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사자뿐 아니라 그 ‘곁’의 고통도 살펴라”
  • 조철 북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13 10:00
  • 호수 1526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펴낸 사회학자 엄기호씨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을 억눌러왔다. 고통은 부끄러운 것이고 고통을 말하는 것은 나약한 짓이라고 비난했다.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들은 그것을 감추려 했지 고통을 드러내며 이에 대한 언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고통을 겪는 이들은 ‘언어 없음’의 상황에서 더 극심한 고통을 당했다. 그러나 이제 고통을 겪는 이들이 고통이 없는 것은 ‘정상 상태’가 아니라고, 고통은 늘 상존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기초 값이 바뀌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것은 좋은 전환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모여 우리 사회가 고통을 외면하고 고통을 겪는 이를 억압하거나 사회적 공간에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고통에 대해 듣고 응답할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단속사회》 등을 펴내며 주목을 받은 사회학자 엄기호씨가 최근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펴냈다. 이 책에서 엄씨는 “지금 우리가 ‘고통을 겪는 이들이 고통을 드러내기 시작한 상황’을 잘 다뤄내고 있는 것일까”라고 반문한다.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전시하면서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통을 겪는 이들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그들의 곁을 지키는 이들조차 함께 무너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고민처럼 개인의 고통을 개인의 문제를 넘어 그 곁에서 고통을 덜어주려는 이를 포함한 공동체의 문제로 확장해 들여다보는 시도여서 눈길을 끈다. ‘고통의 사회학’이라 할 만하다.

“고통을 ‘마주 대하는 것’이 나에게 문제가 되기 시작한 것은 국제 인권운동을 하면서부터였다. 인권이란 늘 피해자를 만나고 그들의 고통을 다루는 일이었다. 어디를 가나 피해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그들이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그 울음 앞에서 모두가 침묵하는 장면이었다. (중략) 그 침묵의 순간에는 짧은 시간이나마 강한 유대와 공감의 공기가 흘렀다.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말을 뛰어넘어 사람들을 교감하고 연대하게 했다. 고통의 힘이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펴냄 | 304쪽 | 1만6500원 ⓒ 이관형 제공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엄기호 지음 | 나무연필 펴냄 | 304쪽 | 1만6500원 ⓒ 이관형 제공

“고통의 곁, 그 곁에 곁을 구축하는 것이 관건”

엄씨는 고통의 당사자가 고통을 명료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기만을 경계하되 고통을 말할 필요가 없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장벽과도 맞서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에 대해 말하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치부하면서 자신의 ‘곁’을 밀어내지 말고 한 번 더 돌아보라고 말한다. 불가능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불가능과 대면하고 싸움으로써 고통을 기록하고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자가 되려면 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바깥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면 역전된 나르시시즘이 생긴다. 나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만 너무 불쌍하게 바라보게 되니까. 나만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결국 자신을 죽여버린다. 그래서 곁, 바깥이 있다는 걸 의식하고 사는 게 중요하다. 바깥을 의식하게 하는 ‘곁’이 있으면 고통에 함몰돼 있어도 한 번씩 주변을 바라볼 수 있으니까. 내가 지켜야 할 곁이 있을 때,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생각하면서 나를 찾아갈 수 있다.”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는 고통에 대한 2인칭 이야기다. 엄씨는 고통을 겪는 이를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은 동행을 모른다. 동행은 그 곁을 지키는 이의 곁에서 이뤄진다. 그러므로 고통을 겪는 이가 자기 고통의 곁에 서게 될 때 비로소 그 곁에 선 이의 위치는 고통의 곁의 곁이 된다. 이렇게 고통의 곁에서 그 곁의 곁이 되는 것, 그것이 고통의 곁을 지킨 이의 가장 큰 기쁨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고통의 곁에 선 이는 고통을 겪는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반대로 말하면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이에게 곁이 있을 때, 그 곁을 지키는 이는 이 기약 없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관건은 고통의 곁, 그 곁에 곁을 구축하는 것이다.” 

엄씨는 우리 사회가 오로지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 비참의 전시를 통해서만 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데 개탄한다. 사회적으로 잊힌 존재가 되어버리면 고통을 겪으면서도 존재감이 전혀 없는 유령이 돼 이 사회를 배회하게 된다. 이 유령들이 죽었을 때만 오로지 그 존재를 눈치채는 잔인한 사회라는 것이다. 


“고통의 비참함에만 주목하는 사회가 문제”

“유령이 되지 않으려면 고통의 참담함과 비참함을 강조하고 전시해야 한다. 고통을 당하고서 그것을 보여주는 사람으로서만 겨우 사회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다. 이게 이 사회의 정치이자 경제가 됐다. 더구나 이것이 사랑과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더욱 불길하다. 사회적으로 존재하기 위해 자기의 고통을 전시하며 주문을 외우는 동안 곁은 빠르게 파괴된다. 대신 고통의 곁에 선 이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가만히 있어 주기를 기대한다. 심지어 이것은 ‘비를 맞는 이에게 가장 좋은 사람은 같이 비를 맞는 사람’이라는 말로 윤리화되고 미학화돼 있다.” 

엄씨가 ‘사회’라는 말로 기대하는 것은 그 반대다. 고통을 겪는 이를 지원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다. 

“고통의 곁에 선 이가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약 버틸 수 없을 때 안전하게 물러날 수 있어야 한다. 물러남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지 않도록 고통을 겪는 이를 돌볼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곁에 선 이가 ‘독박’을 쓰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의 삶이 파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게 사회의 역할이다.” 

관련기사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