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뒤흔든 딕 체니의 손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06 12:00
  • 호수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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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이스》가 인물과 역사를 다루는 방식

상업 극영화와 교양 다큐멘터리 어디쯤. 《바이스》는 이 어울리지 않는 두 장르 사이를 가뿐하게 오간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부통령이었던 딕 체니가 휘둘렀던 무소불위의 권력을 조명하는 영화다. 그러나 단순히 백악관 밀실 행정을 통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만을 고발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결과에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도다. 지금 미국 그리고 세계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됐는가. 딕 체니 같은 괴물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나. 《바이스》의 카메라는 세계의 풍경을 뒤바꿔놓은 2002년 9월 11일 뉴욕 테러의 순간부터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중요한 역사적 국면들을 날카롭게 파헤친다. 당연히 이는 세계 정세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바이스》의 한 장면 ⓒ ㈜콘텐츠판다
영화 《바이스》의 한 장면 ⓒ ㈜콘텐츠판다

《빅쇼트》의 형제 영화

《바이스》 이전에 《빅쇼트》(2015)가 있었다. 2008년 부동산 대출 시장이 무너지고 월스트리트의 주가가 폭락했던 미국 금융위기가 배경인 영화다.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판돈을 걸었던 괴짜들은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벌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관객과 평단을 놀라게 한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다. 그 배경을 보여주는 대담하고 재치 넘치는 연출이었다. 

복잡한 경제 전문 용어를 설명하는 《빅쇼트》의 방식은 쉽고도 효과적이었다. 영화와는 크게 상관없는 카메오들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마고 로비가 거품 목욕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을 설명하는 식이었다. 거품은 배우의 섹시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버블 경제에 대한 당연한 은유였다. 자산담보부증권(CDO)을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해산물 스튜 요리 장면이 등장했다. 애덤 매케이 감독이 한 요리 연구가의 회고록에서 ‘해산물 스튜는 절대 주문하지 말라. 팔 수 없는 모든 것을 다 넣고 요리하기 때문’이라는 문구를 읽은 뒤 CDO에 대한 완벽한 비유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극적 재미를 위한 연출이었을까? 물론 그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다만 감독이 가졌을 또 하나의 의도는 분명하게 읽힌다. 그는 관객이 ‘복잡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로부터 눈을 돌리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무언가를 고민한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관객이 처한 현실이며,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정치다. 《바이스》는 한심한 청춘이던 딕 체니(크리스천 베일)가 백악관에 발을 딛고, 금융 대기업의 정책 자문을 꿰차고, 세계 최대 석유 기업 핼리버튼의 CEO를 거쳐 펜타곤 수장 그리고 마침내 미국 부통령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좇는다. 또한 그가 재임 기간 내렸던 결정들이 세계의 흐름을 어떻게 뒤바꿔 놓았는지를 파헤친다. 부통령(Vice President)을 뜻하는 단어인 ‘바이스’는 범죄나 악덕 행위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보다 더 맞춤인 단어는 찾기 어렵다는 데 동의하게 된다. 

관객은 그 정체가 미리 온전하게 밝혀지지 않는 내레이터의 해설에 따라 딕 체니의 인생 여정을 따라간다. 백악관 인턴 시절부터 ‘헌신적이고 겸손한 권력의 시종’을 자처한 그는 훗날 국방장관의 자리에 오르는 도널드 럼즈펠드(스티브 커렐)를 만나며 권력의 길로 들어선다. 처음에는 보잘것없는 자리다. 다만 운은 따랐다. 딕 체니의 아내 린 체니(에이미 애덤스)는 타고난 전략가이자 야망가였고, 훗날 미국 역사상 가장 한심한 대통령으로 기록된 조지 W 부시(샘 록웰)는 러닝메이트를 제안한다. 물론 부통령이 권력의 중심이 아닌 자리임을 간파하고 있던 딕 체니는 군 지휘권과 대외 정책 같은 행정권을 요구한다. 물론 부시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후 권력을 쥔 부통령에게서 헌신과 겸손은 자취를 감춘다. 


적나라한 고발과 냉소적 유머의 합

감독은 이번에도 이 영화를 딕 체니라는 인물의 딱딱한 전기 드라마로 만들 생각이 없다. 《바이스》의 흐름은 때론 기발함을 넘어 당혹스러울 정도로 자유분방하다. 압권은 레스토랑 장면. 딕 체니가 도널드 럼즈펠드를 포함한 참모진들과 식사 중 대화를 한다. 그들은 적군 고문, 영토 통제권, 전쟁권한법 등이 적힌 ‘스페셜 메뉴’를 선택한다. 참혹한 이미지들의 나열 끝에 럼즈펠드는 “그거 맛있겠다”며 중얼거린다. 《바이스》는 132분간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 국가에 의해 신분이 노출된 전직 CIA 요원, 부시 정권 시절 백악관 서버에서 사라진 2200만 건의 이메일, 오늘날 IS 테러 등 사건을 낱낱이 고발한다. 그 모든 것이 겨냥하는 ‘악의 축’에는 딕 체니가 있다.

그렇다면 《바이스》는 다루는 인물에 대해 중립을 지키고 있는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엔딩 부분에서 딕 체니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기는 한다. 그러나 처음으로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관객에게 궤변에 가까운 항변을 늘어놓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섬뜩하다. 그릇된 신념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한 명확한 증거를 목격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쿠키 영상을 통해 이것이 편향된 시선, 그러니까 진보 쪽으로 확실하게 기운 시선이라는 점을 명확히 밝힌다. 이토록 적나라한 고발에도 불구하고 정치에는 무관심하며 앞으로도 무관심할 이들을 꼬집는 냉소적 유머를 발휘하기도 한다. 

인물과 역사를 다루는 방식에 특정한 틀이 있는 건 아니다. 반드시 고증에만 충실한 다큐멘터리여야 할 필요도 없다. 역사는 시대에 따라 해석돼야 하는 존재다. 사실에 입각해 풍성한 자료를 제시하면서도 시대와 인물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법. 《바이스》가 제시하는 방식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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