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은 ‘태극기’ 극복할 수 있을까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4 13:30
  • 호수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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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된 태극기 세력과 민심의 간극…“우경화 돌릴 수 없을 것” 관측도

흥행엔 실패했지만 내내 요란했던 자유한국당 전당대회가 당에 수많은 과제를 남긴 채 2월27일 막을 내렸다. 몰락한 보수 정부의 마지막 책임자 황교안 전 국무총리가 이날 새 당 대표 자리에 오르면서 이제 그 모든 고민을 떠안게 됐다. 대통령 권한대행에서 물러난 지 1년9개월, 자유한국당 입당으로 정계에 입문한 지 불과 43일 만이다. 황 신임 대표가 전당대회 무대에서 승리의 깃발을 흔들기가 무섭게, ‘황교안호(號)’의 앞날을 우려하는 시선들이 쏟아졌다. 당선의 기쁨을 누릴 틈도 없는 ‘무거운’ 승리였다.

황 대표는 당선 후 일성으로 ‘보수 통합’을 꺼냈다. 총선을 1년여 앞둔 지금 보수진영의 통합요구는 한층 높아진 상태다. 전당대회 동안 당 대표·최고위원 후보들 역시 입버릇처럼 보수 대통합을 외쳤다. 그러나 대회가 진행될수록 당 분위기는 통합과 멀어져만 갔다. 강경보수 세력인 ‘태극기부대’의 존재감이 커지면서다. 

2월27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지도부 체제의 막이 올랐다. 황 신임 대표는 전당대회 분위기를 뒤흔들었던 태극기 세력과의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 연합뉴스
2월27일 황교안 자유한국당 지도부 체제의 막이 올랐다. 황 신임 대표는 전당대회 분위기를 뒤흔들었던 태극기 세력과의 불편한 동거를 시작했다. ⓒ 연합뉴스

당내 ‘계륵’ 같은 태극기 세력

이번 전당대회는 단연 태극기의, 태극기를 위한, 태극기에 의한 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록 이들이 열렬히 지지한 김진태 당 대표 후보가 황교안·오세훈 후보에게 밀려 3위에 그치면서 태극기 세력의 한계가 드러났다는 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김 후보가 9만6000여 명이 참가한 선거인단 투표에서 2만 표 이상을 얻어, 2위 오세훈 후보와 불과 1008표(1.1%p) 차이밖에 나지 않았던 점은 태극기 세력을 마냥 극단적 소수 집단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부분으로 읽힌다.

무엇보다 이번 레이스 내내 태극기 세력이 보인 응집력과 지지 강도는 전당대회 전체 분위기를 뒤흔들 만큼 위력적이었다. ‘현장에선 김진태가 단연 당 대표’라는 말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이러한 기세 때문에 한국당 의원들과 후보들은 애초 전체 당원의 2%에 불과한 ‘소수 극성 집단’으로 치부했던 태극기 세력을 점점 의식하기 시작했다. 황교안 후보가 전당대회 도중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부정하고 태블릿PC 조작 의혹을 제기한 것 또한 태극기 세력의 지지를 가져오기 위한 전략적 발언으로 풀이된다. 당이 우경화되고 ‘도로친박당’으로 역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졌음에도 당내에서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지적한 의원은 거의 없었다. 

비박으로 분류되는 보수진영의 한 의원은 “전당대회에서의 당심은 태극기에 우호적이었지만 당장 내년 총선에서의 민심도 이와 같을까? 보수진영 전체를 봐선 태극기 세력을 끊어내야 한다는 입장이 훨씬 많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전당대회 기간에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태극기부대에 취해야 할 한국당의 입장’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태극기부대를 ‘단절해야 한다’는 응답은 57.9%로, 이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응답(26.1%)의 2배가 넘었다.(2월20일 전국 성인 남녀 502명 대상, 95% 신뢰수준에 표본오차 ±4.4%포인트)

당장 전당대회에선 태극기 세력을 끌어안은 것이 당심을 모으는 데 분명 도움이 됐다. 그러나 총선과 향후 대선을 내다봤을 땐 당이 확장할 수 있는 사다리를 치워버린 꼴이란 지적이 나온다. 당장 더불어민주당과 바른미래당 일부에서 ‘황나쌩(황교안 나오면 쌩큐)’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황교안 지도부 체제에서 한국당이 중도층을 흡수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민주당 중진의원은 “당장 요란한 태극기 세력 무서워 전당대회 내내 끌려다니다가 보수 통합, 중도 확장이라는 더 중요하고 큰 그림과 멀어진 모양새”라며 “새로 뽑힌 황교안 대표 개인적 성향을 봐서도 앞으로 저쪽(태극기 세력)과 선 긋고 통합 논의에 확실히 몰두할 수 있는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전당대회 내내 끊임없이 친박 마케팅을 해 온 황 대표 뒤엔 서청원·윤상현 등 친박계 중진의원들이 버티고 있었다. 일찍이 이들을 돕던 실무자들이 황 대표 쪽으로 대거 이동해 뒤에서 전당대회 전반을 도왔다. 그 때문에 향후 두 의원을 비롯한 당내 친박계 인사들이 황교안 지도부 체제에서 다시 중심적 역할을 맡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앞서 선출된 나경원 원내대표 역시 당내 친박 세력의 지지를 업고 승리한 바 있다. 새로 갖춰진 당 지도부에 이처럼 친박 그림자가 잔뜩 드리워져 있어, 전당대회에서 시작된 우향우 흐름을 쉽게 돌릴 수 없을 거란 관측이 나온다.


오세훈 득표율, ‘친박 마케팅’에 경고장

이 가운데 2등 오세훈 후보가 획득한 득표율은 우행(右行)하는 현재 당 흐름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개표 직전까지만 해도 현장에선 오 후보가 3위로 밀릴 거란 예상이 많았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본 결과 오 후보는 예상보다 넉넉한 표차로 김진태 후보를 이겼다. 특히 당심을 넘어 전체 민심의 척도인 ‘일반 국민여론조사’ 부문에선 과반의 득표율을 얻어 전체 1위 황교안 후보까지 뛰어넘었다. ‘당심은 황교안, 민심은 오세훈’이라는 세간의 분석을 입증하며, 전당대회 내내 존재감 없던 비박계의 체면을 지켜낸 것이다. 오세훈 개인으로도 비박계·개혁보수 세력의 대표주자로서 15년 만에 복귀한 여의도에 활동 공간을 마련한 셈이다.

오세훈 후보의 득표 결과는 곧 보수진영 내 중도 확장과 보수 개혁에 대한 바람이 상당히 살아 있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국당 내 보수 개혁에 공감하는 비박계·복당파 의원들은 향후 바른미래당과의 통합과 중도 확장을 주장할 명분 또한 생긴 셈이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보수진영이 힘을 합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질 것은 분명한 일이다. 이에 대해 황교안 대표 역시 지난 TV토론에서 바른미래당과의 통합 필요성에 동의한 바 있다. 그러나 새 지도부를 가득 메운 친박·강성보수 세력과 바른미래당은 현재로선 물과 기름에 가깝다. 이는 황 대표가 기존에 보여온 방식대로 두루뭉술하게 대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총선 날짜가 카운팅 될수록 그의 명확한 입장을 바라는 당내 요구는 거세질 것이다. 황 대표가 전당대회 때와 같이 당내 친박계, 당 밖의 태극기 세력과 함께 친박 마케팅만을 거듭한다면 이제껏 잠잠했던 개혁보수, 복당파 의원들과의 갈등은 점점 표면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 경우 꾸준히 복당설이 나오고 있는 유승민 전 바른미래당 대표, 나아가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대표 등과의 총선 전 결합도 애매해진다. 당선 무대에서 내려오자마자 ‘정치인 황교안’은 자신의 승리를 만들어준 친박의 결집과 당 확장, 보수 개혁 사이의 딜레마를 해결해야 할 매서운 정치 시험대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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