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식이 여의도공원에서 열리는 이유
  • 소종섭 편집국장 (jongseop1@naver.com)
  • 승인 2019.04.11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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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광복군 착륙했던 곳, 일본군 저항으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4월11일 저녁 19시19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는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19시19분은 임시정부가 1919년에 수립된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왜 여의도공원에서 기념식이 열릴까?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8일 광복군 이범석,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 등 4명과 미국 전략첩보국 22명이 C-47 미군 수송기를 타고 착륙했던 곳이 여의도이기 때문이다.

ⓒ 대한민국 정부 페이스북
ⓒ 대한민국 정부 페이스북

1945년 8월15일 일본 황제가 항복선언을 했을 때 임시정부 지도부는 중국 서안에 머물고 있었다. 김구 주석,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몇몇 국무위원, 국내 정진군 총사령관을 맡은 이범석 광복군 2지대장 등이었다. 임시정부(이하 임정) 지도부는 국내 정진을 위한 2지대 훈련 등을 시찰하는 중이었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임정 지도부가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분초를 다투어 조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얄타협정에 ‘미-소 양군이 한국에 진주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을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승만 박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국토가 미-소 양군에 의해 분단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범석은 자서전에서 “미소 양군이 진주하기 전에 민족군을 형성해 주인이 자기 집을 수호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사실 임정 지도부는 일제가 8월10일 포츠담선언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스위스를 통해 연합국에 통보했기에 이미 일제의 항복을 알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보면 일제는 1945년 8월10일 연합군에 항복한 것이다. 8월10일 당시에도 서안에는 김구 주석,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 이범석 광복군 2지대장 등 임시정부 지도부가 모여 있었다.

우연이었지만 이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김준엽은 자서전 <장정>에서 “김구 주석과 이청천 총사령관이 마침 서안에 와 계신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았다. 그분들이 와 계시지 않았으면 일을 이렇게 신속히 진행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숨 가쁜 순간들이고 사태는 급변하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1945년 8월18일 광복군 4명 미군 수송기로 여의도공원 착륙

8월10일 이후 이범석은 중국전구 사령관이었던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수송 수단을 요청했다. 하지만 미국 국가 정책에 어긋나는 일(민족군 형성)을 공적으로 요청하기는 어려워 다른 방법을 썼다. ‘일본군에게 잡혀있는 미군을 수송하기 위한 비행기가 필요하지 않느냐. 또 우리 동포에게 연락할 것도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평소 이범석과 남다른 친분이 있었던 웨드마이어 장군은 이에 동의했다.

해방 이후 귀국하는 광복군 ⓒ 연합뉴스 자료사진
해방 직후 귀국하는 광복군 ⓒ 연합뉴스 자료사진

이범석은 미군 22명과 국내 정진군 대원이었던 장준하 노능서 김준엽 등 광복군 3명을 데리고 8월18일 오전 4시 쌍발 C-47형 비행기를 타고 국내로 출발했다. (이 때문에 훗날까지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세 사람은 8월18일을 환국일로 삼았다. 해마다 8월 18일이면 ‘환국’을 기념하는 술자리를 갖곤 했다.) 서안비행장을 출발한 비행기는 오전 12시30분에 경성비행장에 도착했다. 여의도 공원은 당시 착륙했던 경성비행장이 있던 곳이다. 같은 해 11월23일 귀국한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요원 15명도 이 기종의 비행기로 고국 땅을 밟았다.

당시 이범석이 남긴 시가 전한다.

보았노라 우리 연해의 섬들을.
왜놈의 포화 빗발친다 해도
비행기 찢어지고 이 몸 찢기워도
찢긴 몸 이 연안에 떨어지리니
물고기 밥이 된들 원통치 않으리.
우리의 연해 물을 마시고 자란 고기들
그 물고기 살찌게 될테니.

경성비행장에 착륙한 일행은 일본군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기관단총을 앞으로 하지 않고 어깨에 걸쳤다. 때마침 그곳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조선군사령관 쬬오쯔끼 중장이 다가왔다. 무슨 일로 왔느냐는 그의 물음에 대표인 미군 뻘드 중령은 영등포 상공에 뿌리다 만 선전 전단을 내밀었다. 임무, 들어오게 된 이유 등을 일본어와 우리말로 적은 전단이었다.

이범석은 “너희들은 무조건 항복을 제시한 이상, 한국을 식민지로 강제 통치한 속죄를 해야 할 것이다. 대상이 연합국이 아니라 조선군에게나마 속죄 의사를 표시하는 의미에서 너희 자력으로 할 수 있는 무장 해제를 먼저 해 한국에 무기를 양도하라”고 말했다. 쬬오쯔끼는 이유는 알겠으나 동경으로부터 아무 지시를 받은 바 없으니 돌아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변 안전을 책임 질 수 없다며 은근히 위협하기도 했다.

 

일본군 무장해제 시도 무위에 그치며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그러면서 일본군이 일행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광복군 일행도 기관단총을 앞으로 했다. 권총의 안전장치도 풀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다행히 일본군이 동경의 연락을 받고 포위가 아니라 경비하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되었다. 미군과 광복군도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가솔린이 없었기에 “돌아가기를 원한다면 가솔린을 내놓으라”고 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일본군 막사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일행은 다음날인 8월19일 오후 2시30분 여의도비행장을 이륙해 중국으로 돌아왔다. 이범석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모두 귀국한 뒤인 1946년 6월3일이 되어서야 광복군 대원 500여명과 환국했다.

연합군이 일본에 진주한 것은 8월28일, 최고 사령관인 맥아더 사령관이 도착한 것은 8월30일이었다. 미국 전함 미조리호에서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한 날은 9월2일이었다.

만약 일본군 조선군사령관 쬬오쯔끼 중장이 당시 무장해제를 하고 무기를 광복군에게 넘겨주었다면 향후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이범석도 죽는 날까지 그것을 아쉬워했다. “쬬오쯔끼가 용기를 갖고 자기 예하의 무장을 한국 청년에게 넘겨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 본다. 이와 같이 되었더라면 일본을 한국이 반세기 동안 강점하고 한국인의 모든 기회를 박탁했으며 정신적인 자존과 생명의, 인간의 존엄을 박탈, 유린한 죄를 속죄하는데 부족하지 않았을 것이다. 38선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며 한국은 한국 민족이 원치 않은 모든 불합리한 압력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의 불행일 뿐 아니라 아시아의 불행이기도 했다.”(<철기 이범석 자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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