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새 연호 ‘레이와’와 조선 도자기의 질긴 인연
  • 조용준 작가·문화탐사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9 13:00
  • 호수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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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세계사 ⑥] 일본의 3대 찻사발 모두 조선인 사기장 후손들에 의해 시작돼

일본이 5월1일부터 새로운 연호인 ‘레이와(令和)’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여전히 이 새 연호의 본질을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아베 총리가 강조하고 있는 그대로 레이와가 ‘아름다운 질서’를 뜻하나보다 하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이 연호가 감추고 있는 속살을 밝힌 글을 찾아보기 힘든 사실을 보면 학자들 역시 ‘레이와’의 진짜 의미를 밝히는 데 매우 소극적인 것으로 보인다. 일부러 그러는지, 몰라서 그러는지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일본인은 아주 옛적부터 자신들의 나라를 ‘와(和)’로 지칭했다. 진무천황(神武天皇)이 야마토(大和) 지방, 즉 지금의 나라(奈良) 땅에 건국한 이후 그들에게 일본은 ‘야마토(大和)의 나라’였다. 따라서 ‘대화혼(大和魂, やまとだましい)’, 즉 ‘야마토다마시이’는 일본의 근본을 이루는 건국과 일본인 본연의 정신을 나타내는 말이 되었다. ‘대화혼’의 일본 민족정신은 ‘와’로서 단결된 집단정신, 개성보다 협동, 부분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단결심을 의미한다.

5월1일부터 바뀐 새 연호에 맞춰 소원을 빌기 위해 찾은 사람들로 붐비는 도쿄 메이지 신궁 입구 ⓒ 조용준 제공
5월1일부터 바뀐 새 연호에 맞춰 소원을 빌기 위해 찾은 사람들로 붐비는 도쿄 메이지 신궁 입구 ⓒ 조용준 제공

그러므로 ‘와’는 일왕을 중심으로 한 총화합, 조화, 통일이다. 그것이 곧 아름다운 질서다. 강제 무력을 써서라도 주변국을 ‘와의 질서’, 곧 일본의 질서로 굴종시켜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이와’라는 말은 곧, 일본 중심의 질서로 편입시키겠다는 ‘일본의 명령’이라는 말이다. 일본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국가)은 일본에 편입시켜 조화를 꾀한다는 말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연호다. ‘레이와’는 일왕의 의도가 아닌, 아베 총리의 강요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것이 일본 언론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실제로 일왕은 연호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아베 총리는 왜 굳이 이렇게 호전적인 연호를 선택했을까. 그 속 깊은 ‘혼네(진심)’를 알기 위해서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아베야말로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조슈(長洲)번 하급 사무라이의 적자(嫡子)이기 때문이다. 또한 메이지 유신의 진짜 성공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조선 도자기가 일본에 건너가서 어떤 사회역사적 맥락을 가졌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날 ‘레이와’ 연호가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정확한 배경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이번 호부터는 조선과 얽힌 일본 도자기 역사를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일본 규슈에는 회령자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가마들이 많다.
일본 규슈에는 회령자기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가마들이 많다.

일본 도자기의 원류는 함경도의 ‘회령자기’

이름에서부터 조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일본 규슈 서쪽에 위치한 가라쓰(唐津)는 원래 해적, 즉 왜구(倭寇)들의 본거지였다. 본디 해적이란 노략질할 재화들이 풍부한 곳이 있어야 들끓기 마련이다. 따라서 풍요로운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가라쓰야말로 해적들이 자리 잡기에 가장 좋은 장소였다. 

실제 가라쓰 인근 요부코(呼子)는 유명한 해적인 히젠 마쓰우라토(肥前松浦党) 하타(波多) 가문의 거점지역이었다. 임진왜란 때 가라쓰가 조선 침공의 전진기지가 된 것도 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가라쓰성과 시내 모습 ⓒ 조용준 제공
가라쓰성과 시내 모습 ⓒ 조용준 제공

임진왜란 이전 가라쓰에서 일본 도기 생산이 시작된 것은 이들이 한반도와 중국 해안 지역을 침탈하면서 수완 좋은 사기장들을 잡아갔기 때문이다. 일본 도자기 역사에서 1200도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유약을 발라 자기를 구운 시기는 16세기 이전으로 올라가지 못하는데, 임진왜란 이전에 유약을 바른 고급 도기를 만들었던 곳은 일본 전체를 통틀어 오직 가라쓰뿐이었다. 그러니 일본의 도자기 역사는 임진왜란 이전부터 왜구의 수탈과 납치에 의해 이미 가라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회령자기’다. 회령자기는 말 그대로 백두대간 두만강 하류 한반도의 최북단에 위치한 회령 땅에서 만든 도자기다. 회령은 본래 고구려 땅이었으나 발해를 거쳐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에 속했다가 조선초 세종의 6진 개척에 의해 다시 찾은 우리 땅이다. 

회령에서 도자기가 발달하기까지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략했을 당시 금나라는 송나라 시대 유명한 가마였던 허난성(河南省) 균요(鈞窯)에서 우수한 도자기를 얻어냈다. 균요는 허난성 위셴(禹縣)이 중심지로 황허강 중류 뤄양(洛陽)과 카이펑(開封) 중간의 남쪽에 있다. 금(金)나라가 지배하던 12세기엔 균요의 생산품을 주로 금 왕실에서 사용했다. 

이후 금나라가 세력이 약화되자 자신들의 근거지인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일대로 균요의 사기장들을 이주시켰고, 이들은 질 좋은 점토와 땔감이 많은 회령 운두산(雲頭山) 자락에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생산했다. 그러다가 조선 세종 때 6진(六鎭) 개척으로 이곳이 우리 영토로 편입된 뒤 회령 도자기는 한반도 북부지방 사람들의 생활용기로 자리 잡았다. 본래의 균요는 점차 쇠퇴해 원나라를 끝으로 가마의 불길이 꺼졌지만, 조선 땅의 균요는 본래의 균요를 뛰어넘는 위대한 도자기로 다시 태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회령자기’다. 

그런데 이 회령자기는 앞서 말한 대로 왜구의 납치에 의해 가라쓰로 그 기술이 전수되었다. 이후 회령자기는 가라쓰에서 계속 진보 발전해 왔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 명맥이 끊어져 그 존재가 까맣게 잊힌 남한과 달리, 일본의 가라쓰에서 오히려 회령자기를 온전히 계승 발전시킨 서글픈 역사적 아이러니가 생겼다. 

일본에서는 최고의 찻사발을 선택하는 기준으로 ‘첫째 라쿠(楽), 둘째 하기(萩), 셋째 가라쓰(唐津)’라는 말이 전해져 내려왔다. 최고의 찻사발은 교토 라쿠 가마에서 만든 것이고, 두 번째가 하기, 세 번째가 가라쓰에서 생산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때 가라쓰의 찻사발은 거개가 회령자기의 후예들이라고 보면 된다. 뒤에서 차근차근 얘기하겠지만, 라쿠와 하기 찻사발 역시 모두 조선인 사기장의 후손들에 의해 그 역사가 시작됐다. 가라쓰도 그러하니, 3대 찻사발 모두가 조선 땅의 사기장 피눈물의 결정체다. 참으로 참담한 역사다.

그런데 가라쓰의 원래 이름은 ‘한진(韓津)’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고대 가야 사람들이 처음에 이곳과 교류하면서 ‘한민족의 나루’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일 것으로 추정한다. 윤용이 명지대 교수의 학설에 따르면 ‘한진’을 ‘가라쓰’라고 쓰기 시작한 것은 1368년 무렵부터다. 그러니 가라쓰는 일본 도자기의 발생지로서 조선의 영향을 부인할 수 없다. 일본에서 도자기를 ‘야키모노(焼やき物)’라는 말 대신 ‘가라쓰모노(唐津物)’라고 흔히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역사가 반영된 사실을 입증한다.

16세기 후반~17세기 초 ‘조선가라쓰’ 주전자. 이데미쓰(出光)미술관 소장 ⓒ 조용준 제공
16세기 후반~17세기 초 ‘조선가라쓰’ 주전자. 이데미쓰(出光)미술관 소장 ⓒ 조용준 제공
‘첫째가 라쿠, 둘째가 하기, 셋째가 가라쓰’라고 쓰여 있는 교토 한 도자기 전문점의 진열장. 앞에 놓인 것이 라쿠 찻사발이다.
‘첫째가 라쿠, 둘째가 하기, 셋째가 가라쓰’라고 쓰여 있는 교토 한 도자기 전문점의 진열장. 앞에 놓인 것이 라쿠 찻사발이다.

가라쓰를 다니다 보면 왠지 이곳이 일본이라는 느낌이 잘 들지 않는다. 분명 보이는 글자며 귓가로 들리는 말이 모두 다르지만, 그와 상관없이 조선 땅의 한구석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네 마음을 가깝게 당기는 친숙함은 이곳 도자기 종류에 ‘조선가라쓰(朝鮮唐津)’가 있다는 사실에서도 우러난다. 

가라쓰야키는 에가라쓰(絵唐津), 마다라가라쓰(斑唐津), 구로가라쓰(黒唐津), 미시마(三島), 고히키(粉引き) 그리고 조선가라쓰의 6종류로 구분된다. 그래서 조선가라쓰는 항아리나 단지의 경우 ‘朝鮮唐津 壺’, 조그만 술잔이나 찻잔을 뜻하는 ‘구이노미(ぐい呑)’는 ‘朝鮮唐津ぐい呑’이라고 표기한다. 미시마(三島) 역시 조선에서 유래한 기법이다. 그만큼 이 땅에서 만드는 그릇들은 조선에서 우리 조상들이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것이 많다는 이야기다. 

마쓰우라 시게노부(松浦鎮信·1549~1614)는 마쓰우라 가문의 26대 당주로, 히라도(平戶)의 초대 번주다. 임진왜란 당시 마쓰우라 시게노부는 가라쓰 앞바다에 있는 전략상 요충지 이키(壱岐)섬에 가쓰모토조(勝本城)를 쌓고 조선 침공의 향도(嚮導·안내자) 역할을 했다. 동생, 아들과 함께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의 제1부대로 참여해 전쟁의 서막을 올린 이후 7년 동안 울산성 전투, 순천성 전투를 포함해 24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 보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만큼이나 미운 ‘원수’다. 

그가 남긴 진중일기(『松浦法印鎮信朝鮮七ヶ年間陣中日記之抄』)에 따르면 조선 출정 기간 중 3000명 부하 중에서 1918명이 전사했지만, 돌아올 때는 오히려 인원이 720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가 귀국하면서 납치한 조선인 사기장과 양민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다. 

그가 강제로 끌고 온 사람 가운데는 밀밭에 숨어 있었던 아름다운 조선 궁녀 고무기상(小麥樣)도 있었다. 원래 이름은 곽청희(廓淸姬)였으나, 밀밭에 숨어 있다 들켰기 때문에 ‘고무기’라고 불렸다. 시게노부는 이 궁녀를 측실로 삼아 총애했다. 그녀는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히라도번의 중신으로 활약했다. 그녀는 히라도에서 많은 신망을 얻어 묘지도 두 군데에 만들어졌다. 하나는 시게노부 옆에, 또 하나는 조선이 보이는 현해탄 해변(根獅子)에 있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왜구 출몰도 ⓒ 조용준 제공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의 왜구 출몰도 ⓒ 조용준 제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히라도 번주에게 보낸 쇼인조. 바테렌(バテレン, 가톨릭 신부)을 추방하라는 내용이다(마쓰우라 사료박물관 소장). ⓒ 조용준 제공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87년 히라도 번주에게 보낸 쇼인조. 바테렌(バテレン, 가톨릭 신부)을 추방하라는 내용이다(마쓰우라 사료박물관 소장). ⓒ 조용준 제공

임진왜란 때 조선 사기장들 일본으로 끌려가

히데요시가 1593년(선조 26년) 11월29일 시게노부에게 보낸 슈인조(朱印狀)의 내용을 보면 조선 기술자들의 납치를 얼마나 독려했는지 여실히 나타난다. 히라도에 있는 마쓰우라 사료박물관은 히데요시의 이 쇼인조를 비롯해 많은 사료들을 소장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로잡아 놓은 조선사람 가운데 세공 기술자와 바느질 잘하는 여인, 손재주가 좋은 여인이 있으면 곁에 두어 여러 가지 일을 시키고 싶으니 보내주기 바란다.”  

시게노부가 이 쇼인조를 받아본 것은 히데요시가 이를 쓴 날짜로부터 4개월이나 지난 후인 1594년 3월11일이었다. 여기서 언급된 세공 기술자(細工任者)의 대표적인 존재가 바로 사기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쇼인조는 시게노부 한 사람에게만 보낸 것이 아니다. 히데요시는 지금의 건설부 장관에 해당하는 쇼리다이후(修理大夫)이며 가신 5인(五大老) 중 한 명이었던 나카카와 히데요리(中川秀成)에게도 비슷한 내용의 쇼인조를 보낸다. 1597년 11월29일에 보낸 이것의 내용은 위와 비슷한데, 다만 조선 요리를 잘하는 자를 각별히 뽑아 진사(進士)하고, 이들은 성내에 거주하면서 각자의 직책에 종사하도록 하라고 한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러한 쇼인조는 아마도 조선에 출병한 거의 모든 다이묘들이 받았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히데요시는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간 여인들을 통해 옷을 지어 입었고 음식을 만들어 먹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히데요시를 비롯한 다이묘들이 입은 옷은 조선 궁궐에서 임금이 흔히 입었던 한복과 비슷했고, 당시 일본의 요리 문화는 매우 저급한 수준이었으므로 조선 궁궐에 진상했던 요리들이 히데요시를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시게노부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해 조선 땅에서 수많은 양민을 납치해 오니, 그중에는 진해(지금은 창원시에 포함) 웅천(熊川) 출신의 사기장인 거관(巨関)과 종차관(從次貫), 순천 출신 사기장 김영구(金永久)가 있었다. 또한 거관과 함께 웅천에서 데려온 사람 가운데는 ‘에이(嫛)’, 나중 고려할머니(高麗媼), 일본어로는 고라이바바(こうらいばば)라 불리는 계집아이도 있었다. 

한자로 ‘嫛’는 계집아이라는 뜻이다. 또한 일본말로 ‘에이’는 앳되고 예뻐 보이는 여성을 의미한다. 그러니 우리말 ‘계집아이’ 혹은 ‘아이’는 일본말 ‘에이’의 어원이 되는 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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