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점령한 ‘사치 끝판왕’ 블루 델프트 타일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06 15:00
  • 호수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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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자기 세계사③] 델프트 타일, 서쪽 끝 영국에서 동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유럽 전역 물들여

낭만적인 여행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t. Petersburg)는 꽤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도스토옙스키와 푸슈킨의 도시이자, 전설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가 춤을 추었던 마린스키(Mariinsky) 극장과 체호프의 《갈매기》가 초연된 알렉산드린스키(Alexandrinsky) 극장이 있으며,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콥스키, 프로코피예프,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등 불멸의 작곡가들을 배출한 콘서바토리(conservatory)가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세계 최고 수준의 에르미타주(Hermitage) 박물관도 있고, 도시 자체가 러시아 혁명의 중심으로 한때 레닌그라드라 불렸던 정치적 격변의 용광로였다.

네바 강변의 에르미타주 박물관 풍경.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늪지에 세워진 거대한 운하 도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이름은 이 도시의 수호자가 성 베드로(St. Peter)라는 사실과 이 도시를 만든 사람이 표트르 대제(Peter I the Great·1672~1725), 즉 표트르 1세라는 사실을 동시에 알려준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많은 예술인들이 명멸한 이 위대한 도시가 이탈리아 베니스와 같은 운하도시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바이킹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표트르 대제는 조국을 유럽의 제국으로 발돋움시키려는 야망에 불타올랐다. 그리하여 발트해를 향해 있는 네바강 하구의 음침한 섬들과 늪지대를 새 도읍지로 삼고자 했다.

광활한 늪 위에 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에 백성은 ‘미친 짓’이라고 조소했지만, 표트르 대제는 스스로 오두막에 기거하며 공사를 독려했다. 전 국토의 석조 건축을 금지시키고 모든 자재를 네바강 하류로 집결시켰다. 100개의 섬을 365개 다리로 이은 오늘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렇게 간척한 인공도시, ‘무척 넓은 베니스’다.

멘시코프 저택의 델프트 타일로 장식된 천장 ⓒ 조용준 제공

델프트 타일로 뒤덮인 멘시코프 저택

멘시코프(Alexander Danilovich Menshikov·1673~1729)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대 총독이었던 인물이다. 표트르 대제의 오른팔로 당대 러시아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세조의 왕권 찬탈을 도운 심복으로 나중에 영의정까지 지낸 한명회(韓明澮) 같은 인물이랄까. 

그러므로 멘시코프 저택은 총독 관저로 지어진, 이 도시의 1호 석조건물이다. 1710년부터 짓기 시작해 1727년에 완공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개인 주택 중 18세기 것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 

멘시코프 저택에 들어서면 일단 입이 떡 벌어진다. 당대 유행품은 다 모아놓아 화려하기 그지없다. 중국풍의 시누아즈리 수준도 여간이 아니어서 어디서 그렇게 동양 병풍이나 나전칠기 자개장의 가구, 중국 도자기 등 진수라 할 만한 것을 잘도 뽑아왔는지 모를 일이다. 이곳이 멀고 먼 러시아의 한 지방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멘시코프 저택의 침실. 침실까지 델프트 타일로 장식한 것은 거의 볼 수 없는 회귀한 예다. ⓒ 조용준 제공

가장 놀라운 것은 거실과 침실의 모든 벽면을 네덜란드의 파란 델프트 타일이 뒤덮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겨울이 긴 추운 도시다. 그렇지 않아도 추울 텐데 온 집 안을 파란 타일로 도배해 놓았으니 얼마나 더 한기가 느껴졌을까. 사실 타일은 깨끗하고 청소가 쉬우며 내구성이 강한 동시에 장식 효과도 뛰어나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독일이나 네덜란드처럼 겨울이 길고 추위가 심한 지역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자재다. 혹독한 추위에 시달려야 하는 러시아는 더더욱 그렇다. 표면이 차가워서 추위를 더 느끼게 만들뿐더러 한파에 깨질 가능성도 높다. 그래서 타일을 건축자재로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지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 북아프리카, 중동처럼 주로 더위가 심한 지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유럽에서 타일을 사용한 것은 도자기 수집과 마찬가지로 역시 내로라하는 사람들의 호사와 과시욕이 부추긴 건축자재의 유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네덜란드의 일반 가정집에는 17세기와 18세기 타일 장식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 많다. 멘시코프 저택 역시 현대 실내장식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을 이렇게 떡하니 벌여놓은 것은 델프트 타일이 당시 유행의 최고봉, 사치의 ‘끝판왕’이었기 때문이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 고성(古城) 투어를 많이 해 본 사람들은 권세가 높았던 실력자들의 성은 예외 없이 거실 벽이나 식당과 부엌, 화장실 등이 파란 타일로 장식된 것을 보았을 터다. 그게 모두 델프트 타일이다. 중국 도자기를 사들여 시누아즈리 취향을 만족하던 왕실과 귀족들에게, 벽면을 파랗게 장식할 수 있는 델프트 타일은 새로운 사치였고, 곧바로 유행이 됐다. 그래서 이들 델프트 타일은 유럽의 서쪽 끝 영국에서부터 동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유럽 전역을 물들였던 것이다.

병사들의 모습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폴리크롬 타일 ⓒ 조용준 제공

청화백자 영향 받은 블루 타일 해외 수출도 이어져

그럼 델프트 타일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전 회에서 우리는 유럽 최초 동양 자기 ‘짝퉁’으로서의 델프트 자기를 봤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도자 산업이 융성할 수 없는 결정적인 결격 사유가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자기를 만들 도토(陶土), 즉 흙이 없었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원료가 될 흙을 영국이나 독일 등 가까운 나라에서 구입해 사용했다. 하지만 당시는 유럽 국가들이 틈만 나면 싸워대던 시절이었으므로 원료 수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상대국이 흙 수출을 막아버리면 자기를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고 대안으로 나온 것이 바로 델프트 타일이었다. 16세기 초에 마욜리카 도기가 이탈리아에서 이주한 도공들에 의해 안트베르펜에서 처음 생산되기 시작한 것처럼 타일 역시 이들이 함께 가져온 ‘최첨단 제품’이었다. 이 당시 타일은 마욜리카 도기의 영향으로 다채색(polychrome) 장식 문양이 들어갔다. 그러나 전 회에서 말한 것처럼 안트베르펜이 스페인 통치에 들어간 이후 종교 탄압에 의해 사기장들이 네덜란드와 독일 등지로 이전하면서 타일 제작의 중심지 역시 델프트와 인근 로테르담(Rotterdam)으로 이동했다. 

전성기에 델프트에는 32개, 로테르담에는 10개의 가마가 있었다. 이 중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공장은 1653년에 세워진 ‘로열 도자기 병(De Koninklijke Porceleyne Fles=The Royal Porcelain Bottle)’ 회사 하나뿐이다.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은 블루 타일은 1620년께부터 등장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가 점점 부강해지면서 델프트 블루 타일에 대한 수요도 증가했다. 굴뚝이나 난로 주변, 난간과 계단, 부엌, 창이나 출입구의 상인방(上引枋·lintel) 등에 타일이 붙기 시작했다. 

중국 길거리에 흑인들이 등장하는 희귀 폴리크롬 타일(1690~1730 제작 추정,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 조용준 제공

타일에 그리는 그림도 점차 일상생활을 묘사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일하는 남녀, 놀이하는 아이들, 배나 말을 타는 남자, 성경 속의 다양한 풍경 등이 빈번하게 등장했다. 나중에는 렘브란트 등 유명 화가의 작품을 모델로 하여 그대로 모사한 작품들도 상당수 나오게 된다.

흑인이 등장하는 사진의 폴리크롬 타일은 매우 흥미롭다. 1690년과 1730년 사이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타일은 중국의 저잣거리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사이에 흑인들의 모습이 눈에 띈다. 이처럼 아라비아 상인도 아닌 흑인이 중국 길거리를 활보하고 다녔을 만큼 청나라 시절의 대외교역은 활발했을까? 

하긴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노예를 수입해 사고파는 노예시장을 처음 연 것이 1444년이었다. 그러니 흑인들이 유럽 국가들의 대서양 무역 선단에 편입돼 중국에 가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당시 아시아와 유럽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깝게 교류하고 있었을 것이다.

델프트 타일이 유명해지면서 1650년께가 되자 해외에서의 주문도 늘어났다. 포르투갈과 그 식민지였던 브라질은 델프트 블루 타일을 특히 좋아했다. 스페인, 프랑스, 독일, 폴란드, 덴마크, 러시아도 블루 타일은 물론 폴리크롬 타일도 들여와 궁전과 성당, 예배당 등의 장식에 사용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프랑스 베르사유(Versailles)의 ‘도자기 궁전(Trianon de Porcelaine), 독일 뮌헨의 님펜부르크 (Nymphenburg) 궁전, 심지어 아프리카 튀니지(Tunis)의 바르도(Bardo) 궁전과 브라질 바이아(Bahia)주의 살바도르(Salvador) 성당 등에는 델프트 타일로 만든 걸작 벽화들이 있다. 타일 제작은 델프트와 로테르담, 하르링언(Harlingen), 그리고 마쿰(Makkum)에서 주로 이뤄졌고, 델프트가 주도한 수출은 1800년대 초까지 계속 이어졌다. 

 

부자연스럽고 촌스러운 감각, 당시엔 최첨단 문화의 상징

델프트 타일은 약 200년에 걸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양(약 8억 장 이상으로 추정한다)이 생산됐고, 유럽 전역에서 귀족이나 부호들이 자신들의 집을 치장하는 데 사용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영국, 독일, 북부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는 이를 흉내 낸 소위 ‘짝퉁 델프트 타일’을 또 만들어냈다. 

이런 영향으로 인해 유럽 각 나라에는 델프트 타일을 지칭하는 단어들이 모두 있다. 프랑스는 ‘카로 드 델프트(carreaux de Delft)’, 독일은 ‘델프트 플리센(Delft fliesen)’,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줄레주 데 델프트(azulejos de Delft)’, 이탈리아는 ‘피아스테렐레 디 델프트(piastrelle di Delft)’, 폴란드는 ‘카플레 즈 델프트(kafle z Delft)’, 스웨덴은 ‘델프트 클라켄(Delft klaken)’, 그리스는 ‘프라사시아 델프트(πλακκια Delft)’, 러시아는 ‘데르프트 리타카(Делфт Плитка)’라고 불렀다. 네덜란드 말로는 ‘델프트세 테겔(Delftse tegels)’이다.

이런 영향의 극대치가 바로 멘시코프 저택이었다. 그래도 멘시코프 저택의 타일들은 너무 지나치다. 사진에서 나타나듯 집성목의 마룻바닥과 벽의 델프트 타일은 전혀 어울리지 못하고 부자연스럽게 서로 밀어내고 있다. 이렇게 촌스러운 감각이었지만, 그때는 이 모든 것이 최첨단 문화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경탄을 금치 못할 것은 바로 천장이다. 목가적 풍경이 담겨 있는 타일의 사각 모서리마다 금박 압정을 박아 마치 블루 타일로 된 천으로 만든 금박 누빔 옷을 천장에 두른 것처럼 압도적으로 화려하면서도 이색적인 멋을 구가하고 있다. 이렇게 천장까지 타일을 붙인 것은 정말 보기 드문 예로, 멘시코프가 누린 부와 권력의 크기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이렇게 방마다 델프트 타일과 시누아즈리로 꾸며놓았으니 이를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겠는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러시아 수도를 옮기기 전에 표트르 대제는 이 도시에 오면 이 저택에서 머물렀고 외교사절들을 불러 연회를 개최했다. 18세기 초반에는 이 건물이 러시아 정치·문화·사교의 중심지가 됐다.

그러나 이렇게 첨단 유행을 선도하던 건물의 주인공이었던 멘시코프는 정작 이곳에서 삶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했다. 욕심을 너무 부렸다. 원래 귀족 태생이 아니었던 그는 자신의 딸을 차기 황제가 될 젊은 표트르 대제의 아들과 결혼시켜 명실상부한 ‘귀족 가문’으로 상승하고자 무리수를 뒀다. 그렇지 않아도 ‘근본 모를 자’가 표트르 대제의 권세를 업고 쥐락펴락하는 꼴에 분개하고 있던 러시아 귀족들은 이 일을 기회 삼아 멘시코프를 시베리아로 추방하는 데 성공했다. 지나친 탐욕의 결과로 멘시코프는 러시아 최고였던 자신의 집이 아니라 시베리아 벌판에서 죽었다. 그의 저택과 재산은 압수당해 국가 소유가 됐다.

이후 멘시코프 저택은 러시아 최초의 사관학교 건물로 사용돼 러시아 최고 정치인과 고급 군인을 양성했다. 1880년대에는 사관학교 박물관이 저택 안에 설립돼 1924년까지 문을 열었다. 1970년대에 저택이 복구돼 원래 모습을 찾았고, 1981년부터 관광객에게 개방됐다. 현재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이 저택은 현재 17세기 말과 18세기 러시아의 회화, 판화, 조각, 가구 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컬렉션을 진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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