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바보’ 되는 날…2초도 못 보는 선수 기다리며 2시간 응원”
  • 이인자 일본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1.24 17:00
  • 호수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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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설 연휴 ‘역전마라톤’ 응원하는 사람들
“바보가 된 자신을 즐기는 게 행복”

“2초도 못 보는 선수를 2시간 전부터 모여 응원가를 부르면서 기다려요.”

1월3일 설 연휴 중인 이른 아침, 붐비는 도쿄역에서 긴바라 하루오(金原春治·79)씨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차림으로 나타나 말합니다. 풍성하게 주름 잡힌 울 재질의 진한 자주색 베레모에, 같은 색으로 상체를 폭 싸듯이 입은 캐시미어 점퍼 차림이 좀 특이하게 보였습니다. 설 연휴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번잡한 도쿄(東京)역에서 그 정도 차림이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효과는 있었지요. 보기에 따라 약간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그 차림은 와세다(早稻田)대학 컬러를 의식한 의상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1월2일부터 3일까지 열리는 하코네(箱根) 에키덴(驛傳·역전마라톤)은 설 연휴 이벤트로 아주 유명합니다. 간토(關東) 학생육상경기연맹과 요미우리(讀賣)신문사가 공동주최하고 있습니다. 역사도 길지요. 1920년부터 시작해 전쟁 중 몇 차례 못 치러지기는 했지만 올해로 95회를 맞이한 장수 경주경기입니다. 

1987년부터 이틀 내내 TV 생중계를 하고 있는데 시청률이 25~30%나 된다고 합니다. 도쿄 요미우리 본사 앞에서 출발해 관광지로도 유명한 하코네까지 가는 게 첫날 경기입니다. 둘째 날은 첫날 순서와 시차를 그대로 적용해 왔던 길을 돌아갑니다. 이 모습은 아침 7시부터 오후 2시 넘어서까지 전국방송으로 전해집니다. 첫날 시합을 마치면 다음 날 시합을 점치며 뉴스의 머리를 장식합니다. 마치면 마친 대로 승리 요인을, 전년도의 승자가 패하면 패인에 대한 원인을 편성해 여러 방송국에서 내보냅니다. 

14시간에 걸쳐 내보내는 생중계는 경기 모습만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선수 개인, 가족, 함께 뛰는 멤버와의 여러 스토리를 섞어 내보냅니다. 보고 있으면 감정이입이 돼 누군가를 응원하고 있기 쉽지요. 또한 271.1km나 되는 각각 특색 있는 거리를 10명이 편이 돼 뛰는 릴레이이기에 그들의 협동심에 감동받기 일쑤입니다. 당연하지만 관중은 안방에서 관전하는 사람뿐만이 아닙니다. 편도 135km나 되는 가두(街頭)에서 응원하는 사람만 이틀 동안 1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설 명절에 말입니다. 더 놀라운 대목은 참가 대학 출신자들이 새해 벽두부터 모여 응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역전마라톤 선수가 지나가는 가두에서 선수를 기다리며 응원하는 일본인들 ⓒ 이인자 제공
역전마라톤 선수가 지나가는 가두에서 선수를 기다리며 응원하는 일본인들 ⓒ 이인자 제공

동창회 등록된 것만 1370개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의 명문 사립대로 알려진 와세다대학 응원단 이야기입니다. 신년회를 겸한 졸업생의 응원 장소는 졸업생이 이사장으로 있다는 여자고등학교 교내 카페였습니다. 마침 이 학교는 선수들이 지나가는 도로에 접해 있었기에 아주 적격이었지요. 선수가 그 도로를 지날 예정 시간보다 2시간 이상 전에 도착했는데 이미 50여 명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단정해 보이는 여고 카페에 뷔페식 식사와 누군가 기부한 술과 음료가 즐비하게 차려져 있었습니다. 원형 테이블에 자유롭게 앉아 담소하면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생중계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날 모인 사람들은 도쿄 시나가와(品川)구에 살고 있는 와세다대학 출신자거나 그 배우자였습니다. 올해 수시합격을 내정받았다며 할아버지를 따라온 입학예정자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10대부터 80대까지 70여 명이 참석해 응원을 시작한 것입니다. 참고로 와세다대학 동창회를 도몬카이(稻門會)라고 부릅니다. 1885년에 탄생해 현재 국내 동창이 63만 명이고 유학생 출신의 외국 동창생도 1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동창회는 세분화돼 지역, 부(部)활동, 직업, 졸업연도, 학부, 지도교수 등등 다양해 대학에 등록된 것만 1370여 개라고 합니다. 

어제와 오늘 역전마라톤 응원을 위해 모이는 지역 동창회가 50곳이나 된다고 합니다. 선수가 지나가는 가두에서 응원하는 경우도 있고, 1박2일로 하코네 여행을 겸한 응원단도 있다고 합니다. 마라톤 도로에 접한 지역 동창회는 어떤 형태로든 응원을 한다고 했습니다. 

도착 후 20여 분이 지난 후 교가와 응원가를 응원단장의 독특한 제스처와 구령에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신참도 고참도 연령도 성별도 상관없이 모두 어깨동무를 하거나 오른손을 들고 하늘을 향해 내지르며 목청이 터져라 노래를 부릅니다. 전날 성적이 미진하지만 내년에 예선 없이 참가자격이 주어지는 10위 이내를 목표로 응원하자고 40대의 응원단장은 열을 올립니다. 

“난 고등학교부터 와세다를 다녔기에 올해로 68년이나 이 응원가를 부르고 있어요. 부르고 있자면 청춘으로 돌아가요.” 옆에서 휠체어에 몸을 실은 80대로 보이는 분이 나지막하게 말해 줍니다. 그는 동창회 멤버인 딸의 도움을 받아 참석했다고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2대, 3대에 걸쳐 참석한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우리 아들은 게이오(慶應)대학에 갔어요. 그래서 문화도 다르고 축구나 럭비시합 때 같이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요.” 같은 테이블에 앉은 50대 남성이 이렇게 말하자, 다른 분들도 손주가 게이오대학이라 별로 재미가 없다며 맞장구를 쳐줍니다.


“감바레! 감바레! 아! 아악!”

1시간 남짓 교가며 응원가를 부르면서 대형 모니터를 보고 있자니 1시간 후 선수가 도착한다며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학교 정문을 나서면 선수가 지나가는 도로 앞 인도입니다. 학교 현관은 인도에서 3계단을 올라 5m도 안 되는 곳에 있습니다. 이 인도와 연결된 계단에 시나가와 도몬카이 사람들이 정렬합니다. 이미 인도와 도로의 경계지대는 응원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실내에는 동창회 사람들만 있었지만 밖으로 나서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모두 힘차게 노래합니다. 80대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그리고 요조숙녀처럼 예쁘게 차려입은 미혼의 여성도, 마담처럼 꾸민 중년부인도 모두 깃발을 들거나 흔들면서 얼굴을 망가뜨릴 정도로 열심히 노래합니다. 

그렇게 연속적으로 노래를 부르다 한순간 그 주변이 얼어붙은 듯 움직임이 멈추는가 싶더니 “감바레(파이팅)! 감바레! 아! 아악!”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집니다. 선두주자가 지나간 것입니다. 정말 한순간이었습니다. 그렇게 선수가 지나갈 때마다 거리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은 괴성을 지릅니다. 

10명 이상 선수를 보낸 뒤 “오자와! 오자와! 오자와!”라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터집니다. 와세다대 선수입니다. 선수가 달릴 때 가장 힘을 받는 게 자기 이름을 불러줄 때라고 합니다. 오자와(小澤)라는 선수가 이 구간을 달린다는 걸 미리 알고 실내에서 연습도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가 나타나자 실내에서 연습할 때와 달리 절규에 가까운 소리를 냅니다. 이 또한 한순간이었습니다. 가두 응원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다시 카페로 돌아가 자리에 앉습니다. 그 짧은 시간을 응원하기 위해 2시간 이상 전에 모여 교가와 응원가를 부르고 추운 겨울날 밖에 나가 1시간이나 선수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오늘은 ‘바보’가 되는 날이지요.  2초도 못 보는 선수를 기다리면서 2시간이나 응원을 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바보가 된 자신을 즐기는 게 행복합니다.” 안내해 준 긴바라씨의 말입니다. 이렇게 맞이한 신년이 각별하고 그래야 신년을 맞이한 느낌이 든다는 듯. 

저는 센다이로 돌아오는 신칸센 안에서 “시작이 반이란 우리 속담이 있는데 이들을 보면 시작이 끝없이 이어지는 입구인지도 모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뭔가 시작하고 그게 의미가 있다고 느끼거나 그렇게 해야 한다고 여기면 신체감각이 오랫동안 기억할 정도로 이어가는 속성을 본 느낌입니다.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 첨언하면, 하고 싶지 않은데 상황에 따라, 아니면 상대의 힘에 의해 시작된 것들은 아무리 긴 시간이 지나도 고쳐놓거나 폐지시키는 습성도 있습니다. 다음엔 그런 점에 대해 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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