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싫어하는 할아버지가 밉다"…설날 '페미니즘 갈등' 부상
  • 박성의 기자 (sos@sisajournal.com)
  • 승인 2019.02.05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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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맞아 '페미니즘' 주제로 다퉜다는 사례 늘어나
"가족이 미투 폄훼" vs "욕설 담긴 구호 불편했을 뿐"
전문가 "건강한 사회로 나아가는 과정…가족 간 혐오는 피해야"

“막돼먹은 아이들이나 그런 말 하지. 너 그러다 시집 못 간다.”

올해 대학 입학을 앞둔 최미래(가명·19)씨는 2월4일 설을 맞아 할머니댁을 찾았다가 큰아버지로부터 “오랜만에 봤는데 사춘기가 다시 온 것 같다”며 이 같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술을 한 잔 걸친 큰아버지가 “‘미투(#metoo·나도 말한다) 운동은 다 꽃뱀들이 벌이는 짓”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김씨가 “큰아버지 같은 남자들이 많은 탓에 딸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이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반발하자 이 같은 잔소리가 따라붙었다. 김씨는 결국 “그만하라”는 아버지의 만류에 하던 말을 멈추고 사촌 언니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최씨는 “차라리 수능 전에 들었던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나았지, 젠더(gender) 이슈가 나오면 도무지 어떤 반응을 해야할 지 모르겠다”며 “불편한 것을 넘어서 대화 자체가 안 통하니 앞으로 명절 때마다 어떻게 어른들을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2018년 7월7일 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 몰카 사건 피해자가 남성이어서 경찰이 이례적으로 강경한 수사를 한다고 주장하는 시위대가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규탄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7월7일 홍익대 누드 크로키 수업 몰카 사건 피해자가 남성이어서 경찰이 이례적으로 강경한 수사를 한다고 주장하는 시위대가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규탄시위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미투'에서 촉발된 설 가족갈등

설 명절을 맞아 최근 사회 화두에 오른 ’미투‘ ‘탈코르셋’ ‘낙태죄 폐지’ 등을 둘러싸고 가정 내 남녀 간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속도 등이 세대별, 성별로 차이를 보여서다. 여기에 여성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며 온‧오프라인 양 측에서 활발히 목소리를 내는 이른바 '영 페미'(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늘어난 영향이 한국의 명절 풍속도를 바꾸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직장인 김지영(가명·30)씨는 설 명절을 앞두고 출장을 자처했다. 지난해 여름 혜화역 거리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집회에 참석한 이후 ‘태극기 부대’를 자처하는 할아버지와의 사이가 틀어진 탓이다. 김씨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를 누구 보다 따랐다. 그런데 작년 추석에 할아버지가 ‘시위 나가는 X들은 다 빨갱이’라고 욕설을 하시는 것을 본 뒤 사이가 망가졌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서 그러신다’며 이해하라고 하셨지만, 같은 주제로 이야기가 오가면 분명 싸움이 될 것 같아서 (출장을) 떠나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 전했다.

이 같은 갈등이 비단 가정 내 남녀 사이에서만 불거지는 것은 아니다. 주부 김화섭(가명·50)씨는 설을 앞두고 ‘남성 혐오’ 구호를 SNS 상태말로 바꿔놓은 딸에게 “어른들에게 나쁘게 보일 수 있으니 바꾸라”라고 했다가 딸로부터 “그렇게 말하면 엄마나 ‘한남충’(한국남자를 비하하는 줄임말)이나 다를 게 없다. 왜 그러고 사냐”는 말을 들어야 했다. 김씨는 “심한 욕설은 삼가라는 의미에서 한마디 했는데, 나를 무슨 노망난 엄마처럼 몰아붙이니까 황당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이슈에 ‘정치 감정’까지 뒤섞여 논쟁이 붙기도 한다. 지난 2월1일 설을 앞두고 큰집을 찾은 이은영(가명·33)씨는 뉴스에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성폭행 혐의로 2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는 보도가 나오자 ‘사이다(시원한 상황을 일컫는 말)’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작은 고모가 “제대로 정신이 박힌 X이면 이럴 때 한숨을 쉬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어디 보수 앞잡이들이나 반길 일에 박수를 치고 있냐”고 면박을 줬다. 이씨는 “정치 얘기에 미투가 섞이니 어디서부터 해명을 해야할 지 모르겠더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가족 내에서 페미니즘 언급 자체를 꺼리는 상황도 종종 벌어진다. 서울의 한 여자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박예진(가명·24)씨는 “가족 중 누가 여성 관련 얘기를 하거나 미투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면 그냥 무시한다. 어차피 말을 해도 이해 못 할 사람들”이라며 “나보고 ‘여대 다니면 남자들이 싫어한다’고 말했던 사촌 오빠도 있었다. 싸워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는 명절에 그냥 아프다는 핑계로 이어폰 끼고 누워만 있다”고 했다.

 

"사회는 분노하며 나아져…혐오는 곤란"

2월4일 구인구직 매칭 플랫폼 '사람인'이 성인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설 스트레스 여부'를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3.9%가 '스트레스 받는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의 절반 가까이(49.4%)가 ‘가족, 친지들의 듣기 싫은 말 때문에 명절 귀성이나 가족모임을 피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또 응답자 29.9%가 명절에 가족이나 친척과 다툰 경험이 있었으며, 대부분이 ‘부모’(41.7%, 복수응답), ‘친척’(38%), ‘형제, 자매’(23.7%) 들이었다. 이들 중 다툼 때문에 아예 관계가 틀어진 비율도 55.7%에 달했다. 화합에 방점이 찍힌 명절의 의의가 가족 간의 의견충돌로 퇴색된 것인데, 페미니즘 이슈가 갈등의 또 다른 도화선으로 부상한 셈이다.

전문가들은 세대 및 성별로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 및 학습 정도·속도 등이 파편화돼 있다 보니, 급진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 간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최근 불고 있는 페미니즘 열풍에 힘입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젊은 페미니스트’가 늘어난 상황에서, 성 고정관념이 뿌리 깊게 박힌 ‘남성 어른’과의 충돌은 불가피하다는 얘기다. 이 같은 현상을 보다 평등한 사회로 나아가는 ‘건강한 과도기’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힘을 얻고 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한국 사회에서 명절은 여성의 기피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여태껏 남성의 목소리가 워낙 셌기 때문에 여성들이 불만을 말하기 어려웠을 뿐”이라며 “미투 사태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길거리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여성이 부당한 상황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이게 기존 남성들이나 어른들이 봤을 때는 ‘유별나네’라고 느껴질 질 수 있기에 갈등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서로 다른 주장을 두고 분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너무 이상하게 치부할 필요는 없다. 싸우고 대화하는 과정을 거친 뒤 화해에 이르게 되면 훨씬 더 건강한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곽 교수는 다만 “분노가 혐오로 번져서는 곤란하다. 가족 간의 건강한 명절 문화를 조성할 수 있게끔 정부와 미디어가 나서서 캠페인 등을 전개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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