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아닌 ‘감독’ 김윤석을 주목하라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13 12:00
  • 호수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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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성년》의 섬세한 연출과 너른 이해심

“영화를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는 직접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배우 김윤석이 감독 준비를 한다고 했을 때 놀라지 않았다. 창작에 대한 애정이 강렬한 배우들에게, ‘연출’은 실패하더라도 도전해 보고 싶은 ‘호기심의 세계’다. 실제로 감독 겸업을 선언한 배우가 어디 한둘인가. 그러나 김윤석이 들고나온 《미성년》을 보고는 적잖이 놀랐다. 감독 이름을 지우고 《미성년》을 본다면 과연 김윤석의 작품임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선 굵음’으로 대표되는 배우의 이미지와 대비되는 섬세한 연출도 눈에 띄지만, 그보다 더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극 곳곳에 침투해 있는 여성에 대한 깊고 너른 이해다. 주목할 신인 감독의 등장이다. 

ⓒ (주)쇼박스
배우 김윤석이 감독인 영화 《미성년》 ⓒ (주)쇼박스

누가 미성년이고 누가 성인인가

불륜 소재란 식상한 것이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냐’고 도발적으로 묻는 영화도 있었고, ‘아내가 결혼했다’고 고발한 영화도 있었으며, 인간사 결국 ‘완벽한 타인’이라고 못 박는 영화도 최근 있었다. 영화만 보면 ‘대한민국은 불륜 공화국’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이 소재로 뭘 더 보여줄 수 있겠어’라는 의구심은, 그러나 《미성년》 앞에서 꼬리를 감췄다.

《미성년》은 불륜을 새롭게 해석한 영화는 아니다. 조강지처(염정아)가 있고, 내연녀(김소진)가 있고, 그 사이에 낀 남자(김윤석)가 있다. “나를 사랑하긴 했어요?” 내연녀가 묻는다. “그 여자, 마음으로 사랑했니?” 조강지처가 몰아세운다. 영화는 정해진 궤도를 달린다. 그런데 식상하지 않다. 시점의 이동 덕이다. 이 영화는 많은 불륜 드라마에서 주변부로 밀려나 있던 불륜 당사자들의 자녀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게다가 이들 자녀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가 놓인 상황이 나름 짓궂다. 이들은 같은 학교 동급생이다. 그러니까 주리는 학교에 가면 ‘우리 아빠를 꼬신 여자의 딸’을 봐야 한다. 윤아는 ‘우리 엄마를 임신시킨 남자의 딸’과 마주해야 한다. 여러모로 낯 뜨거운 상황이다. 사고 친 건 부모인데, 괴로운 건 자식이다. 

감독 김윤석이 집요하게 쫓는 건 ‘어른들의 막장 드라마’가 아니다. 그의 목적지는 어른들의 위선과 비루함을 바라보는 아이들의 시선이다. 실제로 이 영화엔 여타의 불륜 작품에 넘쳐 흐르는 욕정, 질투, 배신, 사랑의 흔적이 옅다. 대신 책임, (아이들 간의) 교감, 성장통이 자리해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중의적이다. 효과적이다. 표면적인 의미의 미성년은 분명 주리와 윤아지만, 영화가 손끝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은 미성숙한 어른들이다. 펼쳐진 막장의 상황을 안간힘을 다해 수습하려는 아이들과 달리 어른들은 외면하거나 방관하거나 도망칠 뿐이다.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누가 미성년이고 누가 성인인가. 나이를 먹는다고 모두가 어른일까. 영화의 태도는 단호하다. 나잇값 못 하는 지질한 어른을 나무란다.

《미성년》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캐릭터 조율이다. 좋은 영화일수록 소외시키는 캐릭터가 없는데, 김윤석은 이 부분에서 매우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극 중심에 선 다섯 배우의 개성도 뚜렷하게 살아 있지만, 잠깐 등장하는 조연 배우들도 구두점을 하나씩 찍고 퇴장한다. 배우들의 힘이기도 하고, 배우들 개개인이 지닌 개성을 사려 깊게 포착해 낸 연출의 힘이기도 하다. 이것이 쉽냐고? 기술적인 부분에 신경 쓰다가 연기 디렉팅을 놓쳐버린, 혹은 반대의 실수를 한 ‘배우 겸 감독’들의 사례가 적지 않았음을 떠올려 보면 답은 나온다. 《미성년》은 배우 출신 신인 감독이, 욕심 부리지 않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에 집중했는데, 그것이 잘 구현되기까지 한 사례다.  

배우 김윤석이 감독인 영화 《미성년》 ⓒ (주)쇼박스

좋은 연출과 좋은 배우들이 만든 시너지 

캐릭터 개성 못지않게 좋은 건 인물들이 부딪힐 때 일으키는 시너지다. 김소진과 염정아는 극 전체에서 두 번밖에 만나지 않지만, 함께 있지 않을 때도 서로를 향해 시종 직구를 던지는 느낌을 준다. 좋은 배우란 화면에 등장하지 않을 때도 존재감을 남긴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앞으로 김혜준과 박세진을 이야기할 때 《미성년》은 빠지지 않고 언급될 것 같다. 이 작품엔 두 젊은 배우들의 빛나는 순간이 담겨 있다.  

《미성년》엔 연극적인 호흡도 살아 있다. 원안 자체가 희곡이다. 연극 무대 출신인 김윤석의 영향이 무엇보다 커 보인다. 연극 무대에선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절묘한 호흡과 템포, 타이밍이 극의 재미를 좌우한다. 이를 잘 알고 있는 김윤석은 연극의 특징과 장점을 스크린에 적지 않게 투영시킨다. 연극적 요소는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데, 덕분에 《미성년》은 어두운 소재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유머가 내내 끊이지 않는다. 

특히 김윤석은 자신이 연기한 대원 캐릭터를 작정하고 지질하게 연기한다. 그럼에도 이 캐릭터는 얄밉지 않다. 앞선 요소들이 잘 어우러져 인물의 면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내연녀를 만나러 병원에 갔다가 주리와 윤아를 발견하곤 나 몰라라 줄행랑치는 대원의 모습에서 기분 나쁘지 않은 실소가 터진다. 극 전체 균형과 메시지를 위해 멋있어 보여서는 안 되는 이 캐릭터를 감독 본인만큼 잘 연기해 낼 수 있는 배우는 없을 것이다. 

이 영화는 초반이 중반보다 좋고, 중반이 후반보다 좋다. 상황을 잡아채는 초반의 디테일이 굉장히 훌륭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에 반해 후반부를 달리는 힘이 조금 아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원이 겪는 비일상적인 사건 등, 몇몇 사연들은 극이 구축해 온 느낌과 잘 붙지 않은 인상이 있다. 그러나 소재가 지니는 자극에 짓눌리지도, 배우가 지닌 매력을 외면하지도 않고 달리는 이 영화의 태도는 귀하다. 늘 배우 김윤석의 차기작이 궁금했다. 《미성년》을 기점으로 추가다. 감독 김윤석이 그려나갈 내일도 궁금하다. 

감독 겸업한 배우, 누가 있나 

스타들의 감독 겸업은 할리우드에서 자주 목격된다. 조지 클루니, 안젤리나 졸리, 에단 호크, 로버트 드니로 등이 이미 메가폰을 들었다.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인물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서부극의 사나이였던 이 배우는 감독 데뷔 초반 ‘총잡이가 무슨 연출을 해?’라는 편견에 시달렸지만, 《미스틱 리버》 《그랜토리노》 등의 명작을 내놓으며 ‘살아 있는 명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배트맨으로 유명한 벤 에플렉도 연출자로서 이미 그 실력을 입증받은 경우다. 《굿 윌 헌팅》의 시나리오 작가로 이력을 시작한 이 배우는 연기자로 인기를 얻은 후 연출자로서도 출중한 면모를 선보이고 있다. 데뷔작 《가라, 아이야, 가라》로 평단에 충격을 안긴 후 《타운》《아르고》를 통해 데뷔작의 성공이 운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급부상하고 있는 배우 연출자는 브래들리 쿠퍼다. 첫 연출작인 《스타 이즈 본》으로 흥행과 비평에서 좋은 성과를 거뒀다. 

국내에도 연출 완장을 찬 배우가 적지 않다. 꾸준함에선 방은진을 빼놓을 수 없다. 《오로라 공주》 《용의자X》 《집으로 가는 길》 등을 연출한 방은진은 이젠 배우보다 감독이란 호칭이 더 어울리는 영화인이다. 박중훈도 연예계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 《톱스타》로 감독 칭호를 받았다. 김윤석만큼이나 연출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는 배우는 하정우다. 첫 연출작 《롤러코스터》는 호불호가 갈리긴 했지만, 언어유희를 즐기는 하정우의 특징이 녹아 있는 개성 강한 데뷔작이었다. 이후 《허삼관》으로 쓴맛을 보긴 했으나, 실패마저도 배움의 일환으로 승화시키는 이 배우는 세 번째 연출을 위해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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