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참히 패배하는 역사 다룬 SBS 사극 《녹두꽃》의 인기 비결
  • 하재근 문화 평론가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8 12:00
  • 호수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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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현되지 않은 염원…’인내천’과 ‘민본’의 대업은 끝나지 않았다

1894년 5월11일 죽창을 들고 봉기한 동학 농민군이 무장한 관군을 전북 정읍 황토현에서 만나 대파했다. 농민군이 처음으로 대규모 관군을 물리친 ‘황토현 전투’다. 이때 녹두장군 전봉준은 농민군 40여 명을 당시 관군에 합세했던 보부상으로 위장 침투시켜 이들이 관군을 유인하도록 하는 기책(奇策·남들이 흔히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한 꾀)을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황토현 전승일이 올 2월 국가기념일인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지정돼, 이번 5월11일 첫 기념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배우 한예리가 신동엽 시인의 서사시 《금강》의 한 대목을 낭독했다.

5월11일에는 의미 있는 드라마도 방영됐다. SBS 사극 《녹두꽃》이 바로 이날 황토현 전투를 재연했다. 《녹두꽃》은 방송 사상 처음으로 동학농민혁명을 정면으로 그렸다. 동학농민혁명 같은 거대한 사건이 지금까지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것이 의아한데 마침내 드라마화됐고, 국가기념일 지정 이후 첫 기념일이자 황토현 전승일에 황토현 전투를 그린 것이다. 기념식에서 시를 낭독한 한예리는 바로 《녹두꽃》 출연자다.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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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쾌하고 생생하게 그려낸 민초의 역사

이날 《녹두꽃》에선 주연인 백이강(조정석 분)이 농민군 별동대와 함께 보부상으로 위장, 관군에 잠입해 대승을 이끌어내는 광경이 그려졌다. 전봉준의 위장책을 드라마로 표현한 것이다. 농민군이 결집하는 과정이 장대하게 그려져 시청자의 관심이 고조됐다. 초반에 한 자릿수 시청률이 아쉬웠는데, 황토현 전투가 그려진 회차의 시청률이 10.9%로 10% 선을 넘으면서 동시간대 최강자의 자리를 굳건히 했다.

그동안 동학농민혁명은 소외된 역사였다. 서학(西學)에 맞서는 종교라는 의미로 동학(東學)이라고 했지만 동학농민혁명은 종교운동이라기보단 구체제에 항거하는 민중항쟁의 성격이 강했다. 그 후 우리 사회는 일제강점기와 독재체제로 이어졌기 때문에 민중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은 소외됐다. 민중의 힘으로 완전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후인 2004년이 돼서야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받게 되고, 올해에 이르러 마침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이런 역사적 흐름과 맞물려 《녹두꽃》이 방영된 것이다.

대규모 사극은 KBS에서 주로 했었는데 이번엔 SBS가 과감한 시도를 했다. 제작비 때문에 사극을 꺼리는 분위기에서 모험을 선택했다. 이 선택엔 작가에 대한 신뢰가 한몫했을 것이다. 바로 KBS 《정도전》의 정현민 작가가 이 작품을 썼다.

아무리 《정도전》 작가의 신작이라 해도 역사적 배경의 한계가 있다. 《정도전》은 역성혁명에 성공하는 역사인 데 반해 《녹두꽃》은 처참히 실패하는 역사다. 사람들은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작품 초반에 시청자 반응이 뜨겁지 않았다. 그러다 농민봉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점에 시청률이 치솟았다.

마지막엔 실패한다 해도 농민봉기가 전개되는 시점엔 승리와 환희의 역사였다. 《녹두꽃》은 바로 그 부분을 장쾌하고도 생생하게 그려 시청자를 격동시켰다. 민초들이 궐기해 거대한 하나가 되는 과정은 짜릿한 희열과 감동을 준다. 더군다나 한국인은 불과 얼마 전에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다. 그것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터에 《녹두꽃》에서 농민들이 횃불, 죽창을 들고 거대 군중을 형성해 함성을 지르는 모습이 각별하게 다가왔다.

뻔히 아는 역사가 전개될 거라는 우려도 빗나갔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떠올리게 하는 제목이라 전봉준이 주인공일 거라고 예측됐지만 의외로 고부군 이방의 두 아들 이야기였다. 동학농민혁명 역사는 알아도 고부군 이방집 이야기는 시청자가 모른다. 이런 민초들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그리자 작품이 신선해졌다.

그동안 화사한 퓨전 사극만 방영됐었는데 모처럼 선 굵은 대하 서사극 느낌의 드라마가 펼쳐진 것에도 의미가 크다. 왕족이나 귀족, 사대부가 아닌 일반 민초들이 전면에 나섰다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야기로만 전해지는 ‘서면 백산 앉으면 죽산’이라는 말을 화면에 재연하는 등 대규모 스케일을 선보인 것이 더욱 흥미도를 높였다. 흰옷 입은 농민들이 구름처럼 몰려 그들이 서 있으면 백산이 되고 앉으면 죽창이 우뚝우뚝 솟아 죽산이 된다는 말인데, 한국 드라마로서는 이례적인 규모로 그려냈다. 방송사의 야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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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현재로 흐른다

《정도전》은 고려말을, 《녹두꽃》은 조선말을 그렸다. 상황은 똑같다. 지배자들이 귀족에서 사대부로, 지배층 이데올로기가 불교에서 성리학으로 바뀌었을 뿐 민초들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정도전은 권문세족이 토지를 독점해 ‘농민에겐 송곳을 꽂을 땅도 없다’며 땅과 쌀을 나누어야 한다는 ‘민본정치’를 주장했다. 그래서 토지를 독점한 귀족과 불교를 혁파하고 중소지주, 신진사대부가 나라를 일신했다. 하지만 조선말이 되자 사대부가 다시 토지를 독점해 백성들이 굶주리며 죽어갔다. 그때 동학농민군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존귀하다며 ‘인내천’을 내걸고 봉기했다.

정 작가는 두 시기에 똑같이 겹친 민초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드라마의 양상이 다르다. 《정도전》에선 신진사대부가 혁명을 기획한다. 이때는 피아 지식인들의 담론 격돌이 전면에 펼쳐졌다. 이것이 박근혜 정부 당시의 소통부재 답답한 상황과 맞물려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반면에 《녹두꽃》의 농민군은 지식인이 아니다. 그 반대편의 토벌대 양반들도 명분을 내걸고 토론할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래서 《녹두꽃》에선 토론이 아닌 민초들의 꿈틀대는 역동성과 힘 대 힘 격돌이 주로 그려진다.

그래도 백성의 염원을 그린다는 점에선 근본적으로 통한다. ‘민본정치’와 ‘인내천’, 모두 현재의 양극화 갑질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이 공감할 말이다. 양극화와 지배자의 패악이 극에 달했을 때 언제나 구체제는 무너졌다. 갑질을 일삼는 자산가들은 왜 그걸 깨닫지 못할까?

촛불을 들었던 국민의 염원은 아직 실현되지 않고 있다. 사회가 바뀌지 않는 것이다. 이럴 때 《녹두꽃》에서 민초가 든 횃불이 시청자에게 대리만족이 됐다. 이런 드라마를 통해 역사는 흐른다. 정도전이 가고, 동학농민군도 갔지만 민본과 인내천의 대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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