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려진 아픔을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겨낸 ‘생존의 역사’
  •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30 16: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31화 - 강제 이주, 그 버려진 땅의 역사

카자흐스탄 바스토베는 구(舊)소련 시절 강제 이주를 당한 한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연해주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른 지 한 달 만에 첫발을 디딘 장소이기도 하다. 지난 5월 중순 필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 맨 먼저 마을 주변에 토굴을 판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안내를 맡은 조 웨녜라(74)는 “우리 부모님들도 이주 첫 겨울에 토굴을 파고 바닥에 온돌을 깔아 영하 20도 추위를 간신히 넘겼다”면서 이주 당시의 참상을 전했다.

흔히 강제 이주란 게 1937년 스탈린이 한인 17만 명을 일본과 내통하는 세력으로 몰아 중앙아시아로 추방한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소련 내 다른 소수민족들도 강제 이주를 당했으나,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로 독일인·체첸인·타타르인·투르크족 등 수백만 명이 한인과 똑같이 ‘적의 첩자’란 엉뚱한 누명을 쓰고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로 쫓겨났다.

바스토베 토굴 흔적과 조 웨녜라. 고려인 마을 인근의 체첸인 묘지와 하산 이스라일로프
바스토베 토굴 흔적과 조 웨녜라. 고려인 마을 인근의 체첸인 묘지와 하산 이스라일로프

‘적국의 간첩’ 누명쓰고 얼어붙은 땅으로 내몰린 구소련의 소수민족들

가장 참혹한 일은 체첸인 강제 이주 때 일어났다. 수차례 전쟁 끝에 1859년 러시아제국에 정복당한 이 산악 민족은 소련 출범 이후에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이들은 또 다시 무력항쟁 기지를 만들고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변호사 출신인 하산 이스라일로프(1910~44)가 이끈 저항 세력은 사관학교를 기습해 200여 명의 생도를 사살하고 소련군과 비밀경찰 1만여 명을 처단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들의 끈질긴 저항에 ‘질려버린’ 스탈린은 39만 명 남짓한 체첸인들을 통째로 강제 이주시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1944년 2월 무려 12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이 체첸 전역에서 ‘위장작전’을 펼쳤다.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마을마다 잔치를 벌이고 노래자랑까지 곁들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람들이 모여들자 갑자기 총칼을 들이대며 강제로 트럭에 태웠다. 멋모르고 구경나온 주민들은 거의 빈손으로 시베리아로 끌려가게 됐던 것이다. 반항하는 자들은 즉각 처형됐고, 게릴라 거점인 샤토이 지역에선 주민 700여 명이 마구간에 갇혀 불에 타 죽는 사건도 일어났다. 또 혹한에다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가다 보니 서너 명 중 한 명꼴로 얼어 죽거나 굶어죽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사실 체첸인이야 소련에 무력 저항했고, 크림반도의 타타르계 러시아인도 3만 명이나 독일군에 입대하는 반역 행위를 저질렀다. 한데 1941년 나치가 소련을 침략하자 스탈린은 독일계 이민자 40여만 명에게도 “나치 독일의 지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바로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만주를 점령하자 인접한 연해주 한인들을 추방한 것과 꼭 닮았다. 하지만 ‘적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인들이 되레 일제 앞잡이로 취급되어 강제로 내몰린 사실은 너무도 ‘어이없고 뒤틀린’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놀랍게도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는 미국에서도 ‘적국’ 일본 이민자들을 강제 이주시킨 일이 벌어졌다. 진주만 공습 후 두 달만인 1942년 2월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적성국 출신 일본인들을 수용소에 강제 격리시킨다”라는 ‘행정명령 9066호’를 내렸다. 이 조치로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이 서부 사막지대에 있는 10군데 수용소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미국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었고 어린이들도 상당수 포함됐다. 일본인 피가 조금이라도 섞인 사람은 즉각 체포됐는데, 백인 피가 섞인 가정은 예외로 두어 훗날 인종차별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일본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사람은 무조건 잡아 가둬라”

왜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걸까? 진주만 공습 당시 하와이 니하우 섬에 불시착한 일본군 조종사가 원주민들과 총격을 벌이다가 칼에 찔려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문제는 일본 교민들이 목숨을 걸고 조종사를 구하려 한 사실이었다. 하라다란 교민은 구출에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조국’ 일본을 위해 싸운 이들의 행동은 미국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사건 3개월 뒤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일본인 격리 수용’ 찬성이 59%에 달했고 반대는 25%에 그쳤다. 결국 ‘니하우 사건’을 계기로 “일본계 미국인들이 미국을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란 우려가 팽배하게 되었고, 이는 곧 강제 수용 결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일본군 조종사와 원 안은 자살한 하라다 요시오. 오른쪽은 연행되는 일본계 미국인들
일본군 조종사와 원 안은 자살한 하라다 요시오. 오른쪽은 연행되는 일본계 미국인들

그런데 수용소가 지어지기도 전에 이주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에 생활환경은 끔찍했다. 병영처럼 지어진 기다란 건물에 수도나 난방, 취사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경마장 마구간이 숙소로 쓰이기도 했다. 더구나 높은 철조망을 치고 무장 군인들이 밤낮으로 지켜 마치 포로수용소를 방불케 했다. 이곳에서는 미국에 대한 ‘충성도’ 조사도 벌어졌다. 이 조사에서 천황 숭배자나 일본의 승전을 확신하는 위험인물들은 캘리포니아주 툴루 호수에 있는 특별 시설로 보내졌다. 수용소에서는 절도·살인 등의 범죄가 끊이지 않았고, “일본으로 보내 달라”며 집단 농성을 펼치거나 탈출하다가 사살되는 경우도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재산을 둘러싸고 희비가 엇갈린 점이다. 강제 수용이 갑자기 이루어진데다 격리 상태가 계속되자 수용자들은 재산을 스스로 포기하거나 헐값에 넘겨야 했다. 당초 미국 정부는 “재산보전 신청을 하면 정부가 관리해 주겠다”고 알렸지만 ‘가혹한’ 정부를 믿고 신청을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고다 게이사부로란 사람은 백인 변호사에게 자산 관리를 맡겨 캘리포니아에 있던 1만 에이커 규모의 농장을 지켜냈다. 1만 에이커는 여의도 면적의 13배가 넘는 크기다. 그 당시 반일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이 사례는 아주 놀라운 일이어서 고다에게는 ‘라이스 킹’이란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왼쪽은 고다 게이사부로. 오른쪽은 악명 높은 툴루 수용소와 혼다 의원, 배우 존 다케이
왼쪽은 고다 게이사부로. 오른쪽은 악명 높은 툴루 수용소와 혼다 의원, 배우 존 다케이

당시 수용된 이들 중에는 미국 정계의 대표적 친한파 의원으로 알려진 마이크 혼다(1941~ )가 있었다. 또 공상과학영화 《스타트렉》에 출연한 배우 존 다케이(1937~  )는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아칸소주 로와 수용소에 끌려가 3년 동안 혹독한 생활을 겪었다. 이런 경험 탓에 혼다 의원은 미 의회에서 무슬림 이민자들의 권익을 옹호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다케이 또한  2017년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1945년 1월, 약 3년 만에 수용소에서 풀려났지만 미국 정부의 공식 사과는 40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1988년 레이건 대통령은 살아남은 수용자들에게 고작 2만 달러씩 보상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집·농장·직장과 사업체를 날려버린 사람들로서는 분통 터질 노릇이었을 게다. 또 소련 정부는 1964년에 가서야 “소비에트의 모든 민족이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 기여하여…”라고 선언하고 소수민족들의 ‘간첩 누명’을 벗겨 주었다. 그러나 재산이나 금전 손실에 대한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소련 붕괴 후 카자흐스탄 정부는 이주 한인들에게 얼마간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아픔을 위로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수도 타슈켄트의 ‘박해’ 전시관에 한인들의 고단한 삶을 기억하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두 나라에서 한인들은 소비에트 최고의 노동영웅과 수많은 노력영웅으로 거듭났고, 독립 후에는 초대 대법원장, 상원의원, 기업인, 스포츠 스타로 우뚝 섰다. 나라 잃은 유랑 민족이 이정도 위상을 차지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피땀 어린 노력이 뒤따랐을지 짐작할 수 있겠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조선·일본·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등 너덧 나라 국민으로 산 민족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하물며 정치·이념·종교마저 몇 차례나 뒤바뀐 땅에서 자신의 뿌리를 지켜 온 민족은 더더욱 없을 터다. 버려진 아픔을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겨낸 한인들이 또 어떤 ‘생존의 역사’를 써나갈까. 그것이 궁금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