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민중미술’의 어제와 오늘
  • 김정헌 화가·前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2.27 18:00
  • 호수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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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주 민중미술가로 불린다. 보통 사람들은 이 ‘민중미술가’를 다시 한번 쳐다보든가 뜨악한 표정으로 보길 서슴지 않는다. 나도 1980년대 만들어진 이 용어에 익숙하지 않았고 때로는 불편하기조차 했다. 그 당시 대학교수 신분이었던 나 같은 화가들은 어딘지 ‘민중’을 내세우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면 민중미술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60~70년대는 박정희의 유신 치하에서 주로 문학가들이 저항적인 시와 소설로 인해 끌려가 고문과 투옥을 당하기 일쑤였다. 《타는 목마름으로》의 김지하와 《겨울공화국》의 양성우 같은 시인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전두환의 군부독재가 시작되면서 저항의 바람이 미술에도 밀어닥쳤다. 내가 참여했던 《현실과 발언》 동인을 시작으로 수면 아래 있던 미술가들의 저항이 곳곳에서 분출된 것이다.

그 당시 문공부(지금의 문체부) 이원홍 장관이 이를 알아차리고 어느 공식 석상에서 ‘미술에도 민중계열이 나타났다’고 경고함으로써 이 ‘민중미술’이 공식화된 것이다.

민중미술은 한마디로 저항미술이다. 부당한 사회 현실을 고발하는 ‘사회 참여미술’이며 또한 정치권력에 맞서 일어선 ‘정치미술’이기도 하다. 때로는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며 민족통일을 염원하는 ‘민족미술’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민중미술이건 ‘리얼리즘’이 그 바탕을 이룬다.

1985년7월22일 「민중 미술 전시회 힘」 전이 아랍 회관에서 전시 중 당국에 의해 철거됐다. ⓒ 연합뉴스
1985년7월22일 「민중 미술 전시회 힘」 전이 아랍 회관에서 전시 중 당국에 의해 철거됐다. ⓒ 연합뉴스

왜 저항미술인 ‘민중미술’이 느닷없이 80년대에 튀어 나왔는가? 그 이전의 미술은 무엇을 하였는가? 금년이 3·1운동 100주년 되는 해다. 민중미술이 태어나기 전까지 우리의 미술은 그야말로 일제 잔재미술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일제 치하에서 일제에 아부하거나 부역하는 미술로 그 존재를 이어 왔던 친일 미술가들이 이승만 독재정권을 등에 업고 해방 후에도 미술계를 지배한다(일제시대의 ‘선전’에서 ‘국전’으로 이어지는). 이후에 순수미술(예술을 위한 예술)을 참칭한 대한민국의 모든 미술은 어떠한 사회 참여 예술도 용납지 않는다. 

독재 정권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현대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이 ‘민중미술’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들에게 이 색다른 미술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민중미술’은 정권이나 경찰이나 안기부 같은 공권력의 탄압으로 그 설움과 압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러한 ‘압박과 설움’에도 민중미술은 애처로이 피는 꽃처럼 홀로 그 꽃을 피워 왔다. 많은 민중미술가들이 이러한 압박(일종의 검열) 상태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자기 세계를 만들어 왔다. 지난번 봄 남북 정상회담에 내걸린 그림들을 보라. 민중미술 계열의 그림이 두 정상의 뒤에서 그들의 회담 성공을 묵묵히 지지해 주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또 지난해 12월에 열린 민예총 주관의 ‘다시 날아오르다’ 전시에서는 많은 민중미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성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민중미술의 성과는 각 개인의 보이지 않는 노력의 결과이지만 민중미술은 우리 미술계의 답답한 지형을 넓히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단색 모노크롬의 추상화 계열이 독점하고 있던 미술 판에 신선한 다양성을 제공한 것이다. 이로써 민중미술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한국만의 미술 경향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리얼리즘 미술의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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