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란 “영화 48편 만에 첫 주연, 버티면 이긴다”
  • 하은정 우먼센스 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25 15:00
  • 호수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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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걸캅스》로 돌아온 라미란

언젠가 한 연예부 기자가 라미란을 인터뷰한 뒤 설레는 목소리로 후일담을 들려준 적이 있다. 참고로 여기자다. “너무 좋았어요. 라미란씨는 제가 만나본 인터뷰이 중 1등이에요! 뭐랄까, 언변도 너무 좋고 솔직해서 편안하지만 깊은 인터뷰를 할 수 있었어요. 옆집 언니와 대화하는 기분이랄까요? 심지어 실물이 예뻐서 깜짝 놀랐어요!” 이렇듯 그녀를 만나고 온 기자들은 ‘미란매직’에 빠지기 일쑤였다. 그런 그녀가 드디어 주인공을 꿰찼다. 심지어 라미란을 두고 시나리오를 썼을 만큼 ‘라미란을 위한, 라미란에 의한’ 작품이다. 영화 《걸캅스》에서 라미란은 전설적인 형사에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민원실 주무관이 된 ‘박미영’ 역을 맡았다. 라미란 특유의 친근한 매력을 바탕으로 한 전매특허 코미디이자 드라마다.

평소 라미란이 자주 하던 말이 있다. “가늘고 길게 가고 싶다.” “버티는 게 이기는 것이다.” 정말 버티니까 이뤄졌다. 실제로 라미란은 2005년 《친절한 금자씨》로 데뷔한 이후 쉼 없이 달려왔다. MBC 《진짜사나이》, KBS 《언니들의 슬램덩크》 등 예능 프로그램을 비롯해 tvN 《응답하라1988》 《막돼먹은 영애씨》까지 스크린과 TV를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이제는 그를 롤모델로 꼽는 후배도 적지 않다. ‘희망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영화 48편, 제 나이 마흔다섯, 영화 시작한 지 20년 좀 넘었는데 ‘첫 주연’을 맡게 된 라미란입니다.” 평생 잊지 못할 자기소개다. 

ⓒ CJ 엔터테인먼트
ⓒ CJ 엔터테인먼트

주연이 된 소감부터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다 제 명에 못 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너무 부담이 돼서요. 하하. 매 장면 최선을 다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조연 때 하던 것처럼 하겠다’ 했는데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주인공처럼 할게요’ 했다니까요. 사실은 몇 년 전부터 주연 대본이 들어왔지만 거절해 왔었어요. 준비가 안 됐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걸캅스》는 제 나이 때의 평범한 공무원 역할이고, 또 할 수 있는 정도의 액션이겠다 싶어서 출연하게 됐어요.”

배우 입장에서 주연과 조연의 차이는 무엇인가.

“엄밀히 따지면 주연, 조연의 차이는 대사량일 뿐입니다. 배우라면 누구나 연기에 최선을 다하니까요. 어쨌든 《걸캅스》가 제게 뜻깊은 작품임은 분명해요. 영화로 데뷔한 지 20년 만에 첫 주연을 맡았으니까요. 저는 가늘고 길게 연기를 하는 것이 목표였어요. 이렇게 주인공까지 하게 될지는 몰랐어요. 버티니까 이런 날도 오네요(웃음).”

라미란이라는 배우를 보고 시나리오를 썼다고 한다. 소감이 어땠나.

“사실 너무 고마웠어요. 그래서 이상한 작품이라도 출연해야 하나, 싶었는데 시나리오를 읽으니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호흡이 빠르고 재미있었어요. 좋은 작품이라 더 감사했지요.”

완성된 영화를 보니 어떤가.

“사실 객관성을 잃었어요. 하하. 다만 액션이 생각보다 잘 나온 건 분명합니다. 현실적이면서 본능이 살아 있는 액션이라고 할까요.”

처음으로 하는 액션 연기다.

“일부러 몸을 만들 필요는 없었어요. 열정 넘쳤던 형사 시절은 과거일 뿐, 현재는 민원실 주무관으로 겨우 먹고사는 아줌마니까요. 그래서 뛰고 움직이는 게 둔할 수밖에 없었죠. 물론 액션 연기를 위해 한 달 정도 액션스쿨을 다니며 훈련을 받았어요. 첫날 연습하고 돌아와 아예 앓아누웠죠. 뮤지컬 이후에 이렇게 과격하게 움직여보는 게 오랜만이었거든요. 그래서 그런지 몸을 푸는 느낌도 들었고 시원했어요.”

《걸캅스》는 48시간 후 업로드가 예고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여형사 콤비가 비공식 수사에 나서는 이야기다.

최근 연예계에 파장을 일으킨 사건들과 유사한 소재로 화제를 모았다.

“사실 이 영화는 몇 년 전부터 기획된 작품이에요. 감독님도 시나리오를 쓸 때 디지털 성범죄에 관한 뉴스를 보시고 자료를 찾아가면서 작업하셨어요. 현실과의 높은 싱크로율이 독이 될지 약이 될지는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범죄에 대해 인식하는 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해요. 관련된 뉴스들을 접하고 보니 범죄의 심각성은 큰데 처벌은 약하다는 게 답답하기도 했고요. 사실 피해자들은 자신이 겪은 일을 평생 마음에 안고 살아가잖아요. 더 이상 피해자들이 움츠러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편으로 출연한 배우 윤상현씨의 찌질하지만 순수한 역할도 웃음을 선사한다.

“(윤)상현 선배가 처음 대본 리딩을 할 때 머리를 짧게 이발하고 엄청 멋있게 온 거예요. 그래서 제가 ‘찌질한 역할인데 왜 이렇게 멋있으세요?’하고 물어보니 ‘나, 멋있는 역할 아니야?’라고 당황해하더라고요. 결국 촬영 때는 가발을 썼답니다(웃음). 사실 남자배우들이 꺼려 할 수도 있는 역할인데 망가짐도 불사하고 열연해 줘서 너무 감사했어요. (윤)상현 선배는 사람 자체에 사랑스러움이 있어요. 원수 같은 남편인데 미워할 수 없게 만든 건 순전히 사람 자체의 매력인 것 같아요.”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는 극 중 시누이 사이로 출연한 이성경과의 연기 호흡이었다.

“성경이는 자기 몫을 알아서 해내는 배우예요. 동시에 나이답지 않게 건강을 무척 챙기는 사람입니다. 하하. 아니 저보다 건강관리를 더 잘하더라고요. 어린이 영양제부터 비타민까지 챙겨 먹는데, 한번씩 주는 걸 얻어먹기도 했어요. 혈액순환이 잘된다고 같이 냉각사우나도 했답니다. 친근해서 처음부터 합이 잘 맞았어요.”

‘라미란’만의 연기 철학이 있나.

“‘연기하지 않기’예요. 최대한 힘 빼고 극 중 인물로 그 장소에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 어떤 역할을 하든 제 본연의 모습이 많이 나오는 것 같아요. 한데 이게 참 어려운 것이긴 하죠(웃음).” 

많은 후배들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됐다. 조언을 해 준다면.

“마치 계단을 밟듯 수순을 따르니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많은 분들이 제가 그간 해 온 것들을 높게 평가해 주시고, 후배들도 ‘언니처럼 되고 싶다’고들 하는데 기분이 좋아요. 몇 년 전만 해도 후배들에게 ‘롤모델’이라고 하면 ‘뭣 하러 나야?’ 했는데 돌이켜보니 나만큼 운 좋게 다양한 길을 걸어온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가능했던 건 제가 특별해서가 아니에요. 잘 버틴 것뿐이죠. 후배들에게도 잘 버티라는 말을 많이 해요. 어떻게든 버티다 보면 자리가 생기니까요. 지금도 저는 ‘안주하지 말자’ ‘조금만 더 해 보자’라는 주문을 외워요.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낫다는 생각입니다. 욕을 먹더라도 끊임없이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정작 라미란의 롤모델은 누구인가. 

“드라마 《눈이 부시게》로 백상 시상식에서 수상하신 김혜자 선생님이 너무 멋있으시더라고요. 후배에게 나아갈 길을 몸소 보여주시죠. 그야말로 진정한 걸크러시 아닙니까? 제가 그 연배가 됐을 때 선생님과 같은 에너지로 연기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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