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라는 아이콘, 넷플릭스라는 가능성
  • 이은선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25 16:55
  • 호수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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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르소나》의 새로운 도전

‘페르소나(persona)’는 원래 심리 용어다. 이것을 영화와 소설 등의 작품에 적용하면 창작자를 대신하는 가면, 분신 등을 뜻하는 개념이 된다. 특정 배우가 한 명의 연출가와 연이어 함께 작업하는 경우 해당 연출가의 페르소나라 칭하는 이유다. 4월11일 《페르소나》라는 제목의 영화가 공개됐다. 가수 아이유가 주연을 맡고, 네 명의 감독이 그를 주인공으로 각각 연출한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다. 다만 극장에 걸리는 작품은 아니다. 세계 최대 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 넷플릭스(Netflix)의 오리지널 시리즈이기 때문이다. 오직 이 플랫폼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한국 시장에는 전에 없던 시도다.
아이디어 한 줄에서 출발하다

이경미 감독의 《LOVE SET》 ⓒ 넷플릭스
이경미 감독의 《LOVE SET》 ⓒ 넷플릭스

《페르소나》의 제작자는 윤종신이다. 평소 그는 ‘월간 윤종신’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매월 신곡을 발표하는 부지런한 뮤지션이자, 소문난 영화광이다. 그가 자신이 수장으로 있는 미스틱 스토리(Mistic story)를 통해 처음으로 선보인 영화가 바로 《페르소나》. 《비밀은 없다》(2016) 이경미, 《마담 뺑덕》(2014) 임필성, 《소공녀》(2018) 전고운, 《최악의 하루》(2016) 김종관까지 네 명의 감독은 평소 그가 눈여겨보던 창작자들이다. 이들에게 각각 한 편씩 맡긴 건, 단편영화에서 감독 본연의 이야기와 창의성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다.

여기에 동일한 배우를 주인공으로 한다는 아이디어가 더해졌다. 감독 각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양한 모티브를 떠올릴 수 있는 배우가 필요했다. 모두가 알지만 아직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아이콘. 매 작업마다 화제를 일으키며 대중의 적극적 해석, 나아가 논쟁을 부르기도 하는 주인공. 아이유라면 가능했다. 그는 무대 위에서 ‘아이유’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며 지난 10년간 대중 앞에 섰다. 지난해 TV 드라마 《나의 아저씨》(tvN)를 통해서는 배우로서 한층 단단하게 입지를 굳히기도 했다. 

탁월하고 용감한 캐스팅이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기성 남성 배우의 변형보다, 영화를 통해 주연 배우로 한 번도 소비되지 않은 젊은 여성 아이콘에게서 색다른 모습들을 끄집어내는 쪽이 확실히 흥미롭기 때문이다. 각각의 작품들을 보면, 창작자들이 한 명의 배우에게서 얼마나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리는지 혹은 발견하고 싶어 하는지가 보인다. 감독들은 아이유의 출연이 결정된 이후 그와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눈 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페르소나》는 아이유의 첫 영화가 됐다. 영화 데뷔작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보다, 신선한 프로젝트에 선뜻 참여한 재능 많은 배우의 결과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해 보인다.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게 아주 오래》 ⓒ 넷플릭스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게 아주 오래》 ⓒ 넷플릭스

아이유의 다양한 얼굴들

영화는 이경미 감독의 《LOVE SET》로 시작해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게 아주 오래》, 전고운 감독의 《키스가 죄》를 지나 김종관 감독의 《밤을 걷다》로 이어진다. 물론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특성상 각각의 단편이 하나씩 업로드돼 있다. 어떤 순서로 보든 유저의 자유다.

이 프로젝트는 과감하다. 최근 어떤 작품도 젊은 여성 캐릭터를 이렇듯 폭넓고 다양하게 그려내지 못했다. 《LOVE SET》의 아이유는 질투심에 불타지만 아직 미숙한 소녀이며, 《썩지 않게 아주 오래》에서는 신비로운 여인이자 사랑의 의미에 목을 매는 남자를 따분하게 생각하는 인물이다. 《키스가 죄》에서는 친구의 아버지로 대변되는 가부장제에 발랄한 복수를 가하려는 소녀로 등장하고, 《밤을 걷다》에서는 죽은 뒤 옛 연인의 꿈속에 찾아온 여자다. 각각의 작품에서 아이유는 이처럼 전혀 다른 이미지이자 해석의 결과물이 된다. 

섹스를 은유하는 테니스 경기를 통해 성숙해 가는 소녀의 이야기 《LOVE SET》, 사랑에 어리석게 빠진 중년 남자를 휘두르며 끝내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서사 《썩지 않게 아주 오래》는 어떤 면에서 용감해 보이기까지 한다. 특정 앨범을 내놓은 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이르기까지 로리타 콘셉트 논란에 끈질기게 시달렸던 아이유의 이미지를 작품 안에서 정면 돌파해 나가기 때문이다.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게 아주 오래》 ⓒ 넷플릭스
전고운 감독의 《키스가 죄》 ⓒ 넷플릭스
임필성 감독의 《썩지 않게 아주 오래》 ⓒ 넷플릭스
김종관 감독의 《밤을 걷다》 ⓒ 넷플릭스

《키스가 죄》와 《밤을 걷다》에서는 재능 많은 아티스트를 바라보는 감독들의 상반된 시선이 유독 더 두드러진다. 《키스가 죄》의 소녀는 목에 키스 마크를 만들어 왔다는 이유로 친구를 가둔 아버지를 향한 복수심과, 나보다 먼저 키스를 경험한 친구를 향한 질투심이라는 두 감정 사이에서 오가는 호기심 많은 인물이다. 이 호기심이라는 장치는 중요하다. 작업마다 세상을 향한 자신의 호기심과 애정을 담아내는 ‘씩씩한 아티스트’ 아이유의 현재를 바라보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반면 《밤을 걷다》는 죽음이라는 설정을 통해 아주 먼 미래의 아이유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을 사유하게 한다. 화려한 빛이 사라진 채 텅 빈 거리를 걷는 죽은 자는 살아 있던 시간을 담담하게 회고한다. 

만약 《페르소나》가 극장에서 공개됐다면 어땠을까. 제작비 대비 수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각 창작자들이 과감한 시도를 꾀하는 대신 보다 안전하고 보편적인 서사와 캐릭터를 구축했을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담아내는 틀의 전통성은 점점 깨지고 있다. 그에 발맞춘 시도들, 새로운 콘텐츠가 필요한 시대다. 《페르소나》의 도전이 흥미로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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