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불교, 일제 침략에 편승해 식민지를 탐하다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4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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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30화 - ‘침략불교’ 민낯 드러낸 제국주의 시대 일본 불교

엊그제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이다 보니 이와 관련된 불교 행사가 다양하게 펼쳐졌다. 근대 문화도시 군산에서는 일본 조동종 승려가 기탁한 600여 점의 일제강점기 물품 전시회도 열렸다. 조동종은 국내에 하나 뿐인 일본식 사찰로 알려진 군산의 동국사에 ‘참회비’를 세운 적이 있다. 이 비문에는 “일본은 한국의 국가와 민족을 말살해 버렸는데, 우리 종문은 그 첨병이 되어 한민족의 일본 동화를 획책하고…”라고 적혀있다. 이 비문을 보면, 도대체 조동종이 조선에서 어떤 일을 벌였으며, 또 일제의 침략에 어떻게 동조했는지 궁금해진다.

조동종의 조선 진출에는 종단 주지를 지낸 다케다 한시(1863~1911)를 빼놓을 수 없다. 민비 시해에 직접 가담한 그는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무죄로 풀려난 뒤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움직여 강제 병탄에 힘을 보탰다. 또 이 종단의 조선 책임자가 되어 병탄 후 불과 45일 만에 조선 불교계와 ‘연합조약’을 맺기도 했다. 말이 연합이지 사실상 일본의 한 종파에 예속된 것이었다. 이후 조동종은 조선 각지에 수많은 사찰과 포교소를 만들어 ‘황국신민화’에 앞장서는가 하면 1935년에는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세우기도 했다.  

군산의 동국사 참회비와 그 앞에 조동종 승려가 후원한 평화의 소녀상이 서있다. 오른쪽 사진 가운데가 다케다 한시, 오른쪽이 일진회 이용구
군산의 동국사 참회비와 그 앞에 조동종 승려가 후원한 평화의 소녀상이 서있다. 오른쪽 사진 가운데가 다케다 한시, 오른쪽이 일진회 이용구

‘생존’ 위해 침략 전쟁의 앞잡이 노릇 한 일본 불교

일본 불교계가 왜 살생을 저지르는 침략 전쟁에 협력했을까? 원래 막부 시대에 승려들은 막강한 특권을 누려왔다. 그런데 메이지 신정부는 ‘천황교’인 신도(神道)를 국교로 정하고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는 등 불교 타도 정책을 폈다. 대처식육(帶妻食肉)을 내세워 “아내를 얻든 고기를 먹든 마음대로 하라”면서 승려들을 환속시키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절을 불태우고 불상을 파괴하는 사건들도 잇따랐다. 위기에 몰린 종단들은 ‘살아남기’ 위해 신정부의 군국주의 노선에 적극 동참하기로 뜻을 모았다. 종군승려를 파견해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전비 모금활동을 펴는 등 전쟁 협력에 발 벗고 나선 것이다

흥미로운 일은 사찰이 포로수용소로 둔갑한 사실이다. 불교계는 청일전쟁에서 붙잡힌 청나라군 179명을 히가시혼간지 절에 받아들였고 도쿄의 센소지에도 수용했다. 이곳에서 포로들에게 “천황의 은혜로 좋은 처우를 받고 있다”는 교육을 시켰다. 또 1904년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군 포로들이 나고야 등지의 절에 수용되기도 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연합국에 속한 일본은 중국에서 독일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독일군 포로 4600여 명이 일본 내 12개 수용소에 분산되어 시코쿠혼간지 324명, 히가시혼간지 314명, 그리고 도쿄와 오사카 절에도 수용됐다. 이처럼 자신의 성역까지 군부에 내어줄 정도였으니 종단들이 침략 전쟁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겠다.

나고야 절에 수용된 러시아군 포로. 오른쪽은 1차 세계대전 때 일본 내 포로수용소의 독일군
나고야 절에 수용된 러시아군 포로. 오른쪽은 1차 세계대전 때 일본 내 포로수용소의 독일군

일본 불교는 또한 식민지 개척에 편승해 해외로도 진출했다. 청일 전쟁의 승리로 대만을 얻자 각 종파들은 경쟁적으로 승려들을 파견했다. 초기에는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자비’를 베풀었다. 불교사학자인 나카니시 나오키 교수가 쓴 《일본불교의 초기 대만 포교》 책에 따르면, 조동종은 1896년 ‘타이페이 국어학교’ 등 8개의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이듬해에는 근대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을 세웠다. 또 일본 불교계는 ‘열대산업조사회’를 만들어 대만의 경제 부흥에 힘썼다고 한다. 여기에다 구노 요시타카라는 불교학자는 ‘남방인문연구소’를 설립해 대만의 문화적 자존심을 일깨우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 종단은 “종교를 통해 식민지인들을 동화시킨다”라는 총독부 방침에 따라 점차 ‘침략 불교’의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만 토착 불교인 ‘재교(齋敎)’를 황국신민화의 앞잡이로 이용하려 했다. 재교는 정통 불교보다 세력이 훨씬 큰 데다 대처승을 허용하는 등 일본 불교와 닮은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1915년 타이난에서 대규모 무장봉기인 ‘타파니 사건’이 터졌다. 주모자 위칭팡은 재교 사찰인 서래암을 근거지로 항일 투쟁을 벌였다. 신도들은 그를 ‘적 3만 명을 쓰러뜨릴 수 있는 보검’을 가진 신통력 있는 인물로 추종했다고 한다. 이들이 일경과 일본 거주민들을 공격하자 일제는 10개월 동안 잔혹한 진압 작전을 펼쳐 수천 명을 살상하고 1900명을 붙잡아 그중 866명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머리에 용수를 쓰고 압송되는 ‘타파니 사건’의 저항군과 위칭팡. 오른쪽은 위칭팡 항일 기념비
머리에 용수를 쓰고 압송되는 ‘타파니 사건’의 저항군과 위칭팡. 오른쪽은 위칭팡 항일 기념비

이 사건으로 총독부의 종교 탄압이 본격화되어 재교는 일본 불교에 완전히 동화되고 말았다. 정통 불교의 승려들도 승복을 입지 않았고 처자식까지 거느리며 사찰을 운영했다. 이들은 고기에다 술도 마다하지 않았고, 의례 또한 급속히 ‘왜색화’ 되었다. 대만과 같은 처지에 놓인 조선의 불교 역시 정체성을 잃기는 마찬가지였다. 병탄 이듬해 총독부는 “처자식을 둔 대처승도 주지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사찰령’을 시행했다. 일제 말기 통계를 보면 전국의 약 7000명 승려 가운데 6500여 명이 대처승일 정도로 일본 불교에 철저히 동화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승려들이 앞 다퉈 대처의 길을 가게 된 데는 일본 불교를 확산시키려는 총독부 정책 탓이 컸지만 우리 불교의 아픈 역사도 빼놓을 순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 왕조의 억불정책에 따라 승려는 ‘천민’으로 취급되어 도성 출입조차 금지되었다. 이를 일본 일련종 승려 사노가 일제의 힘을 빌어 1895년에 해제시켰다. 교세 확장을 노린 일이었지만, 결국 조선 불교계의 수백 년 쌓인 ‘한(恨)’을 엉뚱하게도 일본 종단이 풀어준 셈이었다. 왜색 불교의 습속에 물든 승려들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그 당시 우리 불교계에는 민족불교 재건과 항일 투쟁에 앞장선 승려들도 적지 않았다. 3·1운동에 불교계 대표로 참여한 백용성은 127명의 스님들과 함께 “대처승 제도를 철폐하라”며 총독부에 맞섰다. 또 3·1운동 이후 청년 불제자들이 ‘사찰령’ 폐지를 부르짖으며 교계 개혁에 나선 적도 있다. 이들은 1922년 친일 승려인 강대련 용주사 주지의 등에 북을 지우고 종로 거리를 걷게 한 ‘명고축출(鳴鼓逐出)’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활동들은 일제 탄압과 교계 권력을 쥔 주지승들의 비협조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내내 우리 불교계에는 친일과 항일의 그림자가 교차했던 것이다.

 

‘같지만 다른’ 한국과 대만 식민지 불교의 어제와 오늘

해방 후 식민지 불교는 어땠을까? 한국에서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 잔재인 대처승은 사찰에서 떠나라”면서 강압적인 정화(淨化) 정책을 폈다.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대처승들이 극력 저항하자 경찰과 폭력배들을 동원해 소탕 작전 하듯 끌어냈다. 반면에 대만은 혼인·육식·음주·흡연을 금지하는 ‘7조 규정’을 만들고 이를 엄격히 지키며 스스로 왜색을 청산했다. 주목할 부분은 대만 불교계가 조계종 같은 종단이 아닌 법인 단체로 전환해 ‘현실 참여’에 적극 나선 사실이다. 실제로 신도 수가 250만 명에 달하는 자제공덕회란 불교 단체만 해도 병원·학교·방송국 등을 세우고 숱한 봉사와 자선 활동을 펼쳐왔다.

어찌 보면 일제강점기 대만과 한국의 불교 모두 일본 불교에 동화되어 대처식육하는 ‘타락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방 후 두 나라 불교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우리는 정치권력이 불교 정화를 강제했고, 그 후유증이 교계의 고질적인 병폐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자체 정화 노력을 다하고 대중들의 삶에 직접 뛰어든 대만은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불교도일 정도로 ‘불교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다.

100년 전 3·1 만세시위를 이끈 백용성 스님은 “불교 대중화를 통해 중생을 구제하겠다”면서 산에서 내려와 암울한 현실에 뛰어들었다. 일제의 핍박에 신음하는 중생을 구원하고 ‘호국불교’ 전통을 되찾기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곳곳에서 갈등과 분노가 터져 나오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보이질 않는 요즘, 나라를 염려하는 ‘큰 스님의 큰 울림’이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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