약왕》이 결국 이두삼의 원톱 플레이로 수렴된다는 점이다. 영화는 주변 인물들이 이두삼에게 어떤 영향을 준 존재였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실패한다. 바꿔 말하면 이들의 등장 자체를 걷어내거나 설정을 바꾸더라도 이두삼의 캐릭터에는 크게 변화가 없다는 얘기다. 각 인물과의 상호작용이 그만큼 적어서다. 감독은 전작인 《내부자들》에서 검사, 정치깡패, 언론인이 팽팽하게 주고받는 카운터펀치로 긴장을 만들어가던 방식과는 정반대의 노선을 걷는다.

넉살 좋은 소시민과 갱스터, 그 어디쯤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이두삼의 캐릭터는 처음부터 조금 모호하다. 특히 그는 수많은 인물들을 만나고 몇몇 사건을 겪으면서 중요한 변곡점 몇 개를 맞이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보면 이전과 이후의 이두삼 캐릭터에서는 실제로 그다지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시간 순의 변화로 읽힌다. 대신 영화는 모호한 캐릭터의 방향성을 배우의 연기로 메우려 한다. 이 때문에 개별 숏들을 보면 그 자체로는 문제가 없지만, 하나의 신(scene)과 나아가 시퀀스, 더 나아가 영화 전체로 보면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급기야 영화는 이두삼의 몰락을 그리는 대목에서 돌연 그의 내면으로 들어간다. 그의 주변을 맴돌던 수많은 캐릭터들은 거의 모두 사라진 뒤다. 후반부 30분 정도는 덩그러니 남겨진 이두삼이 폐허가 된 자신만의 왕국에서 홀로 발악하듯 버티는 과정이다. 당연히 원맨쇼에 버금가는 송강호의 연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약에 취하고 불안에 취한 인물을 연기하는 송강호의 연기는 무시무시하지만, 목적성이 명확하지 않은 그 열연은 어딘가 공허해 보인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