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이 2019년 한국에 주는 교훈
  • 정대영 송현경제연구소 소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03 08:16
  • 호수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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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IMF 이후 한국 경제 양극화…“한시현 팀장 같은 정책당국자 절실”

1997년 IMF 사태를 영화화한 《국가부도의 날》을 보았다. 영화는 화려한 액션이나 컴퓨터그래픽이 없음에도 큰 관심을 받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22년 전 일이지만 지금의 한국에 유효한 메시지를 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기에 베팅을 해 큰돈을 번 윤정학의 말 “정책당국의 무능”, 온갖 고생 끝에 살아남은 갑수가 영화 후반기 아들에게 하는 말 “누구도 믿지 말라”는 생생한 눈앞의 현실이다. 영화 속의 한국은행 한시현 팀장은 국민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지만, 당시 한국은행에는 통화정책팀이 없었고 한시현 팀장 같은 사람도 없었다. 몇 가지를 제외하고 영화의 전체 흐름은 사실과 거의 부합한다. 국민을 끝까지 속였던 재정국 차관과 금융실장은 각각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에서 금융감독위원장과 경제부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현실에 없었던 한시현 팀장을 만든 것은 영화의 대립구도를 위해서겠지만, 한국의 정책당국에도 깨어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말하기 위함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한시현 팀장과 같은 사람은 영화처럼 중간에 옷을 벗어야 한다. 계속 살아남아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은 천운을 타고나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정책 담당자들이 한시현 팀장과 같은 생각은 할지 몰라도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다. IMF 사태는 경제의 6·25 사변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큰 고통을 주었고 후유증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간단히 정리해 보자.

1997년 IMF 사태를 영화화한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1997년 IMF 사태를 영화화한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경제의 6·25 사변이었던 IMF 사태

IMF 사태는 외환위기와 은행위기가 결합된 심각한 금융위기였다. 거의 모든 금융위기의 이면에는 과다부채가 있다. IMF 사태도 예외는 아니다. 과다 차입에 의한 대기업들의 무리한 투자와 금융기관들의 위험관리 실패가 1차 원인이다. 1996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투자비중은 36%로 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했고, 기업의 수익성과 현금흐름은 나빠졌다. 은행은 사업성보다는 기업의 규모나 권력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대출을 결정했다. 여기에다 경상수지, 물가, 환율 등 거시경제의 불균형도 심각했다. 1996년에는 경상수지 적자가 230억 달러로 GDP의 4.1%에 달했다. 소비자물가는 연 5% 정도 상승했다. 원화의 가치가 떨어져야 했으나 환율은 비정상적으로 안정세를 유지했다. 1997년 IMF 사태가 터지기 직전까지 정책당국자들이 수없이 이야기했던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튼튼하지 못했다. 정책당국자들은 무능했을 뿐 아니라 정직하지도 못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호경기 속에서 한국과 대만, 홍콩, 싱가포르는 아시아의 4마리 용으로 불렸다. 주변에 있던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경제도 덩달아 좋아졌다. 많은 외국인 투자가 몰려 호황이 장기화됐다. 1996년경부터 외국인 투자자들은 차입자인 기업과 금융기관의 상환능력을 의심해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고, 1997년 들어 태국, 인도네시아 등에서 먼저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한국은 1997년 1월 한보의 부도를 시작으로 4월 진로, 5월 대농·삼미·기아 등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했다. 이미 2월에 일본계 금융기관은 한국에 대한 만기 연장과 신규 대출을 제한했다. 신용평가사들은 1997년 4월부터 한국 금융기관과 국가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외환위기의 조짐이 나타난 것이다.

1997년 8월 국제금융과 위험관리 능력이 전혀 없던 종합금융사들이 먼저 외화유동성 부족사태에 빠졌다. 이어 은행들도 외화조달이 불가능해져, 대부분의 금융기관이 한국은행의 외환보유액 지원으로 버티게 됐다. 외환보유액은 빠르게 감소해 1997년 11월에는 국가부도 상황에 빠지게 됐다. 영화 내용대로 11월16일에는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비밀리 방한하고, 정부는 11월21일 공식적으로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 12월3일 IMF와 자금지원 협약을 체결해 IMF 체제가 시작됐다.

세상에 공짜 점심이 없듯이, IMF의 지원도 많은 조건이 있었다. 첫째는 강력한 통화 재정의 긴축과 고금리 고환율 정책이었다. 둘째는 조속하고 과감한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 셋째는 무역 외환의 자유화와 금융시장 개방, 넷째는 회계기준과 금융감독 기준을 국제모범 기준에 맞추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의 중요 정책인 광범위한 부동산 부양은 한국 정부가 스스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위기 극복을 위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겪고 다른 나라의 사례를 보니 당연하지 않았다.

무책임했던 고금리 정책

미국, 유럽 등은 한국과 반대로 재정위기를 초래할 정도로 재정지출을 늘렸고, 정책금리는 제로 수준으로 낮췄다. 1997년 말에서 1998년 초에 있었던 한국의 고금리는 살인적이어서 멀쩡한 기업까지 수없이 도산했다. 고금리 정책은 환부의 몇 배까지 도려내는 무책임한 돌팔이 의사의 수술법이었다. 환율은 1996년 말 844원에서 1997년 12월24일 1965원까지 상승했다. 수출기업은 부실해도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원자재를 수입하는 많은 기업이 도산했다.

한국은 2001년 8월23일 IMF 자금을 전액 상환함으로써 IMF 체제를 벗어났다. 위기 극복 과정에서 일부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지만 부정적 효과도 컸다. 한국 경제는 1997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오게 됐다.

가장 부정적 영향은 국민경제의 여러 부문에서 진행된 심각한 양극화다. 대기업과 금융기관의 경영진, 관료와 의사와 교수, 공기업 공무원과 대기업 정규직 등 좋은 직업과 그렇지 못한 직업 간의 보상 격차가 엄청나게 커졌다. 기업 부문에서도 대기업과 ICT기업, 수출기업 등은 좋아지고 중소기업과 내수기업 등은 상대적으로 위축됐다. 수도권과 지방, 부동산 보유자와 미보유자 간의 격차도 커졌다. 이렇게 양극화가 심화된 것은 구조조정의 칼날이 노동자와 중소기업 등 약자에게만 집중되고, 관료나 의사, 교수, 부동산 보유자 등에 대한 특혜가 계속됐기 때문이다. 양극화와 함께 금융 부문의 과도한 개방에 따른 경제 불안정, 경제주체의 보수화 등의 부작용도 상당하다.

마지막으로 IMF 사태의 교훈은 영화 속에 많이 녹아 있다. 위기를 잘 이용했던 소수와 거짓말을 했던 정책당국자는 승승장구하고 있다. 금 모으기 운동을 하고 정리해고를 순순히 받아들였던 다수 국민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괜찮은 일자리 부족과 저성장 기조 고착, 소득 불평등, 비싼 집값과 집세, 급속한 고령화와 저출산 등 한국 경제의 난제는 누적되고 있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여전히 무능하고 믿을 수 없다. 한시현 팀장과 같이 능력 있고 국민을 생각하는 정책당국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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