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패권 전장 된 베네수엘라, 지금도 ‘냉전시대’
  • 김원식 국제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4 13:00
  • 호수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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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러 열강들의 에너지 패권 각축장 변모…관심은 결국 ‘석유’

“베네수엘라를 다시 친미(親美) 국가로 돌려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기회다. 중국 견제에 나선 트럼프 대통령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한 나라 두 대통령’ 등장에 따라 극심한 혼란 상황에 빠져들고 있는 최근 베네수엘라 사태에 관해 워싱턴의 한 외교 전문가가 내놓은 말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외치면서 “더 이상 세계경찰 노릇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베네수엘라에서만큼은 자신들의 패권을 양보하지 않겠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기간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이 확인되면서 가치가 급부상한 베네수엘라는 1999년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하기 전까지는 대표적인 친미 국가를 유지했다. 

하지만 차베스 대통령이 집권 후 석유 산업을 국영화하는 등 사회주의 정책을 실현하고 반미 노선을 표방하면서 미국과의 대립은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3선에 성공한 차베스 대통령이 2013년 암으로 사망하면서 상황은 돌변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이 그의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지만, 이후 국제유가가 폭락하자 원유 수출에 모든 것을 기대고 있던 베네수엘라 경제는 하루아침에 몰락하는 상황을 맞았다. 인플레율이 100만%가 훨씬 넘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률과 생필품 부족 사태는 물론 300만 명이 넘는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난민 신세로 이웃 국가로 넘어가는 상황이 속출했다.

(왼쪽부터)후안 과이도 국회의장·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 EPA·AP 연합
(왼쪽부터)후안 과이도 국회의장·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 EPA·AP 연합

마두로-과이도 앞세운 대리전

최근 베네수엘라 사태에 불을 댕긴 것은 지난 1월23일 후안 과이도 국회의장이 자신을 합법적인 대통령으로 선언하면서 비롯됐다. 마두로 현 대통령이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수차례 반정부 세력의 극렬한 시위로 유혈사태까지 불거지며 점점 더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 하지만 군부가 현 마두로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사태는 점점 장기화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지난 5월3일에도 반정부 세력과 정부군의 충돌로 4명이 사망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았지만, 군부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마두로 대통령이 일단 위기 상황을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마두로 정권이 그나마 유지될 수 있는 것은 과이도 의장 중심의 야권 세력이 정권 전복이 가능할 정도로 확실한 대중적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과이도 의장은 그동안 주저하던 미국의 군사개입을 요청할 수도 있다는 뜻을 피력하면서 사태는 더욱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미국 역시 군사개입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베네수엘라 사태는 국제 열강들의 패권 싸움 대리전으로 번질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중국은 이미 500억 달러가 넘는 차관을 베네수엘라에 제공할 만큼 현 마두로 정권과는 우호적인 파트너 관계다. 러시아도 지난해 12월 전략폭격기를 베네수엘라에 배치할 만큼 자신들의 패권을 놓지 않겠다는 분위기다. 중·러 모두 베네수엘라의 석유와 지하자원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이득을 보기 때문이다. 특히 베네수엘라와 쿠바 등 중남미의 대표적인 반미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다. 중국 입장에서는 석유자원 부국인 베네수엘라를 대표적인 중남미 무역 동반자로 남겨두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은 이와 극명하게 정반대에 있다. 미국은 마두로 정권이 무너지고 다시 친미 정권이 들어서야 막대한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에 미국 석유기업들이 쉽게 진출해 이득을 볼 수 있다. 또 이는 최근 미·중 간 무역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과의 패권 전쟁에 나서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와도 일치한다. 그가 “미국은 더 이상 세계경찰 노릇을 하는 호구(sucker)가 아니”라면서도 유독 베네수엘라에만은 집착하는 이유다.

베네수엘라를 두고 전 세계는 미국과 유럽 중심의 서방국가, 중·러 중심의 비(非)서방 국가로 나뉜 모양새다. 또 인접한 콜롬비아·브라질·페루·칠레·아르헨티나 등이 과이도를 대통령으로 지지하지만, 쿠바·멕시코·볼리비아·우루과이·터키·시리아 등은 현 마두로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사태 하나가 전 세계 패권 경쟁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中·러 반발 속…美, 군사카드 ‘만지작’

여기에 재선을 위해 ‘라티노(미국에 거주하는 라틴아메리카계 사람)’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도 한몫을 더하고 있다. 미국 내 라티노의 여론이 반(反)마두로에 쏠려 있다는 것을 의식한 트럼프 대통령이 더욱 의도적으로 베네수엘라 현 정권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라티노의 지지율은 50%로 1년 사이 19%포인트나 상승했다. “세계경찰을 안 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이 연일 “미국은 베네수엘라 국민과 그들의 자유를 지지한다”면서 개입에 나서는 이유다.

미국은 각종 경제적인 제재 조치에 이어 군사옵션 카드까지 거론하며 마두로 정권의 목을 죄는 데 전념하고 있다. 또 미군 동원에 따른 막대한 국민 세금을 다른 나라를 위해 낭비하지 않겠다며 시리아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철수를 단행하면서도, 유독 베네수엘라만큼은 인도적인 지원을 명분으로 개입을 더욱 노골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남미 최대의 석유 매장량을 가진 이 지역에서는 절대로 중국과 러시아에 에너지 패권을 양보할 수 없다는 전략인 셈이다.

하지만 미국의 이러한 노골적인 개입에도 불구하고 군부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마두로 정권이 쉽게 몰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전망이다. 여기에 약 160만 명에 이르는 ‘콜렉티보스’로 불리는 무장 민병대도 마두로 정권을 지지하고 있다. 이들은 베네수엘라의 위기는 서방국가 등 외부 세력들 때문이라면서, 언제든 침공에 맞서겠다고 결기를 다지고 있다. 또 과이도 의장을 중심으로 하는 현 야권 세력은 과거 차베스 정권에 이어 현 마두로 정권의 핵심 기반이 되고 있는 빈곤층으로부터 지지를 못 얻고 있다.

결국 강대국의 에너지 패권 각축장이 되고 있는 베네수엘라 사태의 운명은 결국 베네수엘라 국민들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이 러시아와 중국의 강력한 반발을 각오하면서 지상군 투입이라는 군사옵션을 쓰는 것은 너무도 큰 위험이 따르는 도박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앞으로 반정부 시위가 더욱 확대되면서 마두로 정권에 대한 퇴진 압력이 높아지고 군부 내에서 분열도 발생한다면,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할 수 있다. 강대국 패권의 각축장이 되고 있는 베네수엘라 사태의 시계추가 과연 어느 방향으로 돌아갈지 세계의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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