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만에 용틀임 중인 기낙(基諾)의 보이차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2.01 11:00
  • 호수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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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Tea Road] 중국 최후 소수민족 기낙족, 쇠퇴일로 걷다 뒤늦게 기사회생

기낙(基諾)은 청나라 보이부(普府)에 소속된 고(古) 6대 차산 중 으뜸이었다. 생산량도 많고 차(茶) 품질이 좋은 만큼, 유명 차산지에서도 기낙 지역 찻잎을 가져다 가공했다. 제갈공명(諸葛孔明·181~234)이 차를 전파했다는 설화가 있는 공명산이 바로 기낙산이다. 기낙의 당시 이름은 유락(悠樂)이었다. 명나라 말기부터 전성기를 누렸던 기낙의 차산은 청나라 때 민란과 화재, 전염병까지 덮치면서 황폐해졌다. 그 후 300년 동안 쇠퇴일로를 걷던 기낙이 보이차 열풍에 힘입어 기사회생하고 있다. 

매년 2월6일부터 사흘 동안 열리는 기낙족 전통 축제에서 대고무를 추고 있는 모습 ⓒ
매년 2월6일부터 사흘 동안 열리는 기낙족 전통 축제에서 대고무를 추고 있는 모습 ⓒ

청나라 때 민란과 화재로 차산 황폐화

기낙산 자락에 흩어져 있는 40여 개 촌락으로 이뤄진 기낙족향은 운남성(雲南省) 서쌍판납태족자치주(西雙版納族自治州)의 주도인 경홍시(景洪市)에서 동북 방향 24km에 위치한다. 동서길이가 75km인 기낙산은 남북 사이도 50km가 넘지만 도로망이 촘촘히 발달해 사통팔달로 산길이 연계되며 도로 포장률도 산골답지 않게 60%에 육박한다. 기낙산은 해발고도가 575m부터 시작해 높은 지대는 1691m에 달해 일교차가 큰 산악지대 기후 특성을 갖고 있다. 최고기온은 40도를 넘나들고 연평균기온은 20도로 아열대 기후에 속한다. 연 강수량은 1400mm로 풍부하다.

기낙족향은 인구 1만8000여 명 중 97%가 기낙족이다. 기낙족은 1979년 중국국무원이 공식 인정한 마지막 소수민족으로 등재됐다. 한장어계(漢藏語系) 장면어족(藏緬語族)에 속하는 기낙족은 언어는 있지만 문자가 없어 민족에 대한 고대자료가 없다. ‘후손에게 자랑스러운 어른’이라는 뜻을 가진 소수민족 ‘기낙’은 원시 씨족사회 흔적이 남아 있어 장손을 중심으로 대가족이 공동체를 이뤄 거주한다. 부친이 돌아가시면 1년 후에 새집을 지어 자녀들이 돌아가신 아버지께 신축한 집을 바치는 ‘상신방(上新房)’이라는 독특한 의식을 한다. 

기낙족은 매년 2월6일부터 사흘 동안 ‘특무극(特懋克)’이라는 전통 축제를 벌인다. 태양을 상징하는 커다란 북을 마을 한가운데 매달아놓고 북을 두드리며 춤추는 대고무(大鼓舞)를 필두로 죽간무(竹竿舞)와 파종무(播舞)를 추며 음식을 나눈다. 여자들은 방직기술과 자수 솜씨를 겨루며 풍성한 한 해를 기원한다. 제갈공명이 촉나라로 회군할 때 따라가지 않고 차를 재배하며 기낙족과 동화된 병사들의 후예를 주락족(落族)으로 세분하기도 한다.  

기낙족은 제갈공명을 차를 전파해 준 차신으로 믿고 있다. 제갈공명이 구리로 만든 커다란 징을 남겨뒀다고 알려진 기낙산을 공명산으로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낙족은 음력 7월23일 제갈공명이 태어난 날에 맞춰 봄에 딴 첫 찻잎을 바치고 공명등(孔明燈)을 걸어놓는 ‘차조회(茶祖會)’를 매년 이어간다. 외지인들이 원주민을 속이고 사기도박으로 차산을 빼앗자 화가 난 토착민들이 차산에 불을 지르고 유혈충돌이 벌어졌을 때 제갈공명이 화해시켰다는 설화도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구전돼 오는 곳이 기낙이다.

기낙족은 숯불로 찻잎을 구워 끓여 마시는 화소차(火燒茶)라는 특이한 전통차 제조기법과 량반차(凉拌茶)라는 원시 형태의 차 섭취 풍습이 있다. 량반차는 찻잎을 기름과 간장으로 버무려 나물로 먹는 음식이다. 찻잎을 죽통 안에 다져넣어 숯불로 열을 가해 만드는 죽통차(竹筒茶)와 찻잎을 달이고 졸여 검고 끈적한 상태로 만든 차고(茶膏)는 특화된 기낙족 산물이다. 차고를 물에 녹여 마시면 급체와 설사를 잡아주고 딸꾹질을 멈추게 한다. 부은 상처에 바르면 부기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다.

기낙은 1728년까지 청나라 정부가 아닌 지방 토호세력이 지배했다. 당시 한족 상인이 살해당하고 토사가 이를 묵인하는 일이 있었다. 청나라는 군대를 보내 대항하는 소수민족을 참살하고 차산과 마을을 불태우는 ‘겁상해민(劫商害民)’을 통해 청나라 정부가 관리를 보내 직접 다스리는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을 시행했다. 1729년(옹정 7년) 청나라는 기낙의 옛 지명인 유락에 보이부를 처음 설치했다. 종이품 관직에 해당하는 동지(同知)를 책임자로 삼고 유격전에 능한 무관에게 병사 500명을 주어 보이부에 주둔하게 했다.  

기낙에 설치한 보이부는 기낙을 비롯한 고 6대 차산에서 황실에 바치는 공차와 차세(茶稅) 징수임무를 수행했다. 기낙 지역을 넘어 라오스와 경홍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홍 일대는 전통적으로 태족(族)이 장악하던 곳이었다. 지금도 경홍시가 주도인 서쌍판납은 태족 자치주다. 청나라 정부의 직접 통치에 반기를 든 태족은 기낙족과 연합해 봉기했다. 차산과 마을은 또다시 불길에 휩싸였다. 끈질긴 저항은 3년이 지나도록 진압되지 않았다. 황금알을 낳던 차산은 황무지로 쇠락했다. 

기낙은 황폐화되고 악성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렸다. 청나라 관병이 병마에 시달리면서 토벌은커녕 기낙에 주둔하기조차 힘들어졌다. 1735년 청나라는 치욕을 감수하고 보이부를 사모(思茅)로 이동시켰다. 개토귀류 정책을 수정해 의방(倚邦)의 소수민족을 세습관리로 임명하고 기낙을 통제하도록 했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177년 동안 기낙족은 보이차를 만들 수 없었다. 기낙에서 채취한 찻잎을 상인들이 수매해 이무(易武)와 사모, 의방에서 차를 만들었다. 고 6대 차산의 선두주자 기낙은 몰락하고 의방과 이무가 새로운 보이차 강자로 부각됐다.

기낙의 찻잎은 인도와 유럽에도 팔려 나갔다. 1886년 영국인 클라크가 쓴 책 《귀주성과 운남성》을 보면 영국 동인도회사가 콜카타(Kolkata)와 다르질링(Darjeeling)에서 기낙 찻잎을 수입해 관리한 기록이 나온다. 청나라는 망했어도 기낙의 수난사는 끝나지 않았다.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피해 들판을 떠난 기낙족은 깊은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느라 차밭을 불태워야만 했다. 1941년 이무에서 차 장사를 하는 양안원(楊安元)이 기낙족 전통과 관습을 무시했다가 충돌이 생겼다. 기낙족은 인근에 거주하는 요족(族)과 합니족(哈尼族)을 규합해 폭동을 일으켰다. 진압을 위해 국민당 군대가 출동했다. 

기낙산 자락 고차수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 서영수 제공
기낙산 자락 고차수에서 새싹이 돋아나고 있다. ⓒ 서영수 제공

20세기 말부터 보이차 열풍 시작돼

기낙의 산야는 소수민족과 함께 죽어갔다. 격랑의 시기가 지나고 1970년대 측량 결과 청나라 초기 700만㎡가 넘던 다원은 150만㎡로 줄어 있었다. 20세기 말부터 불어온 보이차 바람이 뒤늦게 기낙에도 불기 시작했다. 밀림 속에 숨어 있던 고차수(古茶樹)들이 잠을 깨기 시작했다. 고차수로 만든 고수차 가격이 급등하면서 기나긴 세월 동안 ‘차’로 고난받던 기낙족에게도 훈풍이 불어왔다. 중국 최후의 소수민족 기낙족이 자연으로부터 받은 녹색자원, ‘차’가 이번에는 전화위복이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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