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로 돌변한 마지막 손님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6.03 11:00
  • 호수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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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락인의 사건추적] 경북 영주 택시기사 살인 사건

지난 2003년 5월23일 아침 5시50분쯤, 경북 상주시 내서면 능암리의 한 주민은 논에 나왔다가 길가 둑 밑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이봐요” “이봐요” 하며 몸을 흔들었지만 미동도 없었다. 몸은 싸늘했고 숨도 쉬지 않았다. 옷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화들짝 놀란 주민은 경찰에 “사람이 죽어 있다”고 신고했다. 

관할 상주경찰서 형사들이 사건 현장에 도착했다. 피살자의 신원은 영주 개인택시 운전기사인 김아무개씨(43)로 확인됐다. 그는 온몸을 난자당한 채 참혹한 모습으로 숨져 있었다. 현장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김씨가 신고 있던 슬리퍼 한 짝, 안경 등 소지품이 널브러져 있었다. 

또 치열한 몸싸움 흔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피해자의 시신에는 범인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던 상처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손가락에는 범인의 칼을 막으면서 생긴 방어흔이, 손등에는 누운 상태에서 긁힌 상처가 있었다. 등과 어깨, 팔꿈치에서도 여러 개의 찰과상이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 사망원인은 ‘자상에 의한 과다 출혈’로 나왔다. 시신의 가슴과 복부에는 칼에 찔린 세 개의 자상이 있었는데, 이 중 복부에 있는 상처가 치명적인 상처였다. 국과수는 “소장을 감싸고 있는 장간막이 찔렸는데 이 부분 혈관들이 터지면서 출혈이 심했다”고 설명했다.  

ⓒ 일러스트 오상민
ⓒ 일러스트 오상민

산기슭에서 발견된 참혹한 시신

김씨의 몸에 난 자상은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보통 서 있을 때 칼에 찔리면 상처는 수직으로 나게 돼 있다. 그런데 김씨의 몸에 난 상처는 대각선 방향이었다. 김씨가 서 있는 상태가 아닌 누워 있을 때 칼에 찔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가슴과 복부를 여러 차례 찔리면 본능적으로 칼을 잡게 되는데 이때 손바닥에 상처가 나게 마련이다. 그런데 김씨에게는 손바닥 상처가 없었다. 김씨가 완전히 제압당해 저항 불능 상태에서 칼에 찔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범행에 사용된 흉기는 14cm 정도의 다용도 칼로 추정됐다. 범행 현장에 김씨의 택시가 없는 것으로 봐서 범인이 타고 도주한 것으로 보였다. 

경찰은 수사본부를 차리고 시신 발견 현장을 정밀 감식했다. 현장 상황으로 볼 때는 범인의 지문이나 머리카락 등이 곳곳에 남아 있을 듯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현장 어디에도 범인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지문, DNA 등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은 군부대의 병력을 지원받아 현장수색에 나섰다. 인근을 이 잡듯 샅샅이 뒤졌지만 범행에 사용된 흉기 등 추가로 찾아낸 것은 없었다.

다음 날인 5월24일 오전 경찰에 한 택시기사의 신고가 접수됐다. 안동시 천리동의 한 상가건물 주차장을 지나는데 “영주 번호판을 달고 주차해 있는 택시가 아무래도 수상하다”고 알려온 것이다. 경찰이 현장에 출동해 보니 놀랍게도 살해된 김씨가 몰던 택시였다. 

택시가 처음 주차돼 있던 곳은 맞은편에 있는 자재상가 앞이었다. 오전 7시30분쯤 주인은 가게 바로 앞에 주차된 택시를 보고 “누가 술을 마신 후 주차해 놓고 모텔에 자러 간 모양”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게 주인은 영업에 방해될 것을 우려해 택시를 주차장으로 옮겼다. 다행히 택시 안에 열쇠가 꽂혀 있었다. 

경찰은 택시에 대한 정밀감식을 벌였다. 택시 안에는 몸싸움을 한 정황이 없었다. 김씨가 신고 있던 나머지 슬리퍼 한 짝과 현금 2만원, 그리고 동전이 있었다. 지문 9개가 나왔지만 범인의 것은 없었다. 차량 외부를 물걸레로 닦은 흔적이 나왔는데 범인이 택시를 버리기 전 증거인멸을 위해 차량 내·외부를 닦아낸 것으로 판단됐다. 택시 안에 범인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경찰의 기대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도대체 누가 왜 김씨를 상주의 깊은 산속으로 유인해 살해한 것일까.

안동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택시와 용의자 몽타주 ⓒ KBS1 《강력반 X-파일 끝까지 간다》 방송 캡처
안동에서 발견된 피해자의 택시와 용의자 몽타주 ⓒ KBS1 《강력반 X-파일 끝까지 간다》 방송 캡처

희미하게 찍힌 CCTV 속 용의자

경찰은 통신수사와 탐문수사를 통해 사건의 퍼즐을 맞춰 나갔다. 당시 김씨는 주로 손님의 전화를 받고 움직이는 콜택시를 운전했다. 그가 운전하던 택시는 영주시에서 몇 대 안 되는 고급 차종(다이너스티)이었다. 이런 차량을 선호하는 고객들 중에는 단골손님도 적지 않았다. 

5월22일 밤 10시58분, 김씨는 한 손님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김씨에게 영주의 한 관광호텔 앞으로 와 달라고 했다. 김씨는 그가 말한 장소로 이동해 기다렸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예약 손님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씨의 모습은 오후 11시40분쯤 택시 운전을 하는 조카에게 목격됐다. 그는 조카에게 “상주로 가는 손님을 기다린다”고 말했다. 그러나 손님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김씨는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내려오지 않자 호텔 앞에서 몇 차례 경적을 울렸다. 이때 호텔 직원이 내려와 김씨와 간단히 대화를 했다. 

오후 11시44분 김씨는 휴대전화에 남아 있던 발신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던 것이다. 오후 11시54분 예약 손님에게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관광호텔 앞에 있던 김씨는 어디론가 이동한 후 그를 태우고 상주로 출발했다. 김씨의 마지막 행적이 확인된 곳은 23일 오전 0시20분쯤이다. 그는 영주를 빠져나가기 전 시외로 나가는 길목에 있는 LPG충전소에서 가스를 충전했다.  

이후 김씨는 영주에서 상주까지 82.7km를 이동했다. 그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70여 가구밖에 살지 않는 작은 마을이다. 사건 현장은 마을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산기슭에 있다. 

여러 정황으로 보면 김씨는 마을을 지나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면서 위험을 감지했다. 그리고 시신 발견 현장에서 멈춰서고 택시에서 내려 도망을 쳤다. 하지만 슬리퍼가 벗겨지고 안경마저 땅에 떨어지면서 멀리 가지 못하고 범인과 몸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힘에서 밀리면서 범인이 휘두른 돌에 맞은 후 쓰러진 것으로 보인다. 현장에서는 피 묻은 돌이 발견됐다. 

범인은 김씨가 쓰러지자 흉기로 찔렀고, 숨이 끊어졌다고 생각해 자리를 떴다. 하지만 김씨는 이때까지 가느다란 숨이 붙어 있었다. 그는 23일 오전 1시13분쯤 사력을 다해 휴대전화로 ‘119’를 눌렀으나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마을주민들은 사건 현장에 대해 “상주 사람들도 알기 쉽지 않은 곳”이라고 말했다. 낮에도 헷갈리지만 밤에는 더욱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다. 범인이 사전에 알고 있었던 장소로 볼 수 있다.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거나 근처에서 일을 했을 수도 있다. 당시 인근에서는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범행을 실행한 범인, 그러나 그도 한 가지 단서를 남겼다. 범인은 김씨를 살해하고 택시를 탈취해 85km를 달려 안동에 도착했다. 택시는 안동터미널과 안동역 인근의 장소에 세워 놓았다. 

이 과정에서 제한속도가 80km인 국도에서 93km로 달리다가 과속으로 단속카메라에 촬영됐다. 화질이 좋지 않아 운전석에 있는 범인의 윤곽만 확인할 수 있는 정도였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용의자의 몽타주를 만들었고, 사진 속 모습에 대해 “모자를 쓰고 콧수염이 있다”고 명시했다. 

2017년 8월 KBS1 《강력반 X-파일 끝까지 간다》에서 이 사건을 자세히 다뤘다. 당시 제작진은 전문가를 통해 용의자가 촬영된 사진을 정밀분석하고 사진 개선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모자를 쓴 것은 확실하지 않고 콧수염은 없는 것으로 나왔다. 

해당 방송은 “범인은 건장하고 단단한 체형이며 귀가 큰 편”이라고 덧붙였다. 현재 이 사건은 범인을 잡으면 언제든 처벌이 가능하다. 경북지방경찰청 미제전담수사팀에서는 사건과 관련한 제보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범인이 남긴 단서들

1. 범인은 김씨를 계획적으로 노렸다. 

사건 전후를 보면 범행은 철저하게 계획됐다. 김씨가 받은 두 번의 전화 발신지는 모두 영주역 인근 우체국 앞 공중전화였다. 범인은 범행 후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당시 우체국에는 전면을 바라보는 폐쇄회로(CC)TV가 있었지만 범인의 모습은 찍히지 않았다. 범인은 미리 CCTV의 사각지대를 파악하고 있었고, 우체국 왼쪽에서 나타나 왼쪽으로 사라지면서 자신의 모습을 감췄다. 또 약속 장소를 바꿔가며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범인은 김씨를 상주의 깊은 산속으로 유인해 살인과 시신 은폐를 용이하게 했다. 김씨의 택시로 범행 현장을 빠져나와 제3의 장소인 안동에 택시를 버렸다. 범행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범행은 살인이 목적이다. 

범인은 처음부터 김씨를 노리고 살인 계획을 짰다. 택시강도로 보기에는 범행에 너무 많은 공을 들였다. 경찰은 김씨가 사건 당일 약 10만원 정도를 벌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단순히 하루 수익금을 노린 범행으로 보기에는 금액이 너무 적다. 게다가 차 안에 있던 현금 2만원과 동전은 그대로 두고 갔다.  

범인은 항거불능 상태인 김씨의 가슴과 복부를 세 번이나 찔렀는데, 처음부터 죽이기로 작정했다고 봐야 한다. 김씨를 살해한 이유는 명확하지 않지만 원한이나 금전관계를 의심해 볼 수 있다. 

3. 범인은 피해자와 아는 면식범이다. 

범인은 김씨와 아는 사이일 가능성이 높다. 우선 택시 예약을 직접 전화를 걸어서 했다. 보통 호텔 손님의 경우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불러 달라고 한다. 하지만 당일 김씨에게 연락해 택시 예약을 한 호텔 직원은 없었다. 

택시영업은 ‘시간이 돈’이다. 최대한 빠른 시간에 많은 손님을 태워야 돈을 더 벌 수 있다. 오랫동안 손님이 오지 않으면 택시기사는 초조하게 마련이다. 범인은 처음 김씨에게 전화해 장거리 예약을 한 후 약속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연락도 두절 상태였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전화를 걸어 특정 장소에서 만났다.

김씨는 1차 예약 장소인 호텔 앞에서 무려 42분 동안이나 범인을 기다렸다. 초면일 경우 예약해 놓고 연락두절 상태인데 한곳에서 오랫동안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 범인에 대한 신뢰가 없으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4. 범인은 ‘영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범행 전후를 보면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다. 영주에서 택시를 타고 상주에서 살해한 후 택시를 안동에 주차해 놓은 것도 그렇다. 결과적으로 범인의 계획은 들어맞았다. 최대한 수사범위를 넓혀 자신에게 좁혀오는 수사망을 피했다. 지금까지도 경찰은 범인의 연고지를 특정하지 못했고, 그만큼 수사에 혼선을 가져왔다. 
그런데 범인은 왜 이런 연막을 피워야만 했을까. 그가 세 곳(영주·상주·안동)과 상관없는 타 지역 사람이라면 굳이 이렇게 할 이유가 없다. 이는 범인이 이들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특히 면식범이고 계획적인 살인으로 본다면 범인은 ‘영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범인에게는 또 하나의 노림수가 엿보인다. 현재 우리의 경찰 수사는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관할경찰서에서 맡는 것이 원칙이다. 피해자가 영주 사람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상주경찰서에서 맡은 이유다. 범인이 영주 거주자일 경우 지역을 잘 알고 있는 경찰서에서 수사를 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런데 상주를 범행 장소로 정함으로써 이런 부담을 해소할 수 있다고 본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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