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의 품격을 가진 이우(易武) 지역 보이차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03 17:38
  • 호수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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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Tea Road] 청나라 옹정황제에 진상되며 황실공차 지정

중국 이우(易武) 지역의 보이차(普洱茶)는 청나라 옹정황제(雍正皇帝)에게 1729년 처음 진상되면서 황실공차(皇室貢茶)로 지정됐다. 차마고도(茶馬高道)의 시발점이기도 한 이우고진(易武古鎭)은 6대 차산에서 생산한 차의 집산지였다. 다이(傣)족 발음을 한자로 음차(音借)한 ‘이우’는 ‘미녀 뱀이 사는 곳’이라는 뜻이다. 스핑(石屛)의 한족들이 명나라 때 이주해 차를 만들었던 이우는 윈난(雲南)의 다른 차산과 달리 소수민족과 한족 문화가 공존해 왔다.

이우는 노차(老茶) 중에서도 최상위 등급인 골동급(骨董級) 노차의 고향이다. 마시는 골동품으로 알려진 호급차(號級茶) 대부분이 100여 개가 넘는 이우의 차장(茶莊)에서 만들어졌었다. 공차(貢茶)제도가 사라진 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절까지 생산된 보이차의 이름이 대부분 호(號)로 끝나기에 호급차로 부르는 진품은 한 편에 수억원을 호가한다. 최근 홍콩 경매장에 나온 송빙호(宋聘號)와 생산시기가 1920년대로 추정되는 양빙호(楊聘號)는 2억7000만원과 3억원에 각각 낙찰됐다.

보이차 박물관 ⓒ 서영수 제공
보이차 박물관 ⓒ 서영수 제공

이우는 최상급인 ‘골동급’ 노차의 고향

이우의 유명한 차장들은 농업 집단화와 함께 개인상점을 인정하지 않았던 마오쩌둥(毛澤東) 시대를 거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식량증가와 생산성만 강조한 대약진운동은 차나무를 마구 베어낸 자리에 옥수수를 심어버렸다. 당시의 차 가격은 동일 중량의 옥수수보다 비싸지 않았다 한다. 전통문화를 부인하며 공자마저 인정하지 않던 문화대혁명은 나이 어린 홍위병을 앞세워 보이차 장인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홍위병은 집 안과 창고에 남아 있던 보이차를 자본주의 자산으로 치부해 불태웠다. 전통 보이차의 흑역사가 진행되며 이우의 명성도 잊혀졌다. 

이우는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 정책 초기에도 엄동설한이었다. 지방정부 차원에서 차 산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해도 차산은 황무지처럼 방치돼 있었다. 보이차 제조기술을 가진 인력이 이우에는 이미 없었다. 제조 기술자였던 사람도 문화대혁명 시절 홍위병을 생각하면 선뜻 나서지 못했다. 신(新)6대 차산의 맹주, 멍하이(勐海)로 넘어간 보이차 생산의 주도권을 찾아오기는 요원했다. 이우의 전통과 명성을 부활시키는 행운의 봄바람은 뜻밖에도 대만에서 불어왔다.

이우를 찾아온 대만의 차상을 반기는 이우향장 장이(張毅)는 호급차 제조기술을 보유한 장인을 어렵게 찾아내서 전통 제작기법으로 만든 정통 보이차를 만들었다. 수십 년 전 이우의 차를 가져간 추억이 있던 홍콩에서도 이 소식을 알고 주문이 들어왔다. 보이차 조공행렬을 재현한 ‘관마대도(官馬大道)’ 행사가 중국 CCTV의 협조로 2006년 4월2일 이우고진에서 열렸다. 9개 성, 3개 시, 76개 현을 거쳐 1만2000km를 말과 사람이 함께 걸어 베이징에 도착했다. 말과 사람이 모두 지쳐서 행사가 길어지는 바람에 비용은 초과됐지만, 보이차를 중국 전역에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는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성공했다.

이우의 차 산업이 다시 꽃피우게 되는 재미난 일이 때마침 벌어졌다. 150여 년 전 청나라 황실에 공차로 바쳐진 보이차의 한 종류인 금과공차(金瓜貢茶)가 자금성(紫禁城) 지하창고에서 온전한 형태로 발견됐다. 자금성에 함께 보관됐던 다른 종류의 차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보이차만 유일하게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수용단(萬壽龍團)이라고 이름 붙여진 노차는 보이차태상황으로 모셔져 일반에 공개됐다. 중국 언론의 집중 관심을 받은 보이차는 신비한 차로 다시 주목받았다. 공차의 시발점이자 노차의 고향인 이우의 차 산업이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이우는 밀려오는 차상들과 넘치는 관광객들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고 있다. 중국 서남쪽 끝에 있는 윈난성에서도 가장 남쪽에 위치한 시상반나(西雙版納)의 주도(州都) 징훙(景洪)에서 자동차로 3시간 정도 달려 이우에 도착했다. 보이차로 빛나는 시절을 재연하고 있는 이우는 이동거리도 짧고 대부분 포장도로이기에 다른 보이차 산지보다 찾아가기 편하다. ‘관마대도’ 행사 기념비가 있는 언덕과 초등학교 사이에 남아 있는 이우의 옛 마을은 가옥과 길은 잘 보존돼 있지만, 전통과 맥을 제대로 이어오는 이우의 후손은 많지 않다. 갑자기 불어온 보이차 붐에 편승해 보이차와 전혀 무관하게 살아오던 후손이 이름만 유명무실하게 남아 있던 상호로 뜬금없이 보이차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

이우에서 만들어지는 보이차는 대형 차장에서 제조하는 기계식 공정이 아닌 전통 수공 방식으로 제다(製茶)해 전통석모압병(傳統石模壓餠) 방식으로 차를 만드는 곳이 많다. 영화관이었던 단독건물을 개조해 보이차 제조와 건조 창고로 사용하는 지인을 만났다. 산 높고 물 맑은 청정지역답게 밭이 아닌 산속에서 채취한 귀한 나물과 버섯으로 가득한 식탁 위의, 방목해서 키워 지방이 껌처럼 쫄깃한 돼지고기 수육과 민물생선 양념구이가 침샘을 자극했다. 대나무를 갉아먹고 사는 차 벌레를 튀긴 특식요리는 보기엔 엽기적이었지만 아삭한 식감이 새우깡보다 맛있었다. 자리를 차실로 옮겨 그가 만든 이우의 고수차를 마셨다. 이우 특유의 부드러운 풍미와 단아함을 가득 품고 있는 고수차를 시음하더니, 동행한 중국인 지인들도 감탄사를 연발하며 황후의 맛을 즐겼다.

보이차의 모양을 잡아가는 기술자 ⓒ 서영수 제공
보이차의 모양을 잡아가는 기술자 ⓒ 서영수 제공

넘치는 관광객으로 ‘제2의 전성기’ 맞은 이우

이우보다 먼저 차산지로 인정받았던 만사(漫撒)와 만라(曼腊)는 화재와 민란으로 차산 관리가 어려워지면서 1728년부터 이우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보이부지(普洱府志) 기록을 보면 당시 보이차는 금값의 두 배를 줘야 살 수 있다고 적혀 있다. 황후가 아니면 마실 수 없을 정도의 사치품이었다. 이우의 보이차는 흔히 이우 정산(正山)차로 통용된다. 정산은 특정한 산의 이름이 아니다. 이우와 만사 그리고 만라를 아우르는, 무려 9240만㎡에 달하는 여러 산줄기에서 나오는 차를 정산차에 포함시킨다. 해발 700m에서 2000m에 이르는 이 지역의 고수차 생산량만 90톤에 육박한다. 

이우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중국보이차고6대차산문화박물관’을 관리인의 안내로 둘러보고 신시가지로 변하고 있는 이우거리를 지나 보이차의 모료가 되는 마오차(毛茶)를 연도별로 보관하고 있는 차 창고를 찾았다. 창고 책임자의 안내로 생산시기와 마을에 따라 분류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고수차를 만나보는 호사를 누렸다. 이우 정산이라는 막연한 이름보다 구체적인 마을 이름이 명시된 차를 선택하면 좋은 차를 선별하는 지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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