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만세” 100년…보훈청, 경남지역 독립운동가 7인 집중 조명
  • 경남 = 황최현주 기자 (sisa520@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1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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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제, 윤세주, 이윤재, 주기철, 최수봉, 이태준, 김대지 등 독립운동가 7인 공적 소개

삼일절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독립운동가와 만세운동을 재조명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이에 경남동부보훈지청은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안희제, 윤세주, 이윤재, 주기철, 최수봉, 이태준, 김대지 등 독립운동가 7인의 주요 공적을 소개하며 그들의 뜨거웠던 삶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다.  

경남 의령 출생인 백산 안희제 선생
경남 의령 출생인 백산 안희제 선생 ⓒ경남동부보훈지청

 

폭탄도 두렵지 않았던 밀양의 독립투사 3인

석정 윤세주 열사는 조선의열단과 조선의용단 창립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1942년 중국 태항산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40여년이 지난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190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그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는 동화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당시 항일인사였던 김홍표 교장의 애국사상에 감화된 윤세주 열사는 학교 내 비밀결사 단체 연무단을 조직해 개천절 기념행사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1919년 3월 1일 기미만세운동에 참가한 그는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와 그 해 3월 13일 수천명이 모인 고향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후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만주로 망명해 현재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무관학교로 입학해 정식으로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한 군사훈련을 받았다. 같은 해 11월 9일 동향 출신이자 죽마고우인 약산 김원봉 열사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최수봉 의사는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의 주범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1894년 3월 밀양에서 태어나 1919년 의열단원으로부터 폭약과 제조기를 입수해 폭탄을 제조한후 이듬 해 12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그 다음 해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경남 밀양 출생인 석정 윤세주 선생 ⓒ경남동부보훈지청
경남 밀양 출생인 석정 윤세주 선생 ⓒ경남동부보훈지청

최수봉 의사 역시 김원봉 열사와 함께 밀양공보를 다니던 중 단군이 일본 대화족(大華族, 일본 봉건귀족) 시조의 아우라고 주장하던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를 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이후 1910년 동화학교에 편입해 김대지 등 독립운동가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국애와 항일의식을 본격적으로 키워나갔고, 1916년 평안도에서 광부와 우편배달부 일을 하던 중 독립운동의 주요거점인 봉천(현재 선양)과 안동(현 단둥)을 왕래하며 동지들을 규합했다.

1920년 의열단이 제1차 군내 일제기관 총공격거사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밀반입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됐다. 이 일로 많은 단원들이 체포되자 최수봉 의사는 그 해 12월 27일 월요일 아침 경찰서장이 연말연시 특별경계 훈시를 진행하던 중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화가 난 일본사법부에 의해 한 달 보름 만에 대구감옥에서 사형을 받았다.

일붕 김대지 선생은 무장항일투쟁에 앞장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는데 크게 활약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891년 밀양에서 태어나 1910년 비밀결사 일합사를 조직하고, 모교인 동화학원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1919년 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교통차장, 내무위원 등을 지냈고, 1920년 의열단이 전개한 암살 파괴운동에 사용된 무기와 폭탄 구입을 전담했다. 1942년 중국 빈강성 파언현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특히 그는 김동삼, 이시영, 조소앙, 이회영 등의 인사들과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큰 공헌을 세운 인물이다. 1919년 임시정부의 조사원 자격으로 고향인 밀양에 파견돼 유력자와 재산가, 학교, 종교 등의 실태를 조사해 임시정부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선생은 1929년 5월 동지인 김동삼 선생이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김좌진 장군이 피살되자 충격을 이기지 못 해 지병인 폐병과 기관지염을 앓다가 1942년 중국 빈강성 파언현에서 51세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다.

경남 창원 출생 소양 주기철 목사 ⓒ경남동부보훈지청
경남 창원 출생 소양 주기철 목사 ⓒ경남동부보훈지청

의령, 김해, 창원, 함안의 독립운동가 4인

백산 안희제 선생은 1885년 의병의 고장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대동청년단을 조직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1914년 백산상회를 설립해 항일운동 인사들에게 독립운동 연락과 군자금 등을 지원했다.

또한 1933년 발해농장과 발해학교를 설립하고, 1943년 만주에서 일본경찰이 대종교 간부를 박해한 사건인 임오교변 당시 체포돼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해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양정의숙에 재학 중이던 그는 가난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비를 대주고, 순회강연을 하는 등으로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해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했다. 또한 한국강점과 식민지 지배가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국권회복을 위해 1909년 대동청년단을 결성하는 등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임오교변으로 인해 체포될 당시 받았던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43년 순국했다.

경남 김해 출생 한뫼 이윤재 선생 ⓒ경남동부보훈지청
경남 김해 출생 한뫼 이윤재 선생 ⓒ경남동부보훈지청

한뫼 이윤재 선생은 1888년 경남 김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삼일만세운동에 참가했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 집행위원을 맡아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한글강습회를 개최하는 등으로 한글보급에 앞장섰다.

또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체포돼 이듬 해 고문으로 옥중 순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이윤재 선생은 김해의 합성학교에 교사로 재직하며 민족족 과제인 국권회복을 달성하기 위해 교육계몽운동에 동참했다. 이 시기 한글 연구의 기초를 닦는 한편, 1913년 마산 창신학교에 봉직하면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한글강습회, 국어통일운동 등을 전개하는 것으로 한글보급과 민족의 얼 등을 고취하는데 큰 힘을 썼던 이윤재 선생은 그러나 1937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1년 6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서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개정안 발표,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결정에 참여했다.

소양 주기철 목사는 일본의 신사참배와 천황이 살고 있는 천황궁을 향해 인사하도록 하는 궁성요배를 강하게 거부해 일제로부터 갖은 핍박을 당했다. 1897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난 그는 1919년 삼일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 등을 거부하고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중 사망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됐다.

1938년 신사참배 거부문제로 첫 번째 구속된 이후 1940년 4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에도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다. 이 때문에 그는 일본경찰이 평양노회를 통해 압력을 넣은 탓에 결국 파면당하고 말았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약 5년의 옥고를 치른 선생은 결국 평양형무소에서 순국했다.

대암 이태준 선생은 의사로, 독립운동에 앞장 선 ‘몽골의 슈바이처’로 불리고 있다. 1888년 경남 함안에서 출생한 선생은 1910년 비밀결사 신민회의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활동했고, 1914년 몽골에 동의의국를 설립하고, 몽골 황제 어의로 활약했다.

또한 1918년 파리강화회의 참석자인 김규식에게 독립자금을 제공했고, 1921년 의열단에 폭탄제조 기술자를 소개해 몽골 고륜에서 순국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인 이태준 선생은 1919년 몽골정부로부터 의료사업 공적으로 국가훈장을 수상받았다. 세브란스의학교 재학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의 권유로 비밀결사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담해 활동했고, 졸업과 동시에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이 발생되자 해외로 망명했다.

몽골 울란바토르에 정착한 선생은 그곳에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개원해 당시 몽골 전역에 퍼지던 감염병을 치료하는데 전념하면서 몽골 국왕으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얻으면서 그의 주치의가 되기도 했다.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한 그는 우수한 폭탄제조 기술자를 단체에 소개하는 등 의열단이 투쟁할 수 있도록 많은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몽골 고륜을 점령한 러시아 백위파 군대에 의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지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한편, 창원과 김해, 하동 등을 중심으로 경남도는 아직 발굴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찾거나 재조명하기 위한 학술회 등이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특히 김해에서는 지난 2월 19일 김해에서 태어나 목포 등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배치문 선생과 배동석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을 조명하는 학술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경남보훈지청 관계자는 “학술회 등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치적이 활발히 드러나고 있는 만큼 아직 드러나지 않은 독립유공자들을 발굴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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