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와 싸우기 앞서 ‘밥과의 전쟁’부터 벌인 임정 요인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09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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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28화 -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맞아 되짚어 본 임정의 자금줄 ‘독립공채’

베이비시터, 스님, 전차 검표원의 공통점은 뭘까. 우리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업이었다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을 게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연로한데다 말이 통하지 않는 남의 땅에서 허드렛일 찾기도 만만치 않았다.

백범 김구가 동포들 애를 봐주며 끼니를 이어 간 사실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단재 신채호는 굶다 지쳐 베이징의 관음사란 절에 들어가 머리 깎고 중이 되기도 했다. 절에선 굶기지는 않을 테니 스님 ‘행세’를 한 것이다. 그나마 영국인이 운영하는 전차회사에서 검표원으로 일한 분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또 엄청난 재산을 독립운동에 바친 우당 이회영 일가의 망명 생활은 가히 ‘엽기적’이라 할 만큼 충격을 준다. 재산의 대부분은 그의 형 이석영 것이었는데, 정작 그는 굶어 죽었다. 만주에 경학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데 돈을 다 써버리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것이다. 우당 역시 망명지 베이징의 단칸 움막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그의 아들 이규창이 쓴 《운명의 여진》이란 책에는 “시장 거리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배추 쪼가리를 주워 와 아버지에게 죽을 쑤어 드렸다”고 적혀있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로 100년 전 나라 잃은 망명객들은 일제와 싸우기에 앞서 ‘밥과의 전쟁’을 벌였던 셈이다.

 

나라 되찾기 앞서 굶주림과 싸운 조선의 망명 정객들

어디 밥값뿐인가. 독립운동을 이슬만 먹고 할 순 없는 법이다. 조직 운영, 외교 활동, 무기 구입 등 나라 되찾는데 돈이 한두 푼 드는 게 아니었다. 이를 위해 1919년 임시정부는 ‘독립공채’를 발행했다. 독립 후 5년에서 30년 이내에 액면가에다 연 5%의 복리 이자를 붙여 갚는 조건이었다.

또 미국 본토와 하와이 동포들을 대상으로 달러화 공채도 만들었다. 이 공채는 미국법에 따라 미국이 한국 정부를 승인한 1년 뒤에 갚기로 했는데, 뉴욕 증권가에도 내놨지만 별다른 실적을 올리지는 못했다.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미래에 ‘배팅’하는 투자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당 이회영과 원 안은 우당의 둘째 형 이석영. 오른쪽 위는 임정의 원화 표기 공채, 아래는 달러화 공채표
우당 이회영과 원 안은 우당의 둘째 형 이석영. 오른쪽 위는 임정의 원화 표기 공채, 아래는 달러화 공채표

안타깝게도 독립공채를 둘러싸고 내분이 일기도 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망명 생활에서 ‘돈은 곧 권력’이었다. 임정의 대통령 이승만은 “미주 지역의 모든 재정을 직접 관할하고 공채도 나의 책임 하에 발행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임정 재무부, 미주 대한인국민회, 이승만의 구미위원부 사이에 갈등과 대립이 빚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의 뜻대로 정리되긴 했지만 또 다른 분란의 자락을 깔아놓았다.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이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 면직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의 탄핵 사유에는 “미주에서 거둬들인 공채 자금 등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정부에 알리지도 않았다”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기록에는 구미위원부가 설립 초기에 15만 달러를 모금해 약 9만 달러를 지출했고, 그 중 1만6000달러만 상해 임정에 보냈다고 적혀있다.

같은 시기, 영국의 지배에 놓인 아일랜드 무장독립 세력도 임시정부를 세웠다. 1919년 임시대통령 에이먼 데 벌레라(1882~1975)는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교민들에게 공채를 팔았다. 19세기 중반의 감자 대기근과 식민 착취를 피해 미국에 온 아일랜드인들은 무려 400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들은 공채 구입과 성금으로 약 512만 달러를 내놓았다.

공교롭게도 아일랜드 임시정부 역시 ‘공채 분쟁’에 시달렸다. 2017년 니콜라스 리들리가 쓴 《무력항쟁의 재정》이란 책에 따르면, 데 벌레라 대통령은 모금액 중 절반만 본국에 보내고 나머지는 뉴욕 은행에 보관했다가 신문사를 인수하는 데 썼다고 한다. 이 일로 독립세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후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은 얻었지만 ‘완전한 독립’ 여부를 놓고 두 파로 나뉘어져 서로 총부리를 겨누게 되었다.

이렇듯 한국과 아일랜드 두 나라 모두 미국 동포들을 상대로 공채를 찍어 독립 자금을 조달했고, 또 모금액을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난 점도 같다. 여기에다 조국 독립을 위한 간절한 열망까지도 빼닮았다. 특히 수백만 아일랜드 이민자들에 비해 고작 1만 명 남짓한 우리 미주 동포들이 15만 달러란 거금을 냈다는 사실은 놀라울 따름이다.

더욱이 아일랜드의 이민 역사가 70년이 넘는데다 많은 자산가와 상원의원까지 배출한 반면, 하와이 이민선을 탄 지 10여 년 밖에 되질 않고 대부분 막노동자였던 당시 한인들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이들의 정성은 실로 눈물겨웠다.

아일랜드 대통령 데 벌레라와 독립공채. 오른쪽은 미 서부 오렌지농장의 한인 노동자들
아일랜드 대통령 데 벌레라와 독립공채. 오른쪽은 미 서부 오렌지농장의 한인 노동자들

아시아에서는 베트남이 독립공채를 발행한 적이 있다. 1945년 일본 점령군이 물러간 후 호찌민은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를 구성했다. 그런데 이듬해 프랑스가 식민 종주권을 내세우며 다시 침략하자 호찌민 정부는 우리의 IMF 사태 때 ‘금모으기 운동’과 비슷한 ‘황금주간’ 캠페인을 벌였다. 이때 현금 2000만 동과 370kg의 황금을 모았는데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약 4500억 원 규모였다.

전쟁이 격화되어 전비가 더욱 늘어나자 정부는 독립공채를 만들게 되었다. 하지만 예상액의 50% 정도만 팔렸고, 1951년에는 30%에 그쳐 기대치에 훨씬 못 미쳤다. 그 무렵 베트남 남부에 프랑스와 서방 세계의 지원을 받는 ‘자유 베트남’ 정부가 세워져 호찌민의 승리가 불투명한 때문이었다.

8년에 걸친 항불전쟁과 이후 계속된 미국·캄보디아와의 전쟁이 끝나고 1990년대 후반 들어 베트남 정부는 공채 상환을 시작했다. 지금도 상환이 이뤄지고 있고, 이와 함께 기부자와 공채 구매자에 대한 예우도 갖춰나가고 있다. 2017년 5월, 104년의 삶을 마감한 황 티민 호 할머니의 장례가 치러졌다.

그와 그의 남편, 그리고 가족들은 금 5000냥과 재산을 독립항쟁에 기꺼이 바쳤다. 언론에서는 “그가 자금을 마련할 수 없는 형편일 때에도 자신의 옷을 팔아 군자금을 댔다”고 전했다. 주목할 점은 그의 장례식이 ‘국장(國葬)’으로 치러진 사실이다. 나라에 헌신한 사람을 배려하는 베트남의 정신이 읽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황 티민 호와 그의 장례식. 오른쪽은 베트남 ‘황금주간(Golden week)’에 기부하러 모인 군중들
황 티민 호와 그의 장례식. 오른쪽은 베트남 ‘황금주간(Golden week)’에 기부하러 모인 군중들

광복 후 우리 독립공채의 상환은 어땠을까? 공채를 직접 팔았던 이승만 대통령은 상환 노력을 별반 기울이지 않았고,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일본의 배상금까지 받은 박정희 정권은 아예 이를 외면했다. 1983년에 가서야 상환법이 만들어져 2000년까지 달러화 2150달러, 원화 1만610원, 모두 57건에 상환 총액은 3억4000여만 원에 그쳤다. 달러화 첫 발행액이 25만 달러라는 기록만 보더라도 공채 상환율은 1%도 채 안 되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라 찾는데 힘 보탰지만 '역사의 냉대' 받은 임정의 독립공채

더구나 전체 상환액 중 1996년 미주 흥사단에서 ‘우연히’ 발견한 27장의 공채 보상금이 다수를 차지했다. 하와이와 멕시코 농장에서 노예 생활을 견뎌가며 한 푼 두 푼 모아 공채를 산 동포들은 거의 돌려받지 못한 셈이다. 팔 때는 “독립되면 갚겠다”고 했지만 그 약속은 해방 후 40년 가까이 지나도록 지켜지지 않았다. 공채를 구입한 사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고, 후손들도 돌려받을 길이 막막한 종이쪼가리를 마냥 간직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되어 있지만, 독립공채에 관한 한 헛구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며칠 뒤면 우리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꼭 100년을 맞는 날이 돌아온다. 현 정부는 ‘따뜻한 보훈’을 내세우며 애국지사와 후손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는 정책을 적극 펴고 있다. 늦게나마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배를 곯아가며 항쟁을 이어간 망명객이나 공채 값을 꼬박꼬박 낸 사탕수수밭 노동자들이 단순히 물질적 대가만을 바란 건 아닐 게다. 겉으로 드러나는 ‘선심성’ 정책보다 자라나는 세대에게 이들의 올곧은 정신이 스며들도록 애쓰는 것이 더욱 이들을 위로하는 일이지 싶다. 나라 되찾는데 힘을 보탠 사람을 잊지 않고 ‘국장’으로 보답하는 베트남의 정신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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