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은 끝났다! 미계약 공포에 떠는 서울 청약시장
  • 노경은 시사저널e. 기자 (rke@sisajournal-e.com)
  • 승인 2019.05.01 11:00
  • 호수 15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물량 털기 위한 무순위 청약, ‘현금 부자들의 리그’ 된다는 논란도

서울에서 분양하는 아파트 청약 당첨이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던 때가 있었다. 당첨만 되면 수억원의 웃돈이 붙어 모든 아파트 분양 현장은 입지나 가격 불문하고 흥행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시장 상황은 불과 1년 사이 180도 바뀌었다. 다행히 두 자릿수 청약경쟁률은 나와 줘 건설사들이 체면치레는 하고 있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 당첨이 되고도 계약을 하지 않는 청약자들이 여럿 생기며 사업자가 미계약 공포에 떨게 된 것이다. 

효성중공업은 4월16일 서울 서대문구에서 분양한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 추가 분양을 위해 인터넷 청약접수에 돌입, 무작위로 당첨자를 정했다. 이번 무순위 청약은 지난 2월 419가구를 분양하고 남은 세대인 174가구를 재차 분양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최초 분양물량의 41%에 해당한다. 앞서 이 단지는 분양 당시 1순위 전 타입 평균경쟁률 11대 1, 최고경쟁률 52대 1의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듯했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미계약이 속출한 것이다. 

정부의 부동산 규제가 강화되면서 당첨되고도 계약을 하지 않는 현상이 서울 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 연합뉴스
정부의 부동산 규제가 강화되면서 당첨되고도 계약을 하지 않는 현상이 서울 지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 연합뉴스

높은 분양가·복잡한 청약제도에 발목

이처럼 최초 경쟁률은 그럴싸하지만 미계약분에 따른 추가분양을 하는 사업장이 올 들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대림산업이 올해 1월 분양한 동대문구 e편한세상 청계센트럴포레 역시 청약 경쟁률은 33대 1에 달했지만, 실제 계약 단계에서 당첨자 403명 가운데 90명이 계약을 포기했다. 효성중공업이 2월 분양한 노원구 태릉 해링턴 플레이스도 청약 1순위 마감에 성공했지만 560가구 중 62가구가 미계약 상태다. 대림산업이 3월 광진구에서 분양한 e편한세상 광진 그랜드파크는 서울 지역에서 이례적으로 미계약이 아닌 미분양이 나기도 했다. 

청약 당첨자 상당수가 향후 3년에서 최대 5년까지 청약 재당첨 금지라는 손해를 감수하면서 계약을 포기한 원인으로 전문가들은 지나치게 높아진 분양가를 꼽았다. 최근 미계약에 따른 추가 형태로 수분양자를 모집한 홍제역 해링턴 플레이스의 경우, 전용 84㎡ 타입 분양가가 평균 8억5000만원 수준이다. 이곳은 투기과열지구로 지정돼 분양금액의 40%까지만 대출이 허용된다. 게다가 계약금이 일반적으로 책정하는 10%가 아닌 20%다. 따라서 계약자는 계약금 및 중도금 일부 납부를 위해 초기자금 3억5000만원을 투입해야 한다. 추후 잔금 20%도 준비해야 하니 입주 전까지 자기자본을 최소 5억원 이상 확보해야 하는 셈이다.  

해당 청약에 당첨됐다가 포기했다고 밝힌 A씨는 “서울이라지만 강북이라는 걸 감안했을 때 높은 가격이 부담이 됐다”며 “초기자본이 많이 들어가는 데다 인근에 이미 준공된 신축 아파트에 비해 저렴한 것도 아니어서 결국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어 “강북의 분양가도 이 정도라면 청약이 내 집 마련 창구가 되긴 힘들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 주택시장 조사업체 관계자는 “실수요자 중심으로 청약제도를 개편하면서 대출을 규제하다 보니 종잣돈이 없는 일반인들은 당첨이 돼도 계약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고 이들은 재당첨 금지로 다른 사업장에도 최대 5년 동안 청약할 수 없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건설사 분양담당자들은 복잡한 청약제도도 미계약분을 늘리는 데 한몫한다고 전한다. 정부는 무주택자들의 내 집 마련을 위해 지난해에만 청약제도를 무주택자 우선 공급 취지에 맞춰 4차례나 변경했다. 누더기 청약제도에 혼란을 느낀 이들이 되레 계약을 포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업계의 귀띔이다. 실제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청약 부적격자는 1만3000여 명으로 전체 당첨자 14만 명의 9.2%를 기록했다. 10명의 청약 당첨자 중 1명꼴로 부적격자가 나오는 셈이다. 부적격 원인은 대부분 청약 가점을 잘못 계산하는 단순 실수(66%)와 재당첨 제한 규정 위반(25%)인 점을 고려하면 관련 제도가 일반인들에게 복잡하고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다.

시장에서는 고분양가에 따른 미계약 현상을 두고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심사기준이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풀이한다. 올해 분양한 사업장이 줄줄이 시장 예상보다 높은 분양가격을 책정하고 HUG가 이를 승인한 게 발단이 됐다. 

과거 HUG는 고분양가일 경우 분양보증을 내주지 않는 등 분양가를 억눌러 집값을 낮추려는 입장을 취했고, 그 결과 청약시장에 차익을 노린 투자자가 대거 유입됐다. 이에 전략을 정반대로 바꿔 분양가 심사기준을 느슨하게 하다 보니 고분양가 사업장이 속속 등장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다. 소위 ‘110% 룰’로 불리는 HUG 분양보증 문턱을 넘기 위한 HUG만의 심사기준이 있다지만 기준이 명확하지 않고 심사가 비공개로 이뤄지면서 고무줄 잣대가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다. 

HUG 측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HUG 관계자는 “사업장 규모, 시공사 아파트 브랜드 등 유사한 사업장 성격을 가진 곳 다수를 산술평균 하고 있고, 분양승인 기준은 과거와 동일하다”고 반박했다.


과도한 규제가 현금 부자 ‘줍줍 현상’ 초래

미계약분 물량을 해소하기 위한 무순위 청약이 현금 부자들의 리그를 만든다는 논란도 거세지고 있다. 무주택자들의 내 집 마련을 위해 청약제도를 강화했지만 무주택자들이 높은 분양가를 감당하지 못해 계약을 포기하면 해당 물건이 무순위 청약으로 넘어가고, 유주택 현금 부자들에게 쏠쏠한 기회를 제공하게 된다. 과거엔 미계약 물량이 일부 극소량에 불과했지만 최근에는 물량이 늘면서 현금 부자들의 놀이터로 변질돼 청약제도를 왜곡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부동산업계 관계자는 “잔여 세대는 일반청약에 비해 문턱이 훨씬 낮다 보니 자금 동원력을 갖춘 현금 부자들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있다”며 “심지어 미계약된 인기 사업장에는 잔여 가구를 노리는 신조어 줍줍(줍고 또 줍기)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라고 말했다.  

이에 일각에서는 시장 왜곡을 없애기 위해 무순위 청약에 대해서도 무주택자 우선 조항을 넣자는 목소리도 나온다. 물론 건설사들은 이에 반대한다. 법적으로 규정된 1·2순위를 청약하고 남은 물량 처분 방식까지 규제하는 것은 민간기업에 대한 과도한 침해라는 것이다. 

이쯤 되자 예비 청약자들은 당초 정부의 무주택자 우선 주택공급 취지에 맞춰 추후 분양물량으로 잡힌 사업장의 분양가격이 낮아지지는 않을까 기대하는 모양새다. 시공사가 이달 또는 내달 중 서울에서 분양을 예고한 사업장은 현대건설 디에이치포레센트, 삼성물산 래미안 라클래시, GS건설 방배그랑자이 등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