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상대는 김정은이 아닌 ‘美 민주당’
  • 김원식 국제문제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1 16:00
  • 호수 153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펠로시 의장 “트럼프, 푸틴·김정은 같은 ‘깡패들’ 믿는 게 문제”
‘러시아 스캔들’ ‘대북정책’ 두고 공방전 예고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장을 걸어 나온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김정은이 큰 승리자(big winner)였다.”

지난 2월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렸던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전격 결렬된 직후 미국 민주당의 1인자인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이 주례 연설에서 내놓은 말이다. 사실 펠로시 의장은 물론 미국 정치권에서도 이번 정상회담이 이렇게 결렬로 마무리될지는 미처 예상치 못한 분위기였다. 두 정상이 만난 2월27일 당일에도 민주당의 또 다른 핵심 주류인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항복의 길을 가고 있는 것 같다”고 견제구를 날릴 정도였다. 그가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혼란에 빠져 아무 성과도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회담이 실패할 것이라는 전망이 아니라, 북한과의 ‘엉성한 합의’가 미국의 외교정책을 혼돈에 빠트릴 것이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오찬과 합의문 서명식만을 앞두고 있었던 북·미 정상회담은 전격 결렬됐다. ‘엉성한 합의’만 하고 나올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잔뜩 총구를 겨누고 있었던 민주당에도 아주 멋쩍은 상황이 되고 만 것이다. 

지난해 중간선거 승리 이후 하원을 장악해 2020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몰아치기’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민주당이 ‘엉성한 합의’나 ‘나쁜 합의’를 안 했다고 트럼프 대통령을 칭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바랐던 대로 합의를 거부하고 나오는 그를 향해 총을 쏠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펠로시 하원의장은 “북한은 비핵화는 없이 제재 해제만 원했다”고 북한을 비난했다. 하지만 “같은 레벨(level)도 아닌데, 세계에서 가장 힘센 인물인 미국 대통령과 얼굴을 마주할 기회를 또 줬으니 김정은이 큰 승리자”라며 둘을 싸잡아 비난하기도 했다.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같은 날 트위터에 “나는 북한과의 갈등을 끝낼 협상을 원하지만, 언제나 나쁜 합의의 가능성을 우려해 왔다”면서 “완전한 비핵화에 못 미치는 협상은 단지 북한을 더 강하게 만들고 세계를 덜 안전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다시 못을 박아 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단 북한 문제에 관해서는 ‘숨 고르기’ 자세를 취하면서 잠시 ‘휴전 상태’에 들어가겠다는 전략이다.

3월2일 ‘보수정치행동회의’에 참석한 트럼프 ⓒ AP 연합
3월2일 ‘보수정치행동회의’에 참석한 트럼프 ⓒ AP 연합

美 국민 시선, 하노이 아닌 코어 청문회장에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의 싸움은 전혀 다른 곳에서 불을 내뿜었다. 발단은 하노이 정상회담이 끝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이 행한 기자회견이었다. 여기서 북한에 억류됐다가 미국으로 송환된 직후 사망한 미 대학생 오토 웜비어 사건에 관해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의 말을 믿는다”며 “그는 그 사건을 몰랐던 것 같다”고 두둔하는 자세를 취한 것이 화근이었다.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 등 여야를 불문하고 여론의 거센 질타와 후폭풍에 휩싸이고 말았다. 펠로시 의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나 김정은 위원장과 같은 ‘깡패들(thugs)’을 믿는 것은 문제가 있다”면서 이참에 트럼프 대통령의 ‘러시아 스캔들’과 함께 묶어서 공격하는 노련한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 

하노이 회담 결렬로 북한 문제에 관해서만은 민주당의 공격을 잠시 피해 갈 줄 알았던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졸지에 엉뚱한 폭탄이 발등에 떨어진 꼴이 되고만 셈이다. 갈등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북한과의 ‘핵협상’은 지켜보지만, 늘 인권 유린 집단이나 사악한 정권이라고 목소리를 높여왔던 반(反)트럼프 진영에서 트럼프를 공격할 이보다 더 좋은 호재도 없기 때문이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이 향후 북한 핵 문제 처리 방향이 아니라, 웜비어 사건에 관한 자신의 발언을 해명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정이다.

이에 더해 하노이 정상회담 기간에 민주당 주도로 미국 정치권을 강타한 마이클 코언의 청문회도 트럼프 대통령의 입지를 좁혀 놓고 말았다. 거의 모든 미국 국민의 시선은 하노이 정상회담이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전직 개인 변호사 출신인 코언이 트럼프의 비리를 폭로하는 청문회에 쏠렸기 때문이다. 나름 자존심이 상한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코언의 청문회가 (내가) 하노이 회담장을 걸어 나오는 데 기여했을 것”이라고 민주당을 공격하며 반발하고 나선 것도 이를 잘 말해 준다.

2월27일 하원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마이클 코언 ⓒ AP 연합
2월27일 하원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마이클 코언 ⓒ AP 연합

“북한 문제로 트럼프-민주 싸움 재개”

일각에서는 이번에 트럼프 대통령이 “몸은 하노이에 가 있었지만, 그의 생각은 워싱턴을 절대 벗어나지 못했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러시아 스캔들’은 물론 이를 조사한 뮬러 특검의 결과 발표를 코앞에 둔 시점에서 그것도 한때 자신의 측근이었던 코언의 의회 청문회마저 다시 실시되자, 그의 정신이 북핵 문제 해결에 집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늘 북한 문제에 관해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고 여유를 보였지만, 오히려 국내 정치 문제에 관한 그의 조바심과 불안이 북한 문제 해결에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불안한 심리가 파국을 예고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워싱턴의 한 외교전문가는 “북·미 협상도 다시 시작해야 하듯이, 북한 문제에 관한 트럼프 대통령과 민주당의 싸움도 다시 시작하게 될 뿐”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비록 북·미가 어떤 합의를 한다고 해도 이 싸움은 2020년 대선까지 더 거세질 것”이라면서 “어쩌면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과 함께 민주당이라는 산도 동시에 넘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하원을 장악한 민주당은 청문회 개최 등의 권한을 이용해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을 줄줄이 의회로 불러내고 있다. ‘러시아 스캔들’ 의혹에 휩싸인 인사는 물론이고 대북정책에 관여하는 인사도 예외는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2020년 재선 운동을 앞두고 분명히 북한 문제에 관해서는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그래서 이를 둘러싼 그와 민주당의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을 뿐, 곧 또 한바탕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리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