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콘텐츠 시대, 사극의 가능성 새로이 주목
  • 정덕현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6 14:00
  • 호수 153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르물 입은 신세대 사극, ‘갓 신드롬’ 이어갈지 관심

글로벌 콘텐츠 시대의 사극은 한국적 색깔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콘텐츠다. 독특한 복색 하나만으로도 세계인의 시선을 잡아끌지만, 핵심은 시공간적 배경의 차별성 덕분이다. 최근 장르물을 입은 신세대 사극이 잇달아 주목을 받으면서 글로벌 콘텐츠로서 사극의 가능성을 새삼 보게 만든다. 

종영한 사극 tvN 《왕이 된 남자》는 최고시청률 10.8%(닐슨 코리아)로 지상파, 종편, 케이블을 통틀어 동시간대 최고 성적을 거두고 종영했다. 사실 시작 전만 해도 이 드라마의 성공은 쉽게 예상되지 않았다.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광해》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점은 이미 그 스토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는 새로울 것 없는 드라마의 재연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왕이 된 남자》 ⓒ tvN
tvN 드라마 《왕이 된 남자》 ⓒ tvN

하지만 《왕이 된 남자》는 이런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그것은 이미 ‘광해’라는 실존 임금의 이름을 지워버린 제목에서부터 어느 정도 의도된 것이었다. 2012년 개봉한 영화 《광해》 역시 광대가 왕 역할을 하게 된다는 파격적인 스토리를 갖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광해라는 역사 속 인물을 세움으로써 상상력과 역사 사이에 애써 균형을 맞추려는 노력을 보였다. 그래서 결국은 광대와 광해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하지만 《왕이 된 남자》는 단 몇 회 만에 광기에만 가득 차 있던 폭군을 독살하고 광대가 온전히 왕좌에 앉게 되는 파격을 담았다. 게다가 이 광대가 차츰 진짜 왕이 돼 가는 과정을 그렸다. 역사를 완전히 지워내고 이룬 이 파격적인 스토리의 변화는 《광해》와 완연히 다른 색깔로 시청자들을 몰입시켰다. 광대로 바뀐 걸 알면서도 사랑에 빠지는 중전과의 로맨스나, 광대라는 사실을 알지만 입증하지 못하는 적들을 ‘연기’를 통해 제압하는 광대의 모험담은 지금껏 사극에서는 좀체 보지 못한 발칙한 상상이었다. 

SBS 드라마 《해치》 ⓒ SBS
SBS 드라마 《해치》 ⓒ SBS

《왕이 된 남자》와 《해치》의 발칙한 상상

흥미로운 건 이런 상상들이 이제는 사극이라는 틀에서 시청자들에게 아무런 이물감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사극의 틀은 퓨전사극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의 ‘사극 같은(과거의 시공간을 담는다는 의미에서)’ 형식적 틀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틀 자체가 희미해졌다. 대신 미드 등을 통해 익숙해진 장르적 틀이 사극에 드리워졌다. 액션이 있고 로맨스가 있고, 음모와 정치, 배신의 스토리가 반전에 반전을 만드는 그런 장르물의 옷을 이제 사극이 차려입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SBS 《해치》는 영조의 연잉군 시절부터의 성장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그 색깔은 추리와 스릴러 장르로 채색됐다. 《해치》라는 제목이 달린 건 그것이 당대의 사헌부(지금으로 치면 검찰)를 상징하는 신화 속 동물이기 때문이다. 즉 이 사극은 연잉군을 다루고 있지만 사건을 수사하는 사헌부 관리들의 추리와 추적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당시 벌어졌던 갖가지 권력형 비리들을 연잉군이 동료인 박문수(권율) 등을 진두지휘하며 척결해 간다. 그 권력형 비리들은 당시 왕권을 농단하던 노론들과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연잉군의 이런 수사는 왕좌를 향한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된다. 

흥미로운 건 《해치》를 쓴 작가가 과거 이병훈 감독과 함께 《이산》 《동이》 《마의》 등을 작업하며 퓨전사극의 한 틀을 장식했던 김이영 작가라는 점이다. 그는 당시 사극을 이병훈 감독에게 배우는 입장이었지만, 이제는 독립해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다. 《화정》에 이어 현재 작업하고 있는 《해치》가 새로운 방식으로 영조를 다루고 있는 점은 이 작가가 어떤 성장을 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이미 천민 출신 무수리로 숙빈 자리에까지 오른 영조의 어머니를 소재로 《동이》를 쓴 바 있다. 그러니 그 후대의 이야기로서 《해치》를 온전히 자기 색깔로 그려내고 있다는 건 하나의 상징적 사건처럼 읽힌다. 과거 사극의 전통을 배웠지만 그것과는 달라진 이른바 ‘신세대 사극들’이 지금 태동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김이영 작가 이전에 김영현·박상연 작가의 신세대 사극들이 이미 존재했다. 김영현 작가 역시 이병훈 감독과 함께 《대장금》을 쓰며 사극에 입문했지만, 그는 박상연 작가와 협업하면서 《선덕여왕》 《뿌리깊은나무》 《육룡이 나르샤》 등으로 신세대 사극을 시도했다. 그중에서도 《뿌리깊은나무》는 사극이 장르물을 본격적으로 끌어들인 중요한 작품이다. 세종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궁중에서 벌어진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더해 흥미진진한 장르 사극의 가능성을 보여줬던 《뿌리깊은나무》 이후 이들은 《육룡이 나르샤》를 통해 조선 창건의 이야기를 여섯 명의 영웅 서사로 그려내는 새로움을 보여줬다. 김영현·박상연 작가는 현재 상고시대를 다룬 《아스달 연대기》라는 사극을 통해 올해 돌아올 예정이다. 이 작품 역시 시대적 특성상 판타지 장르와의 접점이 기대되는 사극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 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 ⓒ 넷플릭스

《킹덤》이 만든 갓 신드롬, 신세대 사극이 가야 할 길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로 만들어진 김은희 작가의 《킹덤》은 애초 조선시대라는 사극의 시공간과 좀비라는 글로벌 장르의 결합 때문에 주목된 바 있다. 그만큼 사극의 차별성이 존재하면서도 외국인들조차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장르물의 보편성이 이 드라마에 공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킹덤》은 그래서 역사적 인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시대라는 시공간이 존재하고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문화가 그 밑그림으로 제공되고, 그 위에 좀비 장르의 서사가 그려질 뿐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 작품을 통해 해외의 시청자들이 우리네 사극이 갖는 매력을 찾아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해외 시청자들에게 어필되고 있는 ‘조선시대 갓’에 대한 매력이다. 갓은 해외 팬들의 SNS에서 ‘킹덤모자(Kingdom hat)’라고 불리며 이 사극의 중요한 볼거리로 자리매김했다. “모든 사람들이 엄청나게 멋진 모자를 갖고 있네”라고 신기해할 정도다. 또 이 사극은 한옥이나 고궁 같은 사극의 배경이 갖는 아름다움을 사계의 미장센으로 담아내면서 역시 해외 팬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만큼 독특한 조선사회의 문화와 풍경에 해외 팬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

하지만 이런 신드롬도 결국은 사극이 역사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좀비 같은 보편적인 장르와 결합했기에 가능했다.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플랫폼에 사극이 독특하면서도 전혀 이질감을 주지 않고 떡하니 자리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된 건 다름 아닌 장르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글로벌 콘텐츠 시대에 보편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장르물의 옷을 잘만 걸친다면 사극은 우리네 콘텐츠의 중요한 아이콘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이른바 ‘신세대 사극’의 가능성에 주목하게 된다. 미드의 장르적 색채를 경험한 많은 신세대 사극 작가들의 과감한 도전과 시도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