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은 덩샤오핑 개혁의 주역
  • 박승준 아시아 리스크 모니터 중국전략분석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3 15:00
  • 호수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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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준의 진짜중국 이야기] 중국 주자파(走資派) 연구(3)

현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을 주자파(走資派)로 분류해도 좋을까. 2017년 가을 중국공산당 19차 당 대회에서 5년 임기 당 총서기로 두 번째 선출된 시진핑은 주자파, 다시 말해 개혁·개방 주의자가 아니라고 하는 중국 안팎의 견해가 많다.

시진핑이 독재정치를 하려고 작정했으며, 지난 40여 년 동안 ‘우경화’된 중국공산당에 ‘좌경화’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는 이유로 그는 개혁·개방 주의자가 아니며, 더더욱 주자파는 아니라고 평가하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가 반(反)부패 드라이브로 중국 정치를 긴장시키고, 지난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 기념행사를 베이징(北京) 인민대회당에서 대규모로 치렀으며, 2018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헌법에 규정된 ‘국가주석 3연임 금지 조항’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진핑은 그의 아버지 시중쉰에 의해 주자파 내지는 개혁·개방 주의자로 키워졌다. 1953년 출생해 시중쉰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성장한 배경을 보면 시진핑은 결코 주자파, 개혁·개방 주의자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5년 세계 2차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일에 마오쩌둥 전 주석의 초상화 앞에 서 있다. ⓒ EPA 연합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015년 세계 2차대전 승전 70주년 기념일에 마오쩌둥 전 주석의 초상화 앞에 서 있다. ⓒ EPA 연합

개혁·개방 주의자로 키워진 시진핑

미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의 연구원 앨리스 밀러 같은 중국 전문가는 “시진핑이 마오쩌둥과 같은 좌경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중국 안팎의 견해는 잘못된 것으로 시진핑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사상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앨리스 밀러는 “시진핑이 2012년 당 총서기로 선출된 이후 쓴 책과 각종 연설들을 분석해 보면, 시진핑이 ‘새로운 마오쩌둥’이라는 중국 안팎의 관측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시진핑은 자신의 글을 통해서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 시중쉰에 의해 주자파이자 개혁·개방 주의자로 길러졌다고 여러 차례 밝히기도 했다. 시진핑은 2014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기관지 중국청년보에 발표한 글을 통해 “1913년에 출생한 부친이 살아오신 100년 사이에 중국은 번천복지(飜天覆地·하늘과 땅이 서로 바뀌는)의 변화를 겪었다. 지난 100년 사이에 중국 역사는 풍부한 변화를 겪었고, 나의 부친도 풍부한 변화를 겪었으며, 아버지가 일생을 통해 나에게 남긴 교훈은 두 가지였다”고 밝혔다.

아버지 시중쉰이 아들 시진핑에게 준 두 가지 교훈은 ‘설중송탄(雪中送炭)’과 ‘공융양리(孔融讓梨)’다. 시중쉰은 설중송탄과 관련해 “긴 세월 당의 공작을 하다 보면 당이 좌적인 착오도 범하고, 우적인 착오도 범하는데 어떤 경우에도 어려움에 빠진 동지들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려줬다. 공융양리 역시 공융이라는 사람이 배를 나누어 주면서 겸손과 자신이 손해 보는 방식을 잘 실천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는 유교적인 겸손을 교훈으로 가르치는 이야기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시진핑은 지난 7년간 자신의 연설 속에 많은 유교 경전에서 교훈적 글귀들을 찾아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점에서 마오가 주도한 문화혁명이 유교를 배척하고 비판한 점과 기본적으로 생각의 틀이 다르다는 점을 보여줬다.

마오가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불붙인 문화혁명이 본격화된 직후인 1968년, 불과 15세였던 시진핑은 아버지 때문에 수사 당국에 불려가서 조사를 받느라 신체가 망가져 허약해지고, 온몸에는 이가 들끓었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시중쉰이 옌안의 지방 당 책임자로 있을 당시 2만5000리 장정 끝에 옌안에 도착한 마오를 만나 마오의 결정들이 “좌경적 착오였다”고 말했다가 마오의 미움을 사서 결국 문화혁명 때 숙청당하는 고난을 겪었지만, 시진핑은 그런 아버지를 부정한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주자파로 몰려 실각하자 어린 나이에 과감히 정치 수도 베이징(北京)을 떠나 아버지의 출생지인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의 저수지 공사장으로 스스로 하방(下放)을 결정하는 깜찍한 정치적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아버지 시중쉰 때문에 어린 시절 고난을 겪은 시진핑은 고난 속에서 역경을 딛고 40년 가까이 당(黨)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 시중쉰이 철저히 신봉했던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생각과 ‘아버지가 덩샤오핑 동지의 신뢰를 받아 개혁·개방의 전초 기지인 광둥(廣東)성 최초의 개혁·개방 정책 추진 당서기를 맡아 경제개혁 임무를 수행한 과정을 몸으로 체험했다’는 고백을 스스로 부정한 일이 없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아버지 시중쉰 등 자신의 가족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 Xinhua 연합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아버지 시중쉰 등 자신의 가족과 함께 산책을 하고 있다. ⓒ Xinhua 연합

시중쉰에게 힘 실어줬던 덩샤오핑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 덩샤오핑과 처음 만난 것은 1952년 7월. 당시 덩샤오핑이 48세, 시중쉰은 39세의 청장년 시절이었다. 덩샤오핑은 서남지역에서 군 정치위원으로 일하다가 부총리로 발탁돼 수도 베이징으로 왔고, 시중쉰은 서북지역의 당 간부로 일하다가 당 중앙 선전부 부부장 보직을 받아 베이징으로 올라왔다. 

덩샤오핑과 시중쉰 두 사람은 1953년 2월 마오로부터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 지역을 소수민족 자치지역화 하라”는 지시를 받고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신장위구르 지역의 위구르인들을 상대로 “위구르인들의 민족주의를 대민족(大民族)주의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설득하는 데 성공해 오늘의 중국 서부, 원유를 포함한 어마어마한 자원의 보고를 자치구로 편입하는 업적을 중국공산당에 안겨줬다. 

1966년부터 1976년 9월 마오가 병으로 죽기까지 10년간 계속된 이른바 문화혁명이 끝나고, 정치권력이 덩샤오핑의 손에 들어왔을 때, 덩샤오핑은 중국 인민들에게 개혁·개방과 빠른 경제발전을 통한 부유한 중국을 정치적 약속으로 제시했다. 

개혁·개방의 순서는 자본주의 경제의 선진 실험장이던 홍콩에 인접한 광둥성을 개혁·개방의 전초기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덩샤오핑이 광둥성의 개혁·개방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맡긴 인물은 바로 시중쉰이었다. 덩샤오핑은 권력을 잡자 1978년 당내 회의를 개최해 시중쉰을 핑판(平反·잘못된 정치적 평가를 바로잡는 것)의 1호 인물로 선정했고, 시중쉰은 당 선전부장을 한 경력을 바탕으로 “실천만이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는 글을 당 이론지 광명(光明)일보에 실어 개혁·개방의 흐름을 잡아나갔다. 

광둥성 매체들이 광명일보의 글을 옮겨 실어 중국 남부에서부터 개혁·개방의 바람을 일으켜 북상하게 해서 베이징의 보수적 분위기를 개혁·개방으로 바꾸는 흐름을 만들어낸 주역이 바로 시중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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