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철수” 외쳤던 美대통령이 존경받는 이유
  • 이철재 미국변호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0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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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변호사가 본 재밌는 미국] 94세 지미 카터, ‘미국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 등극
재임 동안 비판 받았지만 퇴임 후엔 반대자들도 지지해

3월22일 미국에서 잔잔한 소식 하나가 전해졌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역사상 가장 장수한 대통령’이란 기록을 세운 것. 그의 나이 94세하고도 172일째 되는 날이었다. 지미 카터 전엔 그보다 4개월 정도 먼저 태어난 41대 대통령 조지 H.W.부시(아버지 부시)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시는 지난해 11월에 세상을 떠났고, 4개월 뒤 카터가 최장수 대통령으로 등극했다.

2018년 9월18일(현지시각)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에 중간선거 지원 나온 지미 카터 ⓒ 연합뉴스
2018년 9월18일(현지시각) 미국 조지아주 플레인에 중간선거 지원 나온 지미 카터 ⓒ 연합뉴스

‘최장수 미국 대통령’ 된 지미 카터

1976년 11월 지미 카터가 미국 3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던 날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한국 정부는 제럴드 포드의 재선을 바라고 있었다. 카터의 선거 공약 중 하나가 주한미군의 철수였기 때문이다. 

12선 하원의원 포드는 1973년 리차드 닉슨의 부통령이었던 스피로 애그뉴(Spiro Agnew)가 탈세와 돈세탁 스캔들로 사임한 뒤 닉슨에 의해 부통령으로 지명됐다. 그는 공화당원이었지만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로부터 전적인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미국 수정헌법 25조에 의해 닉슨이 지명한 그를 상원이 ‘찬성92표 반대 3표’로 동의, 부통령이 됐다.

이듬해인 1974년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 위기에 몰려 사임했다. 이로써 포드는 ‘대통령 유고시 부통령이 승계한다’는 원칙에 따라 38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포드는 운이 좋은 사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원의원에서 선거를 한 번도 거치지 않고 졸지에 부통령과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2년은 닉슨의 사임으로 갈라진 나라를 봉합하고 이끌어 나가야 했던 힘든 시기였다. 포드는 나라의 상처를 봉합하는 차원에서 닉슨을 사면했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치명적인 선택임을 알았지만, 갈라진 나라를 하루 빨리 치유하고 새 출발을 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했다.

40년이 넘은 후 현재 미국에선 포드의 결정에 반대했던 사람들조차 “돌이켜 보니 사면이 최선이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당시 많은 미국 국민들은 닉슨을 사면한 포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결국 1976년 11월 대선에서 포드는 남부 조지아 출신의 민주당 후보 카터에게 패했다. 그의 생애 최초의 선거 패배였다. 

취임한 카터는 당시 3만 명에 이르던 주한 미군의 철수를 밀어 붙였다. 1979년 그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환영식장에 박정희 대통령과 나란히 앉은 모습을 봤다. 당시 어렸던 내가 보기에도 방금 서로 멱살을 잡고 싸우다 나온 듯한 얼굴이었다. 그만큼 둘은 주한미군 주둔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했다. 훗날 카터는 외국 정상들과 나눈 대화 중 가장 언짢았던 경험으로 박 대통령와의 대화를 꼽았다. 개인적으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나빴다. 

카터는 고집했지만 미군 철수는 거의 백지화되다시피 했다. 미국 내 반발도 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터는 끝내 포기하지 못했다. 《두 개의 한국(The Two Koreas)》이란 저서로 유명한 미국의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는 책에서 “카터가 유독 주한미군 철수에 대해서만큼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집착했다”는 말을 한다.

때문에 그 당시 한국인들에게 카터는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한 게 사실이다. 반미 감정이라는 게 거의 없던 시절, 국민들이 미국 대통령을 그토록 혐오하는 걸 처음 본 것 같았다.

 

‘주한미군 철수’ 밀어붙여 원망 산 카터

한국과의 외교관계 경색 이외에 대통령으로서도 카터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미국 경제는 만성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고 있었다. 게다가 1979년 미국 외교관과 민간인들이 이란에 억류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그의 인기는 곤두박질쳤다. 인질 석방을 위한 외교적 협상이 결렬됐고, 구출 작전마저 참담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카터는 1980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카터의 지지자들은 몇몇 공적을 들어 그를 치켜세운다. 공적이 ‘제로(0)’인 대통령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단 전반적으로, 또 객관적으로 봤을 때, 카터의 재임 기간은 크고 작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랬던 카터가 자신을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의 존경까지 받게 된 것은 대통령에 낙선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뒤부터다. 

그는 ‘카터재단’을 세워 세계 80개국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특히 1986년부터 오염된 물을 통해 인간 몸속에 들어가 서식하는 기니아충 박멸에 많은 공헌을 해왔다. 

2018년 8월27일(현지시간) 미국 인디애나주 미셔와카에서 '해비타트 포 휴매니티(Habitat for Humanity)' 활동에 참가 중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로잘린 여사가 손을 잡고 이동하고 있다. 해비타트는 저소득층을 위해 무료로 주택을 지어주는 국제자선단체로 카터 전 대통령은 부인과 함께 35년째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8년 8월27일(현지시간) 미국 인디애나주 미셔와카에서 '해비타트 포 휴매니티(Habitat for Humanity)' 활동에 참가 중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과 부인 로잘린 여사가 손을 잡고 이동하고 있다. 해비타트는 저소득층을 위해 무료로 주택을 지어주는 국제자선단체로 카터 전 대통령은 부인과 함께 35년째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84년부턴 매년 1주일 씩 해비타트(Habitat for Humanity) 운동에 자신의 시간과 재능을 기부했다. 목수가 돼 집 없는 이들을 위한 집을 지었던 것이다. 특히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뉴올리언즈 지방을 강타했을 때, 해비타트 운동의 일환으로 재난지역을 찾아 무너진 집들을 복구했던 일은 유명하다.

2002년엔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간 분쟁지역의 평화를 위한 외교 사절로서의 역할을 인정받은 것이다. 또 1994년 김일성 주석을 만나 외교적 담판을 벌여 전쟁 위협을 해소한 것은 그의 대표적 외교 성과로 꼽힌다.

2015년 8월엔 치사율 높은 암의 일종인 멜라노마가 뇌로 전이된 사실을 스스로 기자회견을 열어 밝혔다. 카터는 이 자리에서 여유롭게 웃음을 잃지 않고 얘기했다. 이후 새로운 암 치료요법인 면역치료법(Immunotherapy)을 받으면서 상태가 나아졌다. 치료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카터는 기다렸다는 듯 해비타트 운동에 복귀했다. 지금은 암의 증후가 모두 사라진 상태라고 한다. 

 

“부자는 단 한 번도 관심사가 아니었다”

미국 대통령들은 퇴임을 하면 평생 연금을 받으며 한 회에 수억 원을 받고 강연을 한다. 민생을 책임지겠다는 한국의 장관 후보들은 청문회 때마다 부동산 투기 의혹에 휩싸인다. 

그에 비해 카터는 한국 돈으로 2억 원이 채 안 되는 집에 살며 달러스토어(1달러 안팎에 생필품을 살 수 있는 소매점)에서 쇼핑을 하고 있다. 역대 백악관의 요리사를 인터뷰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카터 시절 요리사는 “카터가 워낙 건강식 위주로 소식하는 검소한 식단을 찾아 오히려 주방장으로서는 재미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근검과 절약이 몸에 밴 그는 스스로 불편함 없는 삶을 살았다. 부자가 되는 건 단 한 번도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흔히 장수를 오복(五福)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런데 카터가 지나온 삶과 현재의 삶을 멀리서 바라보면, 그가 오래도록 미국인들 곁에 있다는 게 그들의 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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