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침공 격퇴와 세브르의 트로피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04 15:00
  • 호수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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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세계사 ⑤] 알렉산드르 1세의 베르사유 궁전 점령 기념품

너무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아래 티(tea) 서비스는 러시아 황실 도자기(Imperial Porcelain Manufactory)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몇 해 앞둔 1914년과 1915년 사이에 만들어졌다. 이 서비스에는 ‘예브게니 오네긴(Evgeny Onegin)’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바로 푸시킨(Aleksandr Pushkin·1799~1837)의 운문소설(韻文小說)이자 차이콥스키의 유일한 오페라로 만들어진 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오네긴, 티티아나, 올가, 렌스키 등 청춘남녀 네 명의 서로 엇갈린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1914~15년에 제작한 ‘예브게니 오네긴(Evgeny Onegin)’
1914~15년에 제작한 ‘예브게니 오네긴(Evgeny Onegin)’

방탕한 오네긴과 렌스키는 친구 사이고, 티티아나와 올가는 자매다. 동생인 올가와 렌스키는 약혼한 관계다. 순수한 티티아나는 오네긴을 보고 첫눈에 반해 편지를 보내지만, 오네긴은 그녀의 동생이자 친구 약혼녀인 올가에게 관심을 가진다. 그리하여 렌스키와 오네긴은 올가를 두고 결투를 벌이다, 오네긴이 우발적으로 렌스키를 죽이게 되는데…. 

이 찻잔 세트에는 이들 네 명의 주인공 모습이 코발트블루로 그려져 있다. 백자에 청색의 눈물 같은 점들, 그리고 금도금이 환상적으로 어우러지고 있는 이 서비스를 보고 있노라면 오페라의 주인공이 되어 무대에 서 있는 느낌이다. 나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아리아를 비장하게 부른다. 그 아리아는 이 오페라를 대표하는 저 유명한 렌스키의 《쿠다, 쿠다 비 우다릴리스(kuda, kuda, vi udalilis)》 《내 젊은 날은 어디로 갔는가》다.

지난번에 권력투쟁에는 성공했지만, 그 공허한 마음을 도자기에 쏟을 수밖에 없었던 두 여제(女帝)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였던 엘리자베타와 예카테리나 2세 이야기를 했다. 후사가 없었던 엘리자베타가 어쩔 수 없이 황제로 삼은 조카(표토르 3세)가 너무 무능했기에 빨리 똑똑한 손자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한 것처럼, 예카테리나도 그랬다. 힘들게 얻은 아들 파벨 1세(Pavel I)가 다소 모자라서 황제 자리를 물려줄 경우 나라의 앞날이 걱정된 그녀는 실제로 아들을 건너뛰고 그녀 스스로 제왕학을 제대로 가르친 손자, 알렉산드르 1세(1777~1825)에게 제위를 물려주려고 했다.

그녀 생각대로 파벨 1세의 5년 통치 기간은 엉망이었기에, 그는 결국 귀족들이 보낸 암살자에 의해 교살당했다. 반면 아버지를 죽인 귀족들이 추대해 황제에 오른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 대군의 침공을 물리친 ‘나라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1812년 6월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할 당시 그는 프랑스군 15만 명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 12개국 원군으로 구성된 60만 대군을 이끌었으나, 그해 겨울 살아 돌아온 이는 이 중 3만 명에 불과했다.

중국 그림의 방과 알렉산드르 1세 초상. 벽 구석에 델프트 타일로 만든 벽난로가 있다. ⓒ 조용준 제공
중국 그림의 방과 알렉산드르 1세 초상. 벽 구석에 델프트 타일로 만든 벽난로가 있다. ⓒ 조용준 제공

알렉산드르 1세의 초상화가 걸린 방은 ‘중국 그림의 방(Chinese drawing room)’으로 불린다. 그 이유는 실크 벽지 그림이 중국의 수묵화 기법으로 그려진 것이기 때문이다. 원래의 실크 벽지는 전쟁 와중에 다 타서 없어졌고, 지금 것은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생산한 다마스크 벽지로 복원한 것이다. 

이른바 공성(空城) 작전으로 나폴레옹을 물리친 알렉산드르 1세는 러시아군을 이끌고 1814년 3월 마침내 파리에 입성했다. 나폴레옹은 퇴위되어 엘바 섬에 유배되고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격파한 공로를 인정받으며 전후 처리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나폴레옹이 세운 바르샤바 공국을 양도받아 폴란드 왕국을 부활시키고 그 왕을 겸임하는 소득도 얻었다. 

브리엔 전투 승리 기념 세브르의 트로피
브리엔 전투 승리 기념 세브르의 트로피

말 타고 가는 나폴레옹 묘사한 도자기

알렉산드르 1세의 서재 겸 집무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커다란 크기의 트로피다. 1814년 프랑스 세브르 도자기에서 브리엔(Brienne) 전투를 기념해 만든 것이다.

브리엔 전투는 프랑스 북부 브리엔 르 샤토(Brienne-le-Château)라는 곳에서 1814년 1월 프랑스 나폴레옹 군대와 러시아-프로이센 연합군이 격돌한 싸움이다. 이 전투의 목적은 나폴레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부르봉 왕조를 다시 세우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전투는 나폴레옹 군대의 승리로 끝나고, 나폴레옹이 자신의 권력을 더욱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도자기 그림에도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의기양양 말을 타고 가는 나폴레옹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런데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나 베르사유 궁전에 있어야 할 이 트로피가 떡하니 상트페테르부르크 여름궁전의 알렉산드르 1세 집무실에 놓여 있는 연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 알렉산드르 1세가 군대를 이끌고 파리에 입성해 베르사유 궁전을 점령했던 기념품이다. 이를 진열해 브리엔 전투에서 패했던 설욕을 하고, 그 영광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함이다. 그런데도 이를 전시한 곳에는 막상 이런 내용이 전혀 없이, 세브르의 트로피라는 사실만 적혀 있다. 전시 목적을 망각한 관리 당국의 ‘무능’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코르닐로프(Kornilov) 형제가 만든 ‘양치기’(1840~61 제작)

1812년 나폴레옹 격퇴 전쟁을 러시아는 ‘조국 전쟁’이라고 부른다. 영웅적 투쟁으로 외세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방어하고 1813~14년의 원정 전쟁에서도 대승리를 일구어내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민족의식은 급속도로 고양됐다. 수많은 러시아 예술가들이 조국 전쟁에서 모티프를 얻은 예술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알렉산드르 1세는 국내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신비주의에 탐닉했고, 원인 모를 사인으로 48세에 급사했다. 후손도 없어 제위는 그의 동생 니콜라이 1세(Nikolai I·재위 1825~1855)에게 넘어갔다. 

예카테리나 여제의 황금기는 러시아 도자기에 있어서도 번영기였다. 1765년 ‘황실 도자기 제작소(IPM·Imperial Porcelain Manufactory)’로 이름을 정하고, 가마도 새로 만들었으며, 베를린과 프랑스 세브르로부터 솜씨 있는 도공들을 초청했다. 황실 도자기에서 만든 제품들이 여기저기 황제와 귀족들의 궁전에 놓이기 시작했다. 황실의 수요는 매우 광범위한 데다 거의 영구적이었으므로, 황실 도자기는 마음 놓고 도자기 제작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그러나 1806년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으로 인해 외국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 내수 시장을 놓고 러시아 안에서 민간 도자기 공장들과 황실 도자기 사이에 경쟁이 붙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1세 때는 프랑스 리모지(Limoges)로부터 고령토를 수입해 사용했으므로 보다 더 품질이 높은 제품들을 생산할 수 있었다. 니콜라스 1세는 황실 도자기 운영에 직접 개입해 자신이 허가한 제품만 생산하도록 했다. 1844년에는 도자기 박물관도 만들었다. 

20세기 초에 러시아 황실 도자기는 드디어 유럽을 선도하는 도자기의 하나로 도약했다. 황실 도자기는 특히 뛰어난 품질로 유명했는데, 이는 끊임없는 도구의 혁신과 좋은 재료가 이룩한 성취였다. 예를 들어 황실 도자기는 형체를 만드는 반죽을 10년 동안 저장해 숙성시킨 다음에 사용했다.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Nikolai II·1868~1918, 재위 1894~1917) 때는 아르누보가 찾아왔고 당연히 도자기 형태에도 영향을 미쳤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의 피겨린에도 예술적 가치를 담으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했다. 이후 황실 도자기는 국영화되면서 이름도 국립도자기 공장(GFZ·
Gossudarstvennyi Farforovyi Zavod)으로 바뀐다. 소비에트 연방 초기에 GFZ는 소위 프로파간다 웨어(propaganda wares), 즉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피겨린부터 접시까지 선전용 도기만을 만들었다. 선전선동의 도구로서의 예술만이 정당성을 갖는 시대였지만, 이때의 작품을 보면 예술가들이 어떻게 해서든 예술성을 담고자 했던 노력이 엿보인다.

발레 《지젤》에 출연한 안나 파블로바를 묘사한 1917년 제작 피겨린 

위 피겨린은 국립도자기 공장 시절인 1917년 제작한 것으로, 발레 《지젤(Giselle)》에 출연한 전설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브나 파블로바(Anna Pavlovna Pavlova·1881~1931)를 묘사한 것이다. 안나 파블로바는 이 이름이 나오면 저절로 연결되는 ‘빈사(瀕死)의 백조’의 그 주인공이다. ‘빈사의 백조’는 생상스가 작곡한 《동물의 사육제》 가운데 백조에 맞춰 역시 전설의 무용수이자 안무가인 미하일 포킨(Michel Fokine·1880~1942)이 안나 파블로바를 위해 만든 2분 정도의 독무 작품이다.

안나 파블로바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Mariinsky) 극장에서 밝고 경쾌한 백조가 아니라 죽음 직전의 가냘픈 몸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빈사의 백조’를 처음 추었을 때 세계 예술계는 경악했다. 이후 안나는 조국의 혁명으로 인해 타향을 떠돌아다녀야 했지만, 결코 고향의 백조들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백조 의상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백조는 그렇게 죽어가면서 다시 태어났다.

아! 대한독립 만세!
(왼쪽)로모노소프 도자기 시절을 대표하는 문양인 ‘코발트 넷’ (오른쪽)볼셰비키 혁명을 주제로 한 1932년 제작 플레이트

숨 멎게 하는 아름다움 ‘코발트 그물(Cobalt Net)’

1925년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 창립 200주년을 맞아 국립 도자기 공장은 아카데미 창립자인 미하일 로모노소프(Mikhail Lomonosov)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 로모노스프 도자기 공장(LFZ·Leningradski Farforovyi Zavod imeni M.V. Lomonosova)으로 이름이 바뀐다. 

로모노소프 시절의 도자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회사를 대표하고 있는 문양은 바로 1949년에 나온 ‘코발트 그물(Cobalt Net)’이다. 이 디자인은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에 오직 그녀만의 만찬을 위해 창조되었던 ‘핑크 그물’ 패턴에서 착안한 것이다.

‘코발트 넷’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되어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이를 볼 때마다 숨이 멎는 듯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블루 코발트 라인이 서로 교차하면서 만든 저 그물망과 22K 도금 라인이 서로 엇갈리는 도형이 이토록 매혹적인 미학의 결정체가 될 수 있다니! 더구나 코발트 블루 그물망과 금도금 리본이 이어지면서 만드는 라인은 모두 장인이 손으로 그려서 만드는 것이다. 

황실 도자기 박물관은 1744년 이후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네바 강가 황실 도자기 제작소와 함께 있다. 여기서는 ‘진짜 러시아’를 볼 수 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예카테리나 여름궁전은 관광객을 위한 상품이자, 겉 표면에만 설탕을 입혀 놓은 당의정(糖衣精)과 비슷했다. 그러나 황실 도자기 박물관은 강력하고도 진솔하게 폐부를 직접 찔러오면서, 여기가 바로 러시아라고 외친다. 

이곳은 러시아 여러 민족의 모습을 형상화한 거의 실물 크기의 피겨린을 전시하고 있다. 그게 바로 ‘진짜 러시아’였다. 그 피겨린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가슴을 쿵쾅쿵쾅 뛰게 하고, 저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무엇인가가 뭉클 올라오게 만든다.
아, 그리고 이것! 보기만 해도 눈물이 먼저 흐르는 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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