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2차 가해를 할까
  • 노혜경 시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4.27 17:00
  • 호수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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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두려움이 낳은 반동

서지현 검사가 용기를 내어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한 이래 한국 사회에선 다양한 형태의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스쿨미투라는 이름이 붙은 청소년들의 고발에 이르면, 성폭력이 한국 사회를 지탱해 준 폭력의 밑바닥임을 실감한다. 잘디잘게 쪼개져 모든 분야에 침투해 있어 저항하기도 대항하기도 정말 쉽지 않다. 가부장제의 다른 이름은 ‘가노예제’가 아닐까. 여성을 노예로 삼을 때 손쉬운 도구가 성폭력이다. 가정폭력을 필두로 국가의 공인받은 폭력을 다루는 집단인 검찰 내부의 성폭력, 대의민주주의를 지탱해 내는 정치 분야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다음 세대를 교육해 공동체의 질서와 번영을 터 닦는 학교 사회의 성폭력, 영혼의 구원을 말하는 종교계 인사들의 성폭력, 그뿐이랴. 문화계, 체육계, 언론방송계 등등 공공 영역의 콩알만 한 권력이라도 발생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흡사 성폭력 없이는 권력도 없다는 듯 공공연하게 자행되어 왔다. 이미 낡아버린 제도를 지탱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미투는 이 소규모이고 은밀한 그러나 광범위하기 짝이 없는 폭력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 공동의 문제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내 문제가 동시에 모두의 문제라는 깨달음이 여성들을 결속시키고 피해자에서 고발자로 나서게 했고, 젠더 구분 없이 많은 이들을 연대자로 함께하게 했다. 변화의 물꼬를 텄다. 

#미투 말하기는 혁명의 모든 특성을 다 가지고 있다. 의미와 목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끝도 없는 반동,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내미는 손들의 결속이 준비하는 다음 단계로의 도약. 

아렌트가 말한 ‘자유를 위한 새로운 시작’인 미국·프랑스 혁명, ‘민주와 자유가 우리의 목적’이라 외치며 총칼 앞에 섰던 4·19의 청년들, 혁명은 집단의 행동처럼 보이지만 한 사람의 심장에서 솟아올라 옆 사람에게로 번지는 봉기의 불길은 #미투에서도 똑같다. 나의 자기결정권을 존중받아야 하며 그것이 침해되었을 때 너를 국가의 이름으로 처벌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유(freedom)이고, 민주주의이며, 평화다.

서지현 검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안태근 전 검사장 ⓒ 연합뉴스
서지현 검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준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안태근 전 검사장 ⓒ 연합뉴스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

이 세상에 단 한 번 봉기해 성공하는 혁명이 없듯이, 반동은 필연적이다. #스쿨미투의 경과를 보면, 고발됐던 교사가 제대로 처벌되지 않고, 고발자들의 신원이 노출되고 협박당하고 사건 자체가 은폐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최근 1, 2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가해자들이 이미 법정에서 거부된 사실들을 다시 거론하며 피해자를 괴롭히는 일들이 발생하는 것 또한 일종의 공식이다. 낡은 권력의 방식은 결국 그 지경일 수밖에 없어서다. 권력을 그냥 내려놓는 권력자는 없다. 회개하고 반성하는 것보다는 다시 악을 저지르는 일이 더 수월하고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초기의 선정주의적 호기심이 가라앉고 나면, 2차 가해의 효과는 ‘저자가 진짜 가해자다’라는 증거로만 남는다. 최근 억울함을 강변하며 이미 법정에서 결론이 난 가해 사실들을 부정하는 가해자들을 보도하는 언론의 변화를 보아도 그렇다. 일단 보도 자체가 줄었고, “2차 가해를 저질렀다”라는 논평이 붙는다. 이런 변화를 피해자들에게 알리고 싶다. 세상이 차츰 달라지고 있음을 알아달라고. #스쿨미투의 가해자와 방조자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당신들은 늙고 피해자들은 자란다. 누가 이길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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