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의 북한 ‘숙청史’
  • 김지영 기자 (young@sisajournal.com)
  • 승인 2019.03.19 15:00
  • 호수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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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권력 장악, 김정일은 도전세력 제거, 그리고 김정은은 실권 굳히기 위해 숙청의 칼 빼들어

북한 역사는 숙청의 연속이었다. 물론 숙청의 명분은 부정부패 혐의자나 세력 처단이었다. 하지만 실제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숙청을 악용한 사례가 적지 않다.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 대물림 체제에서 수많은 정적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거나 형장의 이슬로 떠났다. 김일성 주석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권력 도전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그리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실권을 굳히기 위해 숙청의 검을 빼들었다. 

1949년 3월 북한 수상 김일성(가운데),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김일성 뒤), 부수상 홍명희 등 북한 정부 대표단이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들어서고 있다. ⓒ 뉴스뱅크이미지
1949년 3월 북한 수상 김일성(가운데),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김일성 뒤), 부수상 홍명희 등 북한 정부 대표단이 스탈린을 만나기 위해 소련 모스크바 크렘린궁에 들어서고 있다. ⓒ 뉴스뱅크이미지

■ 김일성  자신의 추종세력도 제거 

1948년 북한 정권이 처음 수립될 당시엔 좌파 연합 형태였다. 김일성파(派)인 ‘빨치산파’와 남로당 계열의 ‘국내파’, 중국 만주와 함경도 일대에서 항일 투쟁한 ‘갑산파’, 중국 연안 중심으로 활동한 ‘연안파’, 소련계 한인 그룹 ‘소련파’ 등이 함께 손잡았다. 

하지만 절대권력은 결코 나눌 수 없는 법. 김일성파는 여타 세력을 제거해 나갔다. 김무정 제2군단장은 ‘연안파’ 거두였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평양 사수에 실패한 책임으로 강제노역장으로 끌려갔고 1951년 병으로 사망했다. ‘소련파’ 지도자였던 허가이는 1951년 북한 부수상에 올랐다. 하지만 김일성과 대립했고 숙청 대상이 되자 1953년 자살한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파’ 대표였던 박헌영은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1948년 9월9일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과 외무상에 올랐다. 하지만 한국전쟁 직후 패전 책임과 쿠데타 음모, 미제 간첩 등의 혐의로 권좌에서 밀려났다. 세력 기반이 남한에 있던 그로선 불가항력이었다. 갖은 고문 끝에 1955년 사형당했다. 남로당 계열 ‘국내파’도 몰락했다. ‘연안파’ 김두봉과 ‘소련파’는 1956년 김일성 독재화를 정면 비판하며 집단지도체제를 주장했다. 또 경공업 위주의 전후복구를 주장했다. 반면 김일성과 갑산파는 중공업 위주 건국시책을 밀어붙였다. 이른바 ‘8월 종파사건’이다. 김두봉은 1958년 노동당에서 제명당했고 강제노역에 끌려가 1960년 사망했다.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김일성 1인 지배체제는 더욱 강화됐다. 탈북 작가 림일은 ‘월간 북한’ 2014년 3월호 기고문에서 “북한 노동당의 정치 역사를 보면 1957년 중반까지 김일성의 반대세력 200여 명이 숙청됐다”고 밝혔다.  

박금철 부수상 등 ‘갑산파’는 경제우선정책을 주장하며 김일성의 ‘빨치산파’와 맞섰다. 또 김일성 후계구도를 둘러싸고도 갈등을 겪었다. 박금철도 1967년 정치범수용소에 갇히고 말았다. 

김일성은 자신의 추종세력인 ‘빨치산파’에도 숙청의 칼을 겨눴다. 1969년 군벌타도를 명분으로 군 총참모장 최광 대장 등을 제거했다. 사선(死線)을 함께 넘은 어제의 동지도 라이벌로 인식되는 순간 숙청 대상자일 뿐이었다. 김일성은 이렇게 정권 초기부터 수많은 정적과 혈투를 벌이며 유일체제와 주체사상을 구축했다. 

■ 김정일  김일성 사후 2000여 명 숙청

권력 장악을 위해선 친인척도 제거 대상이었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김정일의 의붓어머니 김성애(2018년 사망), 김성애의 아들 김평일 등은 좌천당했다. 김정일 후계세습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공개 석상에서 “김성애 동무는 나와 같은 사람이다. 그녀의 지시는 나의 지시와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일성을 빼닮은 김평일도 김정일에겐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김평일은 30년 넘게 해외를 전전하고 있다. 2015년부턴 체코 대사로 있다. 김영주는 현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명예부위원장이다. 실권 없는 명예직에 불과하다. 

김정일 후계구도가 굳어지던 1976년 김동규 부주석과 장정환 인민무력부 부부장, 유장식 대남사업 담당 등이 김정일의 정책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다 숙청됐다. 

1992년 소련 유학파 장교 일부가 소련과 내통한다는 보고를 받은 김정일은 “쿠데타 음모를 적발했다”며 소련 프룬제군사대학 출신 장교 20여 명을 처형했다. 600여 명은 강제로 제대시켰다. 군부를 장악하지 못했던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는 계기가 됐다.

1994년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김정일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세력을 제거해 나갔다. 1990년 후반 사회안전성(경찰)을 통해 당 간부와 가족들을 무려 2000여 명이나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보냈다. 2009년엔 화폐개혁 실패의 희생양으로 박남기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처형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2013년 12월12일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을 열어 장성택에게 ‘국가전복음모의 극악한 범죄’로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바로 집행했다. ⓒ 연합뉴스
북한은 2013년 12월12일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을 열어 장성택에게 ‘국가전복음모의 극악한 범죄’로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바로 집행했다. ⓒ 연합뉴스

■ 김정은  고모부 등 후견인들 처단

2011년 12월17일 김정일 사망 후 지도자로 부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 역시 굵직한 숙청사를 남겼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 후견인으로 고모부 장성택과 리영호 전 총참모장(대장), 김영춘 인민무력부장(현 인민무력상) 등이 꼽혔다. 하지만 이들 모두 내침을 당했다. 2012년 7월 리영호는 모든 직위에서 해임됐다. 현재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북한 당국은 2012년 9월 전군에 하달한 자료에서 “개인의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양봉음위(陽奉陰違·앞에선 순종하는 척하고 속으론 딴마음을 품음)하는 자들, 주색금(술·여자·돈)에 빠져 사상적으로 타락한 자들이 우리 일꾼들 속에 있으며 이는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 앞에 천추에 두고 씻을 수 없는 대죄악이다. 리영호 같은 충신의 탈을 쓴 간신들은 우리 당과 국가의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다”고 밝혔다. 

결정적인 장면은 2013년 12월12일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 판결 직후 처형된 사건이다. 죄명은 반당(反黨)·반혁명 종파 행위였다. 장성택 세력도 일거에 무너졌다. 당시 중국 단둥 등 북·중 접경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역일꾼들도 대거 북으로 소환됐다. 해외에서 활동하던 ‘장성택 일당’을 색출하기 위한 조치였다.   

2015년 김정은 최측근으로 분류됐던 변인선 총참모부 작전국장마저 처형됐다. 김정은에게 이견을 제시했다는 이유였다. 같은 해 4월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김정은 연설 도중 졸았다는 이유 등으로 처형당했다.

2015년 5월엔 최영건 부총리가 ‘성과 부진’ 명목으로, 2016년 7월엔 김용진 부총리가 최고인민회의 도중 자세가 불량했다는 이유 등으로 각각 처형됐다. 김정은 역시 대대적인 숙청작업과 동시에 충성경쟁을 유도하면서 실권을 굳혀왔다. 2017년 2월13일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공항에서 화학무기인 신경독(VX) 공격을 받고 피살됐다. 김정남을 살해한 여성 2명 가운데 인도네시아 국적자는 3월11일 전격 석방됐다. 석방 이유는 불분명하고 피살 사건 전모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김정은을 향한 짙은 의심의 눈길만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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