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 기묘하고도 매혹적인 거대한 ‘뻥’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3.30 12:00
  • 호수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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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필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

2017년 할리우드를 이야기하면서 조던 필을 빼놓기란 《겟 아웃》을 본 이들에겐 불가능에 가깝다. 연출 경험이 전무했던 이 신인 감독은 인종차별을 다룬 저예산 호러 영화 《겟 아웃》으로 할리우드를 흔들었다. ‘인상적인’ ‘놀라운’ ‘독창적인’…. 긍정적인 수식어들이 총동원돼 조던 필을 환대했다. 

그래서다. 조던 필의 차기작을 기다리며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 건. 《겟 아웃》이 부풀려 놓은 거대한 기대감을 어쩔 것인가. 획기적인 데뷔작을 내놓은 감독들을 괴롭혔던 ‘소포모어 징크스’를 밟으면 어쩌나. 걱정한 게 무안하게도, 조던 필의 두 번째 작품 《어스》는 ‘소포모어 징크스란 게 대체 뭐요?’라고 말하는 듯한 작품이다. 《겟 아웃》을 훌쩍 뛰어넘는 작품이라는 일각의 반응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조던 필이 품은 비범함을 더 이상 의심하지 않게 만들었다. 그렇다. 《겟 아웃》으로 눈여겨볼 ‘유망주’로 평가받던 조던 필은 이제 《어스》를 통해 ‘믿고 찾을 만한 감독’으로 등극했다. 이제 그 이유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한다.

조던 필이 공포를 보여주기 위해 《겟 아웃》에서 끌고 온 건 ‘신체 강탈’이었다. 《어스》에선 나와 똑같이 생긴 존재 ‘도플갱어’다. 신체 강탈이나 도플갱어는 영화적으로 그리 신선한 소재는 아니다. 그런데 이 특별하지 않은 소재들이 조던 필 특유의 리듬을 만나면서 특별해졌다. 조던 필의 특기는 인간 밑바닥에 깔려 있는 욕망을 현실 공포에 접목해 부풀리는 솜씨다. 《겟 아웃》에선 백인들이 흑인을 사냥했다. 흑인의 건강한 육체에 자신들의 뇌를 이식하기 위해서였다. 《어스》에선? 반전이라 밝힐 수 없지만, 역시나 ‘뻥’을 그럴싸하게 잘 친다. 조던 필의 ‘뻥’이 힘이 있는 건, 그것이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 존재’에 대해 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질적인 동시에 매혹적이다. 

영화 《어스》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영화 《어스》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트럼프 시대의 우리(US)에 대한 날 선 비판

《겟 아웃》이 그랬듯 《어스》에도 가는 길목마다 복선들이 촘촘하게 깔려 있다. 영화는 아메리카 대륙 지하 곳곳에 터널들이 존재한다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동시에 카메라는 1986년 미국 전역에서 진행된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Hands Across America)’ 캠페인이 소개되는 TV 방송을 슬쩍 훑는다. 놓치면 안 되는 중요한 힌트들이다.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는 사람이 길거리로 나와 15분간 손을 맞잡는 퍼포먼스로, 굶주린 사람을 위한 기금모금을 독려했던 캠페인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이 나부꼈던 레이건 시절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정말로 미국인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에 소득은 상류층에 집중됐다. 하류층은 빈곤의 나락으로 더 떨어졌다. 한마디로 모순의 시대였다. 앞에서는 ‘함께 살자’를 외쳤지만, 은밀한 곳에서 굶주린 자들은 소외됐다. 조던 필은 그 시대가 품었던 모순들을 《어스》 곳곳에 침투시켰다.

《어스》의 주인공 애들레이드가 트라우마를 겪는 시공간이 1986년 캘리포니아 샌타모니카 비치인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곳은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의 인간 체인이 완성됐던 장소다. 이곳에서 어린 애들레이드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나’를 발견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는다. 성인이 된 애들레이드(루피타 뇽)는 남편 게이브(윈스턴 듀크), 딸 조라(샤하디 라이트 조셉), 아들 제이슨(에반 알렉스)과 함께 휴가차 이곳을 다시 찾는다. 어린 시절의 악몽이 애들레이드를 괴롭힌다. 그런 그녀 앞에 빨간 옷차림에 가위를 든 가족이 나타난다. 애들레이드의 가족과 똑 닮은 도플갱어들이다. 

이들의 정체는 뭘까. 애들레이드는 지체하지 않고 묻는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냐?” 애들레이드의 도플갱어 레드(루피타 뇽)가 답한다. “우리(US)는 미국(United States)이야.” 이쯤이면 짐작하겠지만 이 영화의 제목인 《어스》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흥미로운 건, 어느 쪽으로 읽든 흥미롭다는 것이다. 전작에서 위선적인 백인 주류사회에 야유를 보냈던 이 흑인 감독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번엔 ‘너’만이 아닌, ‘우리/미국인’ 모두가 비판의 대상이다. 미국이란 나라의 평등과 자유가 어떤 기반 위에서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서 은폐된 거짓은 없는지, 상처받은 사람은 없는지, 왜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지, 그러므로 이 세상은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그런데 이 세상을 만든 괴물은 ‘우리’라고, 《어스》는 트럼프 시대의 미국을 저격한다.  

다만 《겟 아웃》과 같은 통쾌함을 상상한 국내 관객이라면 《어스》가 조금 실망스럽거나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극 전반에 흘러내리는 복선들을 알아채기엔 《어스》 자체가 지극히 ‘미국적’이기 때문이다. 과연 ‘핸즈 어크로스 아메리카’에 대해 자세히 파악하고 있는 관객이 얼마나 있을까. 영화에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예레미야서 11장 11절’의 메시지 역시 스토리를 시원하게 관통하지는 못한다. 흩어져 있던 복선들이 응집되는 후반부 반전의 쾌감이 《겟 아웃》보다 미약하게 느껴진다면 이 때문이다. 

다행히 《어스》에는 시대적 배경과는 무관하게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이 넘친다. 조던 필은 백인들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공포영화 장르의 클리셰들을 과감하게 인용하고 배반하며 자기 식으로 변주해 낸다. 배우들에게 참고할 공포 영화 리스트를 직접 전달하기도 했는데, 스탠리 큐브릭의 《샤이닝》부터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 등 10여 편에 달하는 명작들이 레퍼런스로 삽입돼 있어 숨은 그림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이클 잭슨의 《Thriller》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의상, 경찰을 애타게 찾는 상황에서 흘러나오는 전설의 힙합 그룹 N.W.A의 노래 ‘F**k The Police’(경찰 엿 먹어), 영화 《죠스》의 이미지 등 대중문화를적절히 버무려 낸 영리함도 빛난다. 

위트 있게 비틀어진 기묘한 캐릭터들 

또 하나. 《겟 아웃》이 그랬듯 조던 필은 이번에도 캐릭터를 허투루 방치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공기가 독특해 보인다면, 이는 위트 있게 비틀어져 있는 기묘한 캐릭터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다. 특히 자신들과 얼굴을 똑같이 한 침입자에 맞서는 주인공 가족들의 대처 능력이 매우 코믹하다. 애들레이드의 남편 게이브는 의외의 ‘허당미’로 공포영화의 클리셰를 뒤집는다. 딸 조라와 아들 제이슨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강단과 고집으로 웃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모를 엇박자 리듬을 극에 부여한다. 루피타 뇽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존재감이다. 표정과 몸짓도 미스터리하지만, 한껏 긁어서 표현한 목소리가 특히 섬뜩하다.  

《어스》는 흔히 말하는 대중적인 재미를 갖춘 작품일까. 글쎄, 이 부분은 취향의 영역이라 확언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 영화가 특별하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바로 고개를 끄덕일 의향이 있다. 취향과 상관없이 이 영화엔 ‘뭔가 대단한 걸 보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매혹적인 ‘뻥’이 존재한다. 곱씹을수록 다채롭게 느껴질 상징들도 가득하다. 무엇보다 만화나 소설에 원안을 둔 작품이 만연한 작금의 할리우드에서 《어스》 같은 기묘한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만날 수 있다는 건 기쁨이다. 조던 필의 다음 작품을 기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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