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후정 인터뷰]① “‘여성은 원래 그래야만 한다’는 건 없다”
  • 구민주 기자 · 정리=이준엽 인턴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3.06 11:00
  • 호수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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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창간 30주년 특별기획] 대한민국, 길을 묻다⑨
윤후정 초대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인터뷰(上)

혼돈의 시대다. 혹자는 난세(亂世)라 부른다. 갈피를 못 잡고, 갈 길을 못 정한 채 방황하는, 우왕좌왕하는 시대다. 시사저널은 2019년 올해 창간 30주년을 맞았다. 특별기획으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 각계 원로(元老) 30인의 ‘대한민국, 길을 묻다’ 인터뷰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 순서는 인터뷰한 시점에 맞춰 정해졌다. ⓛ조정래 작가 ②송월주 스님 ③조순 전 부총리 ④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⑤손봉호 기아대책 이사장 ⑥김원기 전 국회의장 ⑦김성수 전 대한성공회 대주교 ⑧박찬종 변호사 ⑨윤후정 초대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한다.’(헌법 36조1항) 1980년 8차 개헌이 돼서야 우리 헌법엔 처음으로 남녀평등이 명문화됐다. 이 조항은 이후 남성 중심 사회에서 차별로 싸우는 여성들에게 가장 유력한 근거가 됐다. 여성 운동사(史)에서 가장 큰 성과로 꼽히는 호주제 폐지 판결(2005)에도 주춧돌 역할을 했다. 이 짧은 한 줄은 수백 년간 기울어 있던 가족구조의 법적 종결이자 성평등 논의의 출발이기도 했다.

40년 전 개헌 당시, 평등 조항을 논의조차 않던 남성 헌법학자들의 틈바구니에서 홀로 이를 관철해 낸 인물이 있다. 윤후정 전 이화여대 명예총장이자 초대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이다. 그는 그 시기 국내에 거의 유일한 여성 헌법학자였다. “개헌을 위해 모인 자리에서 늘 난 평등에 대해 가장 강하게 주장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신문에 매일 이 내용은 하나 없고, 내가 부수적으로 언급한 다른 조항에 대해서만 실렸어요.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나요. 그때도 ‘내가 남자였으면 찾아가서 기사에 대해 한바탕했을 텐데’ 생각하고 말았죠.”

2월12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이화학당에서 윤 전 총장을 만났다. 아흔을 바라보는 그의 나이 탓에 건강을 우려한 것도 잠시, 2시간을 훌쩍 넘은 대화 동안 윤 전 총장은 쉬는 틈 없이 문장마다 힘주어 답변을 이어갔다. 수십 년 전 일들을 더듬는데도 날짜와 지명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태어나 처음 ‘이해 못 할’ 성차별을 체감했던 어린 시절부터, 김대중 정부 당시  여성특위를 이끌며 남성 세계와 부닥쳤던 일화들을 그는 어제 일처럼 생생히 풀어놓았다. 

굴곡 많던 ‘싸움의 기억’들을 모두 미소로 회상하던 윤 전 총장은 최근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여성들의 ‘미투운동’을 말하며 한참 목이 메기도 했다. “오랜 세월 관념에 갇혀 있던 여성들이 마침내 들고일어난 현상입니다. 여성 스스로 더욱 현명하게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해요.” 견고한 전통과 싸우는 어려움을 잘 알기에, 인터뷰 동안 윤 전 총장은 오늘날 여성들에게 거듭 염려 섞인 당부를 건넸다.

ⓒ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임준선

열다섯에 홀로 월남길에 오르셨어요. 남한에 정착해 대학에 진학하기까지 곡절이 많았을 듯합니다.

“1945년 해방 후 열넷에 북한 원산사범학교에 입학했어요. 이듬해 어느 날 교무주임께서 아주 싱글벙글하며 나를 부르시더니, 내가 북조선 전체 여학생 중 유일하게 특별장학생으로 선정됐다고 하셨어요. 그러면서 ‘공부 열심히 하면 김일성대학에 진학해 여성 지도자가 될 수 있겠다’고도 하셨죠. 하지만 나는 그때부터 ‘아, 내가 여기 있어선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어릴 적부터 교회를 다니기도 했고, 이 체제에서 영화를 누리고 사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혼자 월남하겠다고 하니 부모님께서 아주 놀라셨죠. 하지만 말리진 못하셨어요. 추운 겨울 산중에서 밤을 새우고 동두천·연천·철원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그 후 전쟁도 겪고 피난도 경험하셨습니다. 학업은 어떻게 이어가셨나요.

“인천 쪽 친척 집에 잠시 머물기도, 우체국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바람 새는 공장에서 지내기도 했어요. 그러다 월남해 계신 내 초등학교 선생님이 찾아와 고교 진학을 도와주셨어요. 이후 광주여고를 거쳐 이화여고를 다니던 중 전쟁이 터졌어요. 부산으로 피난해 있는데, 이화여고 시절 강연을 왔던 강원용 목사님을 만나게 됐어요. 그분께 대학진학 상담을 받았어요. 무조건 이화여대를 가라고 하시는 거예요. 당시 설립된 지 1년밖에 안 된 학교에 가라니 당황스러웠지만, 어르신 판단이 나와 분명 다를 테니 따르자 해서 이화여대와 길고 긴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국내 최초 여성 헌법학자’로 불립니다. 1980년 8차 개헌 작업에 참여해 양성평등 조항을 포함시키기도 했습니다. 

“그 전에도 개헌 작업에 참여를 요구받았지만 정당한 정권이 아니라고 생각해 깊게 관여하진 않았어요. 그러나 8차 때 민주화 헌법의 필요성이 대두됐고 제대로 참여하게 됐어요. 몇 사람이 모여 개헌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발표하는 식으로 진행됐어요. 평등, 독재 방지 등 그때 내가 헌법에 명시하자고 부르짖고 주장한 것들이 대부분 빠졌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쉽고 화나는 부분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의 대답 “여자는 그런 거란다”

여성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총장님의 첫 ‘차별의 기억’은 무엇입니까. 

“어릴 적 우리 집은 농사를 지었어요. 부모님 두 분 다 밭에 나가 일을 하셨죠. 어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 식사를 준비하시고, 낮에 두 분이 같이 밭에 나가세요. 저녁 5시쯤 들어오시면 어머니는 또 집안일 하시고 저녁밥을 하세요. 아버지는 저녁 드시면 그대로 마을로 나가시고요. 어머니는 밤 11시 넘어 주무셨는데, 늘 ‘아이고, 다리야 허리야’ 하셨어요. 그래서 종종 어머니께 ‘왜 여자들은 이렇게 살아요?’ 물었어요. 어머니는 늘 ‘여자는 그런 거란다’라고 반복해 답하셨어요. 내 머릿속에 이 대답이 아주 오래 남았어요. 또 어느 날은 아버지가 족보를 가져오셨는데, 우리 여자 형제 셋 이름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우리 이름은 없냐고 물으니 아버지는 그냥 허허 웃기만 하셨어요. 그 기억도 아주 깊게 자리 잡고 있죠. 그게 출발이었나 봐요. 언제부터 남녀가 이리 살게 됐는지 알고 싶었고 언젠가는 바로잡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정계 진출에 대한 권유도 많았을 테고 스스로 마음도 있었을 것 같은데 교육자의 길만 걸으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어릴 때부터 국회의원이 돼 우리나라 여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법학과에 간 것도 판검사가 돼야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서였어요. 그런데 대학원에 들어가 조교 일을 하는데 어찌나 일이 많은지, 고시 공부할 시간이 도통 안 났어요. 일하는 도중에 도서관 구석 자리에 숨어 고시 공부하다가 교수님께 들켜 몇 번 야단도 맞았어요. 그때 교수님께서 정치는 안 된다, 학교에 남아 있으라 강조하셨어요. 거기에 설득당했죠. 일찍이 학부 때도 이상하게 나한텐 동급생들을 앉혀두고 강의를 진행할 기회들이 주어지곤 했어요. 이런 것들이 모여 학교를 오래 떠나지 못하게 됐죠.”

☞계속해서 (中)편 [윤후정 인터뷰]② “남녀차별금지법 왜 폐지했나”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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