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차라리 갈아 엎겠다”…혹독한 전남 농촌의 겨울
  • 전남 = 정성환 기자 (sisa610@sisajournal.com)
  • 승인 2019.02.2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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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눈물’ 전남서 다 자란 겨울배추 6만 2000톤 시장격리·산지폐기
월동채소 가격 동반하락…‘풍년의 역설’ 힘 못쓰는 정부의 채소가격안정제
“가격 폭락, 수확하느니 보상금 받고 폐기”…산지폐기 물량부족 경쟁 치열

“자식 같은 배추를 수확도 못하고 갈아엎으려니 속이 오죽하겠습니까.”

2월 25일 오후 전남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 김장열(58)씨의 겨울배추밭. 육중한 트랙터가 훑고 간 자리마다 짓이겨 잘려나간 배추가 어지럽게 흩어졌다. 김씨는 20300㎡(6151평) 밭 가득 쌓인 배추 잔해물에 삽을 찔러 넣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작황이 좋아 배추는 쏟아져 나오는데 가격이 곤두박질치고 판로도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다. 힘들게 키운 겨울배추를 폐기한 김씨는 “지금 내봤자 인건비도 나오지 않는다”며 “일단 군과 농협에서 폐기 보상금을 보전해주니 급할 불은 끌 수 있지만 근본적인 농산물 수급대책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했다. 

2월 25일 오후 전남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의 한 밭에서 트랙터를 탄 농민이 출하기에 접어든 겨울배추들을 갈아엎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2월 25일 오후 전남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의 한 밭에서 트랙터를 탄 농민이 출하기에 접어든 겨울배추들을 갈아엎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날씨 좋아 공급과잉…정부 수급조절 실패·수요감소 겹치며 ‘삼중고’ 

풍년이 들수록 농민은 더 힘들어지는 ‘풍년의 역설’이 채소생산 주산지인 전남의 농가를 덮쳤다. 배추 등 채소농사가 잘 돼 농민들이 오히려 수심에 잠겼다. 겨울배추와 대파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고 가격도 폭락하면서 산지에서는 폐기처분도 이뤄지고 있다. 밭에 나동그라진 배추를 지켜보는 농민들의 시름은 내려간 가격만큼 깊다. ‘풍년의 역설’로 불리는 농작물 산지폐기의 악순환이 전남 농민들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전남은 전국 최대 배추 주산단지다. 특히 해남의 경우 겨울배추 전국 재배면적의 70%, 가을배추도 1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14년 겨울배추 파동 이후 계속 안정세를 보이다 5년 만에 배추 가격이 다시 하락했다. 

김씨 밭 구석에서 모닥불을 쬐며 배추 폐기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농민이 하소연을 털어놓았다. 또 다른 농민 김장환(75)씨는 “배추가 귀할 때는 남은 것으로 알배추라도 만들어서 내다 팔겠지만, 지금은 인건비도 안 나와. 그냥 갈아엎어야지. 값이 오를 때만 정부에서 법석을 떨지, 떨어지면 농민들은 신경도 안 써줘. 그나마 산지 격리 대상농가는 낫지. 계약재배 대상에서 제외된 배추는 노지에서 그래도 방치되고 있어.“ 해마다 거듭되는 배춧값 널뛰기에 김 씨는 “자식 같은 작물이 언제쯤 제값을 받을 수 있을까요?”라고 되물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산지폐기 여부를 확정받은 김 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다른 농가에 비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다. 해남 산이면 신흥리, 부동리 등 일부 교통이 불편한 지역에서는 판로를 찾지 못하고 밭에 버려진 배추도 꽤 있다고 김씨는 전했다. 전남도에 따르면 농림축산식품부가 추정하는 올해 전국 겨울배추 생산량은 33만6000톤이다. 전년보다 17%, 평년보다 8.9%가 늘어난 규모다. 전남 생산량은 전년보다 17.2%가 증가한 32만6000톤이다. 겨울배추 재배 면적은 지난해와 비슷하지만, 지난해 11월 이후 기상 여건 호조로 생산량은 크게 늘어났다. 공급과잉으로 배추 포기당 도매가격은 지난해 11월 1690원에서 지난달 1237원을 거쳐 2월 14일 현재 도매가격은 포기당 935원으로 전년의 2144원보다 절반 이상 뚝 떨어졌다. 이는 평년가격의 반토막 미만으로, 겨울철 가격으로는 2014년 폭락사태 이후 처음 나오는 가격대다. 

전남 해남군 산이면 한 배추밭에서 시름에 잠긴 농민 김종환(78)씨가 정부의 근본적인 농산물 수급안정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전남 해남군 산이면 한 배추밭에서 시름에 잠긴 농민 김종환(78)씨가 정부의 근본적인 농산물 수급안정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시사저널 정성환

겨울대파도 사정은 비슷하다. 올해 전국 양파 생산량은 전년보다 6.7% 늘어난 12만400톤이다. 전남은 12만톤(5.9% 증가)이다. 겨울대파의 도매가격도 kg당 1155원으로 예년보다 12.9% 하락했다. 4월 초에 조생 햇양파가 본격 출하되고, 5월 상·중순부터는 중생종까지 시장에 풀릴 것으로 보여 가격하락이 우려된다. 일당 12만∼15만원씩 주고 사람을 구해 대파를 수확하고 내다 팔면 되레 손해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자 김 씨뿐만 아니라 많은 농민들이 차라리 배추를 폐기하고 보상금을 신청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또한 현실은 녹록치 않다. 전남지역이 1단계로 배정받은 시장격리 겨울배추 물량은 해남 9037톤, 진도 5898톤, 신안 1621톤, 무안 940톤, 영암 452톤, 함평 19톤 등 1만7967톤뿐이다. 이 때문에 산지 폐기 신청 경쟁률 또한 치솟고 있다. 25일 오후 무안농협 사무실에서 만난 오준영 상무는 양파 시장 격리 대상을 20여 농가 정도로 잡고 있는데 이날 현재 300여명이 신청하는 등 문의가 쇄도하고 있다고 했다. 

농정당국은 겨울 배추와 양파 값 하락의 원인으로 날씨를 지목하고 있다. 김경 전남도 친환경농업과 팀장은 “연초 온화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생육이 지나치게 빨라 생산이 증가하는 등 작황이 좋은 반면 소비부진으로 가격이 오를 여지가 없어 재배농가들이 힘든 상황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자연 탓만으로는 돌릴 수 없다. 농정당국을 바라보는 농민들의 시선은 냉랭하다. 

지역 농민회 관계자는 “농산물 가격 폭락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부의 수급조절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며 “풍년 때마다 국산 농산물을 갈아엎는 게 능사가 아니라 사전에 농산물 수입물량을 조절해 지역 농가의 삶이 나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작황과 상관없이 꾸준히 국내로 들어오는 수입산 농산물도 걱정거리라는 지적이다. 김 팀장도 “김치업체의 사전 저장량 증가와 김치 수입량 증가 등으로 월동 배추·대파 수요까지 감소했다”며 “이 때문에 최근 가격은 평년보다 크게 낮고, 출하 대기 물량도 많아 전망도 밝지 않다”고 지적했다. 

 

“농정당국 배추 값 바닥 친 후 산지폐기 결정…너무 늦어”

ⓒ시사저널 정성환
ⓒ시사저널 정성환

정부와 전남도, 해남 등 주산지 지자체는 이처럼 도매시장 가격이 생산비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농가 피해확산을 우려해 ‘산지 폐기’라는 극약 처방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부는 과잉생산이 예상되는 겨울배추 32만6000톤 중 5만2000톤가량을 1~2차에 걸쳐 전남지역에서 산지폐기하고 있다. 정부는 이를 선제적 수급대책이라 자평했지만 그나마 상당부분 대책도 지자체에 의존했다. 

주산지인 해남군의 자체 산지폐기 물량이 9000톤, 산지유통인 자율감축 물량이 2000톤이다. 전남도는 해남 등 주산지 계약 재배 포전을 중심으로 111.1ha 면적의 겨울배추 1만톤을 시장 격리키로 했다. 예산은 도비 2억7000만원을 포함해 주산지인 시·군과 농협이 일정 비율로 부담하게 된다. 또 전남도는 월동채소 가격안정을 위해 총사업비 56억원을 들여 전남산 겨울대파 중 4872톤과 조생 양파 1만840톤도 산지에서 시장 격리하기로 하고 3월 초까지 폐기 작업을 완료할 계획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농정당국의 대책이 한발 늦었다는 한탄이 나오고 있다. 박훈동 해남 문내면 이장단장(배추 재배)은 “정부 관측보다 현장 농민들 시각이 더 정확하다. 배추도 현장에선 가을철부터 분명 대란이 날거라 예상했는데 정부 대책이 한 발 늦었다”며 “과잉 예상량 역시 현장에선 정부가 예측한 것보다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해남군 관계자도 비슷한 진단을 내놨다. “지난해 6월 농가 작물 의향조사에서 해남지역 가을배추 면적은 적정선으로 여겨지는 1600㏊를 훨씬 웃돌아 1900㏊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이미 나왔었다. 11월부터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고, 비까지 알맞게 내리면서 배추 생산량이 지난해와 견줘 전국적으로 10% 이상 늘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이 같은 신호가 진즉에 감지됐는데도 배추 값이 떨어질 대로 떨어지고 나서야 산지 폐기대책이 나왔으니 농가 사이에서 불만이 나오는 건 당연하다.” 결과적으로 정부의 수요예측은 실패였던 셈이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농정철학을 등한시 한 뼈아픈 대목이다.

이게 우리 농정의 현주소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도, 지자체도 풍년 때마다 국산 농산물을 갈아엎는 산지폐기를 제외하고는 속시원한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비단 겨울배추와 대파만이 문제가 아니다. 불과 몇 달 전에는 가을배추가 같은 신세였다. 가격하락과 처리난이 예상되면서 시장 격리했다. 지금으로선 애써 키운 배추를 그냥 산지에서 폐기하는 것이 농정당국이 취할 수 있는 고육지책인 셈이다. 배추처럼 가격변동 폭이 큰 작물의 경우 한 해 가격이 폭등하면 농가에서 재배면적을 늘려 다음 해 폭락하고, 이어 다시 면적을 줄여 이듬해 가격이 폭등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되고 있다. 정부도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고민해왔다. 

하지만 만지작거리는 정책마다 번번이 헛바퀴만 돈다. 올해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정부는 2015년부터 도매시장 평년가격의 80%를 보장해주는 채소가격안정제를 도입했으나 힘을 못 쓰고 있다. 가입농가 수가 30%이상일 때 공급자(농가) 주도로 수급물량을 조절하는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데 현재 10%대 가입 농가 규모로는 그 효과는 불투명하다. 그렇다고 농가에 대한 지원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농가의 자부담분을 제외하면 시장격리에 따른 보전 금액은 평당 4500원, 10a당 135만원에 불과하다. 

 

‘천수답 신세’ 면하려면 유통구조 개혁 시급  

시장 격리를 기다리고 있는 전남 해남군 산이면 한 겨울배추 포전 ⓒ시사저널 정성환
시장 격리를 기다리고 있는 전남 해남군 산이면 한 겨울배추 포전 ⓒ시사저널 정성환

현재로선 뾰족한 정부대책이 없는 만큼 생산농가들은 풍년이면 ‘풍년의 역설’을, 흉년이면 값싼 수입산 농산물 공급 증가를 걱정해야 할 판이다. 농가들 또한 익숙하고 대체작목이 없다는 이유로 손이 덜 가면서도 비용이 적게 드는 배추나 양파 재배에 나서는 등 악순환만 되풀이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가격파동을 농민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무안에서 10년차 양파농사를 짓고 있는 박창주(39)씨의 하소연이다. “농사를 두고 도박을 할 수는 없잖아요. 잘하는 게 양파밖에 없습니다. 우직하게 양파 농사만 짓기로 했어요.” 박 씨는 대대로 가꿔온 농토를 바라보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생산량 증가로 가격이 폭락할 때마다 산지폐기를 통해 가격을 올리는 임시처방식으로는 ‘풍년의 역설’을 막을 수 없다. ‘풍년의 역설’ 등으로 농민들은 농산물을 무조건 생산만 하고, 판매는 행정기관이나 농협 등이 알아서 해주는 식의 농업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얘기다. 농업 전문가들은 하늘바라기만 하며 농사의 길흉을, 농작물의 가격을 걱정해야 하는 ‘천수답’ 신세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유통 혁신에 대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풍년의 역설’을 막기 위해서는 농가와 행정, 생산자단체들이 합심해 사전에 생산량을 조절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적정 생산량 유도와 대체작물 개발 등 영농구조 개선을 위한 노력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휴경제와 주산지에 독점혜택 주는 등 근본적인 대책 필요

휴경제 등 근본적인 처방이 나와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전남 무안에서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는 정영호 자주농업연구소 소장은 “공급과잉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산지폐기 대신 휴경을 선택하는 농가에게 소득을 보전해주는 정책을 쓴다면 지력을 끌어올리고 공급도 조절하는 효과를 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무안농협 오 상무도 “배추 산지폐기에 따른 엄청난 비용에다 ‘먹을거리를 버린다’는 부정적 시선을 고려한다면 ‘휴경’도 산지폐기의 한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작목별로 지역특성에 맞는 주산지를 정하고 이에 따른 독점적 혜택을 주는 방안도 제기된다. 김민수 해남녹색유통 대표는 “특정 작목의 시세가 급등하면 다음해 전국적으로 작목 쏠림현상이 확대된 후 이듬해 폭락하는 악순환이 반복해 일어나는데도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면서 “정부가 지나치게 개입한다는 불만도 있겠지만 배추는 해남, 무안은 양파, 진도는 대파와 같이 주산지를 설정해놓고 해당 지역농가에 산지폐기나 휴경의 우선권을 부여한다면 농산물 수급조절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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